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학보사 기자로 살았던 40년 전 이야기
1985년 총학생회 부활의 시대, 활판 인쇄기 앞에서 민중의 삶을 기록했던 그가 40년 만에 후배 기자와 마주 앉았다.1985년 봄,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한 한 신입생은 강의실 대신 신문사 문을 두드렸다. 재수 끝에 들어온 대학이었지만, 강의실은 고등학교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 무렵 캠퍼스에는 막 총학생회가 부활하고 있었다. 어설프게나마 현실을 기록하고 싶었던 그는 단대신문 45기 수습기자가 됐다. 그러자 사학과 동기들이 조롱 섞인 별명을 붙여줬다. '어용(御用) 기자.' 임금이 부리는 자, 체제를 선전하는 자라는 뜻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비아냥이 아니었어요. 어용이 되지 말라는, 걱정이 담긴 말이었죠. 그걸 그때는 몰랐습니다.(웃음)“
당시 단대신문 45기 수습기자였던 김명섭(61)씨는 현재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초빙교수로 한국 근대사를 후배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지난달 29일, 그의 연구실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김 교수의 책상 위에는 단대신문 700호 특집호가 놓여 있었다. 김 교수는 "오늘 이걸로 보여드릴 게 있을 것 같아서···"라며 40년 된 신문지가 열어 보였다.
당시 단대신문의 제작 주기는 화요일 발행이었다. 화요일 저녁 편집회의로 한 주가 시작되고, 수·목·금 취재, 금요일 데드라인, 토·일 원고 완성, 월요일 조판 확인의 사이클이 반복됐다. 조판은 지금의 기자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활판 인쇄였어요. 글자를 하나하나 끼워 넣는 거죠. 거기다 한글·한자를 병기해야 했으니, 데드라인 때마다 서로 옥편을 보겠다고 난리였죠.(웃음)“
85년의 시위, 10분 만에 진압됐다
총학생회가 부활한 1985년, 단국대 서문 앞에서 첫 학내 시위가 열렸다. 20~30명의 학생들이 마스크를 쓰고 구호를 외쳤다. 10분이 채 되지 않아 진압됐다.
김 교수는 그 시절을 '학원 민주화가 아니라 학원 공포 시대'라고 불렀다. 학교 입구에서는 불심검문이 일상이었고, 답사 중 장기자랑에서 북한을 흉내 냈다는 이유만으로 강제 징집된 선배도 있었다. '경찰서로 갈래, 안기부로 갈래, 아니면 군대 갈래' 세 가지 선택지 중 하나였다.
그 공포는 김 교수도 피해갈 수 없었다. 2학년 때 시위 현장 근처에 있다가 경찰에 붙잡힌 그는 경찰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책장을 싹쓸이해 갔다. 스터디에서 함께 읽은 책 목록까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엔 영장이 없어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 이후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새로 책이 생기면 땅속에 묻거나 숨겨야 했고, 집에 걸어가다가도 미행이 붙지 않았나 싶어 골목에 숨어서 기다렸다가 다시 걷고 그랬어요.“
그 감시는 군대에서도 이어졌다. 1988년 8월 입대 후 보안사가 동기를 통해 동향을 수집해 정기 보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동기의 상황일지를 우연히 들여다보고서야 알았다.
민주·민족·민중은 쓸 수 없었다
학보사 기사 한 줄을 지면에 올리려면 학생기자, 간사, 편집국장, 주간 교수, 학생처장을 거쳐 문공부(사실상 안기부)의 인쇄 허가까지 받아야 했다. '민주', '민족', '민중'이라는 단어 자체가 금지어였다. 광주를 '광주 민중 항쟁'이 아닌 '광주 사태'로 써야 했다.
