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진실을 지킨 청년 기록자들을 찾아서

1980년 5월, 계엄군의 총칼 아래에서 침묵을 강요당한 도시는 오히려 더 치열하게 기록되고 있었다. 왜곡된 보도가 광주를 고립시키던 순간에도 대학언론은 교정 안팎에서 진실을 전하고, 유인물과 대자보로 현장의 목소리를 이어 붙였다. 5·18 민주화운동 46주기를 맞은 오늘, 한경 잡앤조이 대학생 특별취재팀(고서영, 유영훈, 이서영, 이정민 기자)은 다시금 그 날의 사건에 질문을 던졌다. 태어난 곳을 잊지 않고 다시 돌아가는 연어처럼, 그 시절 발자취를 다시 돌아보며 지금 대학 언론의 현실을 되짚어 보기로 했다.
1980년 10월 군사재판정에 서있는 전용호 씨(‘대학의 소리’ 투사회보)
1980년 10월 군사재판정에 서있는 전용호 씨(‘대학의 소리’ 투사회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1982년, 당시 광주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던 김종률이 작곡한 「님을 위한 행진곡」 中

5·18 민주화운동이 46주기를 맞았다. 1980년 5월, 당시 현장을 기록한 대학 언론의 활동은 훗날 5·18의 진상을 규명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정립하는 토대가 되었다. 본지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학생기자들이 당시 대학 언론과 청년들이 밟아 온 민주화운동의 여정을 따라 가 봤다.

들불야학, 그리고 '대학의 소리'가 된 청년들
현재 5·18 진상규명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 중인 전용호 씨(전남대 경제 78학번)는 1980년 당시 ‘대학의 소리’ 홍보팀에서 유인물을 제작하던 학생이었다. 그해 3월, 전남대생들은 개강을 시작으로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들불야학’에서 강학으로 활동했다.

당시 총학생회는 군부세력의 움직임을 보도할 공식 창구가 막히자 비공개 ‘비밀기획팀’을 꾸렸는데, 이들이 운영한 ‘대학의 소리’는 등사기를 구해 유인물을 제작하며 살아있는 대학 언론을 자처했다.
등사기 앞에서 웃고 있는 박용준 열사. 27일 새벽 계엄군의 총격에 사망
등사기 앞에서 웃고 있는 박용준 열사. 27일 새벽 계엄군의 총격에 사망
당시만 해도 군부가 집권하던 시대여서 언론을 완전히 통제하던 상황에 유인물을 만들고 배포하는 행위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을 안겨 주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전 위원은 들불야학 동료이자 열사였던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기록하듯 전했다.

80년 5월 18일 10시, 전남대 정문에서 시작된 학생 시위로부터 5월 항쟁이 시작했다. 시내 집결지인 녹두서점에서 청년들은 ‘시민들에게 시위 행동지침 등을 알리는 소식지가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들불야학은 27일 새벽 계엄군이 공격해 들어올 때까지 제작을 계속했다. 다행히도 전용호 씨는 대피했으나 새벽 5시 무렵 투사회보 팀 박용준이 총에 맞아 사망하고 야학 학생 윤순호, 나명관이 체포됐다. 전씨 또한 추후 투사회보를 제작·배포하다가 투옥됐다.
왼쪽 아래 시신이 윤상원 열사(투쟁위원회 대변인, 들불야학 강학)
왼쪽 아래 시신이 윤상원 열사(투쟁위원회 대변인, 들불야학 강학)
김영철, 윤상원 열사 역시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투쟁위원회 기획실장이었던 김영철 열사(1948~1998)는 5월 27일 새벽까지 도청에서 윤상원 열사와 투쟁하다 체포됐다. 수사 도중 자살을 기도했던 그는 병원에서 머리 겉만 치료받은 채 다시 감방에 수감됐고, 결국 18년간 고난을 겪다 세상을 떠났다.

기성 언론의 침묵, 대학 언론의 ‘에두른 저항‘
전남매일신문 진단 사직서
전남매일신문 진단 사직서
청년들이 펜 끝에 자신의 생애를 싣고 유인물을 펴낸 목적은 명확했다. 신군부의 ‘K-공작계획’과 사전 검열로 기성 언론이 완전히 장악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연결도로 봉쇄로 광주로 들어오지 못했고 방송은 오락 프로만 내보냈다. 전 위원은 “그 시기 시내 소식을 알려주는 유일한 매체는 투사회보뿐이었다”고 회고했다.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이 ‘부끄러워 펜을 놓는다’며 집단 사직서를 던지던 시절, 대학신문 역시 자유롭지 못했으나 기성 언론의 침묵에 반해 끊임없이 진실을 취재했다.
숭대신보, 473호 中, '신문이 화형당하고 편집국장이 강제구금 조치를 당했다’는 기록
숭대신보, 473호 中, '신문이 화형당하고 편집국장이 강제구금 조치를 당했다’는 기록
박진우 5·18기념재단 국제연구원 팀장은 당시 대학신문의 보도는 학내 경찰 배치와 학교 당국의 개입 속에서 은유적으로 대항했다고 말한다. 학생 기자들은 시, 수필, 사진, 만화, 칼럼 등을 활용해 검열과 탄압 속에서도 5·18에 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숭대시보는 편집국장 구금 사건을 기록했으며, 이대학보 또한 1983년 별개의 칼럼을 통해 대학가의 엄혹한 소식을 전했다. 비유와 상징으로 ‘에둘러’ 표현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는 5·18을 알리려는 학생 기자들의 몸부림이었다.
이대학보, 1983년 5월 16일(1면), 「상록탑: 23년전 가신 이에게」
이대학보, 1983년 5월 16일(1면), 「상록탑: 23년전 가신 이에게」
저항의 흔적은 ‘백지’로도 남았다. 1981년 충북대신문은 검열로 삭제된 지면을 백지로 발행하며 무언의 의지를 보였다. 강원대신문 기자들은 사과문을 싣다 강제징집과 구류 처분을 받았고, 조선대 학생기자들은 ‘지하신문’ 제작을 빌미로 전원 면직되는 시련을 겪었다. 검열의 흔적은 시대의 흉터로 남았다.

박 팀장은 취재 도중 만난 학생 기자들이 자신의 활동을 무용담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에둘러 기사화했던 것에 미안하고 부끄럽다”며 울먹였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광주의 희생 앞에 자신의 고초를 작게 여기던 그들의 부채의식은 훗날 진실규명의 거대한 동력이 되었다.

기록이 멈춘 곳에서 죄악은 시작된다
직접적인 언급이 금지된 상황에서도 5·18을 알리려 했던 대학신문 기자들의 몸부림은 1984년 이후 보도의 물꼬를 텄고, 오늘날의 진실을 있게 한 힘이 되었다.

전용호 위원은 현재의 언론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왜곡 보도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기자는 어떠한 이해관계에 휩쓸리지 않고 세상의 현상을 정확한 시각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46년 전 대학 언론이 보여준 기록의 투쟁은 오늘날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의 기록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사진=‘대학의 소리’ 투사회보]
[대학생 특별취재팀=고서영, 유영훈, 이서영, 이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