진정성이 만드는 콘텐츠 ‘공감온도’
코스피의 고공행진이 ‘불장’ 신화를 이어가고 있지만 ‘호황’이라고 선뜻 말하는 사람이 없는 요즘이다. 첨단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우리의 일상에 엄청나고도 신선한 편의를 안겨줬지만, 과거 ‘철밥통’이라 불렸던 직장들에서 명퇴신청을 받는다는 기사를 보며 그것이 나의 현실은 아니기를 바란다. 희비쌍곡선이 존재하는 ‘아이러니의 시절’이다.이럴 때 우리를 엄습해오는 키워드는 불확실성. 커지는 불안감에 ‘위로’가 절실하다. 동료도, 가족도 ‘찐’하게 못해주는 위로를 캔맥주를 친구삼아 킬링타임하며 보는 드라마에서 받는다면? 그 또한 아이러니다.
사회적 분위기와 시대상을 가장 빠르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반영하는 콘텐츠를 이야기할 때 TV 드라마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나 OTT가 없던 시대엔 극장을 찾아가야 볼 수 있는 영화보다는 집에서 TV를 통해 보는 드라마의 편재력과 파급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드라마가 시대를 위로했던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 방영중인 드라마 두 편이 눈에 띈다. 첫 방영부터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tvN ‘태풍상사’와 jtbc의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가 그것.
두 작품은 주말드라마라는 점 외에도 보통 사람들의 애환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자는 전 국민이 국가의 위기를 함께 대처해야 했던 암울한 IMF 외환위기 시절이 배경으로, 부도 위기 속에서 아버지가 남긴 중소기업 ‘태풍상사’를 지키기 위한 청년사장의 성장기와 가족들의 고군분투의 이야기다. 후자는 원작 소설로 한 차례 검증을 거친, 열심히 살지만 행복하기 어려운 이 시대 중년의 현실을 풀어내는 블랙 코미디로 곳곳에 공감 포인트가 숨겨져 있다.
눈 앞의 현실에 무릎 꿇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과 소신을 고집하며 삶을 살아내는 주인공들은 우리의 모습에 투영된다. 드라마라는 이 흥미로운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 생태계는 인류가 생존하는 한 지속될 것만 같다.
은퇴한 국민 스타 김연경이 신인감독으로서 프로 농구팀에서 퇴출당한 여자 배구선수들과 함께 창단한 ‘원더독스’팀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프로팀에서 퇴출당한 선수들의 패자부활전과도 같은 도전에, 연승이 아닌 연패의 흑역사에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속에 ‘진정성’과 ‘진심’을 엿보기 때문이다. 1등보다 2등에게, 승자보다 패자에게 마음이 더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감독으로서는 초보인 김연경이 보여주는 좌충우돌 리더십과 선수들의 성장의 서사는 시청자의 ‘공감온도’를 잘 맞추고 있다.
대중이 소비하는 콘텐츠와 마찬가지로 브랜드도 소비자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때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가진다. 드라마가 현실을 위로하고, 예능이 진정성을 보여주듯, 시장에서도 ‘진심’은 가장 강력한 마케팅 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1등 보다 2등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터치한 대표적 사례 중에 광고의 레전드 중 하나로 회자되는 렌터카 브랜드 에이비스(Avis)의 “We try harder(우린 더 열심히 합니다)” 캠페인이 있다.
렌터카 시장에서 허츠(Hertz)를 넘어서지 못하던 에이비스는 “우리는 1등이 아니기 때문에 더 노력한다”는 과감한 고백을 메시지로 내세웠다. 그 메시지에 소비자의 마음은 움직였고, 2등 나름대로의 품격을 만들어 냈다.
비슷한 맥락에서, 2020년 맥도날드에 밀려 햄버거 시장의 2등이었던 버거킹(Burger King)은 식품으로서는 과감하게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 소비자의 마음을 얻은 사례를 남겼다. 식품용 방부제나 첨가제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30일 가량 방치한 햄버거에 곰팡이가 핀 사진을 그대로 공개한 것. 인공 방부제가 없는 것의 아름다움"(The beauty of no artificial preservatives)" 이란 카피와 함께 공개된 부패된 버거의 비주얼은 다소 충격적이긴 했으나, 진짜를 보여주겠다는 버거킹의 용기는 패스트푸드의 이미지를 개선하는데도 일조했다.
진정성은 브랜드의 감성자산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 불편하지 않아야 가치를 발한다. 그래서 때론 날 것 그대로 직설적인 것이 더 솔직하고 군더더기 없이 느껴진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말. 어쩌면 우리가 옆 사람에게서 듣고 싶은 말일지 모른다. 퇴근할 때마다 AI에게 하소연을 하던 옛 동료를 생각해보면, 미디어를 통해 위로 받은 우리의 모습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시절을 살고 있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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