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는 러시아·동유럽 환상문학 번역가이자 소설가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야 등의 작품을 한국어로 옮기며 언어와 세계를 동시에 훈련해 왔다. 단편집 『저주토끼』로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에 올랐고, SF 소설집 『너의 유토피아』 영어 번역본은 한국어 SF 소설로는 처음으로 로커스상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그 사이에 『붉은 칼』,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한밤의 시간표』를 펴냈다. 소설 속에서는 가해자를 저주하고, 억압의 기제를 죽이고, 고립된 인간의 내면을 해부한다. 현실에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서명에 이름을 올리고 노조 활동에 참여한다.
정보라 작가는 담담하게 말한다. 세상은 쓸쓸하다고 믿으면서도 뭐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시간이 보람 없다고. 정보라 작가를 만나 환상의 문법으로 현실을 쓰는 일, 피해자를 모욕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드는 일 그리고 혼자이지만 함께 걷는 일에 대해 들었다.
"『붉은 칼』을 쓸 때는 나선정벌의 역사적 과정이나 2016~2018년 당시 한국 상황을 더 많이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에 수록된 단편 '네순 도르마(Nesun sapra)'는 스탈린 시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플라토노프 단편에 나타난 사회 분위기를 많이 참조했죠."
-번역가와 소설가, 두 감각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양쪽 모두 감각보다는 훈련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번역을 하면 다양한 작가들의 줄거리 구성 방식, 표현 방식이나 문체, 관점을 한국어로 정확하게 옮기기 위해 고민해야 하기 때문에 창작 훈련에도 도움이 되죠. 반대로 번역을 할 때는 제가 소설가라고 해서 제멋대로 원작의 분위기나 문체를 바꾸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올해 한국어 SF로는 처음으로 로커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쟁쟁한 다른 작가님들과 함께 후보에 올라 영광입니다. 특히 폴란드 SF의 거장 야체크 두카이(Jacek Dukaj) 작가님의 '얼음'은 20008년에 폴란드어를 공부하기 위해 읽은 적이 있어요. 너무 어렵지만 정말 재미있어서 감탄했었는데, 제가 두카이 작가님과 같은 명단에 이름이 오를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한국 환상문학의 지형을 어떻게 보나.
"환상문학 중에서 SF는 김초엽 작가, 천선란 작가, 듀나 작가, 김보영 작가 등 걸출한 작가들을 계속해서 배출하며 해외에도 적극적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호러는 전건우 작가가 벌써 20년 전부터 굳건하게 발전시키는 중이고요. 조예은 작가처럼 호러-SF-판타지를 섞어 어느 한 장르라 규정할 수 없는 독특한 작품을 내놓는 작가들도 있습니다. 한국 장르문학은 문학적 정전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롭고 독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장르문학 작가와 본격문학 작가라는 구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저는 장르문학 작가입니다. 호러를 잘 쓰고 싶습니다. 번역가 안톤 허 선생님은 외국인들에게신춘문예 수상이나 문예지 추천이라는 과정을 '한국식 작가면허 시스템'이라고 설명하죠. 이제는 신춘문예 수상이나 문예지 추천이 경력의 문제일 뿐, 문학성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박해울 작가님처럼 문예창작과에서 훈련받고 등단 과정을 거친 후에 SF 작가로 활동하는 분도 있고, 윤고은 작가님처럼 사실주의의 경계에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를 종횡무진 오가는 분도 있습니다. 서미애 작가님처럼 시와 소설로 등단 2관왕을 달성한 뒤에 추리스릴러 분야에서 독보적으로 일가를 이루는 분도 계시죠. 장르가 작가를 선택하지 작가가 장르를 선택하는 건 아닌 듯합니다."
"제가 무섭다고 생각하는 것을 공포의 대상으로 정합니다. 대체로 한국 전통의 처녀귀신 이야기에서는 귀신이 아동학대 피해자(장화홍련전)나 성폭력 피해자(아랑전설) 등 피해자인데, 원한이 풀리고 나면 살아 있을 때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되돌아가 이승을 떠납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면 피해자는 무섭지 않고 피해를 일으킨 사회체제와 피해자를 억압하는 권력의 기제가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그런 조상의 얼을 이어받아 처음에 무섭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서운 억압의 기제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이야기를 만들어보려 합니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의 인물들처럼 기이한 대상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고 고립된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이유는.
"입시나 고시를 앞둔 학생에게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만 해라' 같은 이야기를 덕담처럼 하거나, 혹은 본인이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한국인이라면 다들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 자체가 어떤 한 가지에 어릴 때부터 몰두해서 인생의 모든 것을 거기에 쏟아부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세뇌하죠. 그런데 실제로는 사람이 그렇게 고립되면 연약해지고 심리적, 정신적으로 왜곡된 삶을 살게 됩니다. 인간은 단 한 가지만 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닙니다. 다양한 경험을 하는 그 과정 자체가 삶이에요. 그 사실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인물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 선택은 어디서 비롯됐나.
"원래는 이름을 잘 짓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붙이지 않는 편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장편에서는 인물 구분을 위해 이름이 필요해 고민이 많았죠. 이후 한 일본 만화가가 ‘악역 이름 때문에 현실의 아이들이 괴롭힘당할 수 있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 뒤로는 인물에게 현실과 겹치지 않는 최대한 비현실적인 이름을 지어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 편의 소설이 쓰일 준비가 됐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어떤 순간인지.
"첫 문장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단편의 경우에는 결말을 먼저 정해놓고, 그 도착점에 이르려면 어떤 출발점이 가장 어울리는지 생각해서 도입부를 구성합니다. 장편의 경우에는 결말도 도입부도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수많은 고민을 거친 뒤에 전체적인 구조가 정해져요. 장편이든 단편이든 어떤 강렬한 이미지와 거기에 관련된 하고 싶은 이야기가 결정되면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단편과 장편을 오갈 때 창작 방식이 다른지.
