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현 부산디자인진흥원 경영기획팀장 (디자인학 박사)
어제의 첨단은 오늘의 일상이 되고, 오늘의 혁신은 내일의 유물이 된다. 이제 기술 변화의 속도는 예측의 영역을 넘어섰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업무와 창작의 방식을 바꾸고, 디지털 트윈과 로봇 기술은 산업 현장을 재편하고 있으며,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초연결 환경은 인간의 생활 방식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우리는 이미 거대한 전환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미래 기술로 여겨졌던 인공지능, 자율주행, 로봇, 확장현실(XR), 사물인터넷은 산업과 사회 곳곳에서 현실이 되었다. 기술은 더 이상 특정 산업의 경쟁력이 아니라 모든 산업의 기본 인프라가 되었고, 변화의 주기는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융합'이다. 기술은 기술끼리 결합하고, 산업은 산업의 경계를 넘어 연결된다. 예술과 인공지능이 만나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고, 패션은 역사와 문화, 스토리텔링을 통해 브랜드 가치를 창출한다. 제조업은 데이터 산업으로 진화하고, 서비스는 플랫폼과 결합하며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낸다. 이제 융합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
인류의 생활 또한 빠르게 디지털화되고 있다. 음성과 이미지, 금융과 유통, 교육과 의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활동이 디지털 네트워크 위에서 이루어진다.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연결되고 데이터가 순환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디지털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다. 디지털 전환은 더 이상 미래의 과제가 아니라 현재의 현실이다.
이러한 변화는 디자인에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왔다. 그러나 앞으로의 시대는 지금까지와 다른 질문을 던진다. 과거에는 더 좋은 제품을 만들고 더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디자인의 주요 역할이었다. 디자인의 영역을 확장하고 전문 분야를 세분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장 동력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디자인이 필요한 영역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디자인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게 된다. 모든 것이 디자인의 대상이 된 시대에 디자인은 무엇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가.
그 답은 디자인의 역할 변화에 있다. 디자인은 더 이상 결과물을 만드는 행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술과 사람을 연결하고, 산업과 산업을 융합하며, 다양한 이해관계자 사이에서 새로운 가치를 기획하고 조정하는 역할로 확장되어야 한다. 디자인은 형태를 만드는 기능을 넘어 문제를 정의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전략적 역량으로 진화해야 한다.
특히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작 영역까지 빠르게 침투하는 시대일수록 디자인의 본질은 더욱 중요해진다. 기술은 답을 제시할 수 있지만 질문을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방향이 더 나은 미래인지, 누구를 위한 혁신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디자인의 역할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디자인의 진정한 가치는 디자인 자체에 있지 않다. 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모든 대상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때 비로소 그 존재 이유가 완성된다. 지능화된 시스템과 협업하고, 산업 간 경계를 연결하며, 사회적 공감과 지속가능성을 이끌어내는 것. 그것이 미래 디자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결국 미래를 바꾸는 것은 기술만이 아니다. 기술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람의 삶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힘, 바로 디자인에 있다.
© 한경매거진&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