선택한 탈출구는 르포였다. 농활에서 만난 농민의 부채 이야기, 성남 광주대단지의 도시 빈민 역사, 상계동 철거민의 삶. 도시 빈민 운동의 선구자 제정구 선생의 글을 직접 받아 실은 것을 김 교수는 지금도 자부심으로 기억한다. 시위 전력으로 요주의 인물이 된 탓에 기사에 자신의 이름 대신 '기획부'라고만 표기해야 했다. 이름 석 자를 쓰는 것조차 위험한 시절이었다.
국보법 기사,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
3학년 기획부장 시절, 국가보안법을 정면으로 다룬 기사를 썼다. 취재를 했고, 원고를 완성했고, 조판에 넘겼다. 그날 밤 학보사 출신 선배이기도 한 학생처장이 인쇄소까지 직접 찾아왔다.
"'이거 쓰면 너 진짜 위험하고, 신문 폐간된다'고 하더라고요. 까마득한 후배한테 직접 그 말을 하러 온 거잖아요.“
"그 사진 하나가 살아남은 것, 그게 그나마 위안이었어요.“
그 절망과 분노가 쌓여가던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터졌다. 평범한 대학생이 고문으로 숨졌다는 소식에 오랫동안 억눌려온 공분이 터져 나왔다. 그해 6월, 거리로 나선 것은 더 이상 소수의 운동권만이 아니었다.
6월 10일, 서울이 울렸다
1987년 6월 10일 오후 6시 정각. 서울시청 앞에서 차 한 대가 경적을 울리더니 그 소리가 사방으로 번졌다.
"빵, 하더니 여기저기서 빵빵빵빵. 어느 순간 시청 주변 모든 차가 동시에 울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나오기 시작하더라고. 그때 서울이 울린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알았어요.“
백골단이 튀어나와 시위대를 끌고 가던 그 많은 실패의 기억들이, 그날만큼은 다른 결말로 이어지고 있었다. 학보사의 중립성을 이유로 시위 현장 출입이 금지된 상황에서, 편집장 대신 기획부장인 김 교수가 87학번 후배들을 데리고 나선 것이었다.
"역사학자가 되다 보니 현장이 중요하다는 걸 더 느끼는데, 그 중요한 고비에 내가 있었다는 것, 그게 지금도 빛나는 시절로 남아 있어요.“
'왜'를 묻지 못한 시대
인터뷰 말미, 가장 쓰지 못했던 기사로 뜻밖의 것을 꼽았다. 바로 불심검문이었다. 법적 근거도 없이 가방을 열어 보이고, 경찰에게 주민등록번호를 외워야 했던 일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1987년 우상호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의 불심검문 거부 운동을 보고서야 비로소 충격을 받았다.
그 비정상의 일상화야말로 박정희·전두환 독재를 지탱한 또 다른 기둥이었다고 그는 내다봤다. 총칼만이 아니라 침묵하고 순응한 대중의 공모가 독재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왜라는 질문이 막힌 사회는 닫힌 사회다. 그 질문을 제때 던지지 못했던 것, 그것이 김 교수가 40년이 지난 지금도 가장 아쉬워하는 기사이자 시대였다.
후배 기자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다. 안중근의 말 '공리사이(公利私二)', 공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 그리고 단국대 설립 정신이기도 한 '억강부약(抑强扶弱)', 강한 자를 억제하고 약한 자를 보강하는 것.
인터뷰를 마치고 김 교수는 700호 특집호를 조심스럽게 접었다. 활판으로 찍힌 빼곡한 한자들이, 40년 전 어용이 되지 않으려 버텼던 한 청년의 흔적처럼 거기 있었다. 입사 당시 사학과 동기들이 붙여준 별명은 '어용 기자'였다. 그러나 40년이 지나 후배 기자 앞에 앉은 그는, 어용이 아닌 '필용(必用) 기자'에 가까웠다. 농민의 땅에서, 철거민의 골목에서, 그리고 6월의 시청 앞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던 기자였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대학생 특별취재팀=고서영, 유영훈, 이서영,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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