"단편은 결말부터 정해놓고 결말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담아서 씁니다. 연작은 단편을 여러 개 이은 형태라 어느 정도는 이런 방식으로 쓸 수 있죠. 장편은 이런 방식이 불가능해서 쓰다 보면 결말을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원래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장편의 경우에는 챕터별로 다르게 나누어 담아야 합니다. 단편과 장편은 본래 다른 장르라는 문학 이론도 있는데 확실히 구상 단계부터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쓸수록 체감하고 있습니다."
-서늘한 여운이나 기이한 불확실성을 남기는 결말을 선호하는 이유는.
"현실 자체가 언제나 열려 있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이한 불확실성이야말로 가장 사실주의적인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피나 오물이 상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머리」에서 변기 속의 머리, 「덫」의 여우는 단편의 중요한 등장인물이에요. 그러므로 이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있는 그대로 묘사합니다. 특별히 조절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요소를 독자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나름의 기준이 있다면.
"여러 가지 사건이 정신없이 많이 일어나야 합니다. 민담이나 설화부터 시작해서 환상적 서사의 역사는 굉장히 오래되었습니다. 전래동화 속의 말하는 호랑이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용 등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어느 문화권에나 그 나름의 설화가 있기 때문에 독자들이 즉각 '옛날 얘기구나' 하고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마술적인 효과가 있죠. 독자들이 일단 받아들이면 그다음부터는 논리적으로 되돌아볼 틈을 주지 않고 계속 사건에 사건을 일으켜 정신없이 끌고 가야 합니다. 개연성은 사실 없습니다."
-「머리」는 리얼리즘 기반의 여성주의 문학과는 다른 어떤 효과를 의도했는지.
"'머리'는 제가 평생 처음 쓴 소설이에요. 오로지 학교 공모전에서 상금을 타고 싶었기 때문에 문학적 효과까지 생각할 여유도 작가로서의 성숙도도 없었습니다. 다만 당시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으로서 제가 바라보는 사회의 어떤 명확하고도 잔혹한 측면이 얼마나 괴이한지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너의 유토피아』는 기존 아포칼립스 장르의 남성 중심적 클리셰를 파괴했다는 평이 있다.
"기존 아포칼립스 장르의 남성 중심적 클리셰 자체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어차피 오래 갈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최장기간 매몰되었으나 살아남은 생존자는 평범한 여성이었어요. 『너의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성별의 인간이 다 멸종하고 기계만 살아남은 세계 이야기를 더 많이 상상했습니다. 아포칼립스가 실제로 닥친다면 남성이든 아니든 다 죽을 거라고 생각해요."
-독자가 작가님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작품을 해석했을 때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다면.
"단편 '머리'에 대해서 정말 여러 가지 해석이 많이 나와서 당황하면서도 기뻤습니다. 거의 30년 전에 쓴 짧은 이야기인데 이렇게까지 여러 나라에서 여러 독자님들이 다양한 감상을 말씀해주실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어요. 여담으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이후 『저주토끼』가 해외 독자들에게 읽혔을 때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다면 성인 독자님들이 어린 자녀들에게 읽어주셨다고 말씀해서 심히 당황했습니다. 제목에 '토끼'가 나오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궁금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어린이 정서에 좋지 않은 책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주토끼』 작가의 말에서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생명체는 혼자 죽는다"고 썼다. 그 세계관과 현실에서의 연대 활동은 어떻게 공존하나.
"세상은 쓸쓸하고 모든 존재는 혼자 살다 혼자 죽기 때문에 제가 무슨 활동을 하든 궁극적으로는 저라는 한 인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뭐라도 해야 제가 살아 있는 시간을 보람 있게 만들 수 있죠. 저 혼자 변화를 일으키는 건 불가능하지만, 이미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분들을 따라다니면 세상을 조금 덜 쓸쓸하고 덜 힘들게 만들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쓰레기 만두 파동'이나 집회 현장처럼 구체적인 현실에서 출발해 환상 서사로 변환할 때,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감각이 있다면.
"피해자를 모욕하지 않기 위해 줄거리 구성에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주로 가해자를 저주하고 죽이는 방식을 열심히 궁리하는 편이에요. 돈과 권력이 어떻게 쏠려 있고 그 불공평함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명확하게 줄거리에 나타내면서도 교훈적이거나 뻔한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참혹한 현실을 환상의 문법으로 이야기할 때 비판적 메시지가 더 예리하게 가닿는다고 보는 이유는.
"앞에 말씀드렸듯이 교훈적이거나 뻔한 결론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너무 큰 트라우마를 겪으면 이게 현실인지 잘 다가오지 않거나,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피해자 관점에서 비현실적인 감각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죠."
-창작 과정에서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에게 주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는 지점은.
"여성뿐 아니라 '이성애자 시스젠더 비장애인 성인 남성'이 아닌 모든 존재를 다양하게 주체로 삼으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이른바 '정상성'의 기준에서 멀리 벗어나 있을수록 더욱 이상하고 독특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어요."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도덕적 억압을 소설 속에서 어떻게 표현하는지.
"도덕을 억압적, 강박적으로 어떤 소수의 사람에게만 들이대려는 인간들을 미치광이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최대한 많이 죽이죠."
-앞으로 호러나 SF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문학적 복수'를 완성하고 싶은 사회적 의제가 있다면.
"국가폭력의 문제에 대해서는 꼼꼼하게 기억하고 언제나 이런저런 것들을 이렇게 저렇게 죽여야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이진호 기자/ 이수민 대학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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