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브이로그]
에너지 산업을 통해 바라본 규제·인프라 산업의 특성
류준우 그리드위즈 대표(디캠프 배치 멘토)

나는 전력·에너지라는 규제 산업이자 핵심 인프라 산업에서 창업했다. 막 창업을 했을 무렵엔 이 분야에 필요한 기술이고, 좋은 기술이면 당연히 고객이 선택하고 시장도 열릴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산업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좋은 기술을 만들고도 팔 시장이 없어 멈춰 서기를 여러 번, 제도가 바뀌기를 기다리다 런웨이가 먼저 바닥나는 팀들을 여럿 지켜봤다. 그 시간을 지나오며 배운 것들을 지금 규제 산업이나 인프라 산업에서 창업하는 팀들에게 조금이나마 나누고 싶다.

기후테크라는 큰 카테고리에서 다시 에너지 분야로 속하는 이 산업에서 겪었던 특성을 통해, 규제산업이자 인프라 산업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성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특히나 늘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는 스타트업에게 유독 높은 허들이 되는 특성들이다. 이 지형을 정확히 아는 것만으로도 불필요하게 소진하는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믿는다.

먼저, 일반적인 시장에서는 좋은 제품을 만들면 고객이 선택한다. 그러나 규제·인프라 산업에서는 ‘살 수 있는 시장’이 제도로 만들어지고, 제도로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해왔던 사업 중 일부도 그랬다. 한때 빠르게 성장하던 국내의 에너지저장장치 시장은 화재 사고와 지원제도 축소 이후 민간의 신규 설치가 사실상 멈췄다. 글로벌 시장에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멈춰선 상태 그대로다. 이미 설치되어 당장 운영할 수 있는 수많은 배터리조차 그것을 운영해 가치를 제공할 시장이 없어 경제성을 잃고 잠들어 있다.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 기술을 팔 시장이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창업자는 ‘제품을 어떻게 만들까’를 고민하지만, 이 산업에서는 그보다 먼저 ‘이 제품을 살 시장이 제도로 열려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없다면 그 시장을 열기 위한 변화에 깊이 참여해야 한다.

에너지 인프라는 한번 깔면 수십 년을 쓴다. 그래서 이 산업은 다른 분야에 비해 시간의 단위가 다르다. 상대적으로 의사결정은 느리고, 검증은 길고, 인허가는 더디다. 우리가 쉽게 아는 송전망 확충만 봐도 입지 갈등과 인허가 지연으로 몇 년씩 밀리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다. 실증에서 표준으로, 표준에서 확산으로 이어지는 사이클은 스타트업의 런웨이보다 훨씬 길다.

문제는 이 흐름의 속도가 창업자의 통장 잔고를 고려해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금만 버티면 제도가 바뀔 것’이라는 기대는 대개 자금 소진 속도를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이 산업에서는 ‘언제 시장을 만날 수 있는가’를 기술 완성도보다 더 냉정하게, 더 먼저 계산해야 한다. 그리고 움직여야 한다.

전기는 잠깐만 끊겨도 사회가 멈춘다. 그래서 이 산업의 첫 번째 언어는 ‘혁신’이 아니라 ‘안전’과 ‘신뢰성’이다. 새롭다는 이유만으로는 채택되지 않는다. 오히려 검증되지 않은 새로움은 위험으로 분류된다. 사고 한 건이 산업 전체를 몇 년씩 얼어붙게 만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 산업의 중요한 이해관계자인 전력회사와 공공기관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스타트업의 ‘빠른 실패’는 미덕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심각한 사고다. 이러한 산업에서 창업을 결심했다면, 화려한 데모보다 ‘이것이 왜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가’를 설득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일반 시장은 무수히 많은 고객으로 기회가 열려 있지만 이 산업은 바늘구멍마저도 손에 꼽는다는 점이다. 국내 에너지저장장치 시장이 현재는 전력 당국이 주관하는 중앙계약시장이라는 단일 통로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통로가 하나뿐이면, 그 통로의 규칙 하나에 회사의 생사가 갈린다. 게다가 그 문 앞에는 오랜 업력의 대기업과 공기업이 먼저 서 있다. 신생 기업이 실적 없이 그 문을 통과하기란 쉽지 않다. 일단 무대에 올라설 기회조차 얻기 어렵다. 이렇게 진입장벽이 높다는 말은 곧, 첫 레퍼런스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이 다른 산업과 비교할 수 없이 클 수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운 특성은, 이런 규제와 규정이 지금은 급격히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너지 분야는 앞서 설명한 특성들로 인해 이전에는 변화의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이다. 급변하는 전 세계의 변화에도 가장 민감하고,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기후위기에도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면서 상상하지 못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사업의 근간이 되는 규칙 자체를 흔들어 버린다. 어제까지 유효하던 제도가 일몰되고, 수익과 직결되는 단가는 시장 논리와는 다른 이유로 움직이기도 한다. 검증된 기술이나 서비스조차 무의미한 규제 하나로 시장 참여가 막히기도 한다.

이 같은 불확실성은 스타트업에게 치명적이다. 대기업은 정책 변화를 버틸 체력이 있지만, 스타트업은 규칙 한 줄에 사업모델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이 산업의 창업자는 기술 로드맵만큼이나 ‘제도 로드맵’을 읽는 눈을 길러야 한다. 정책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남보다 먼저 정확히 읽는 것이 곧 생존 역량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겁을 주려는 글처럼 읽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반대다. 나는 이 산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믿는다. 규제와 인프라가 만든 높은 허들은 뒤집어 보면 아무나 넘어올 수 없는 진입장벽이기도 하다. 한 번 그 안에서 신뢰를 쌓고 자리를 잡으면,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기본기를 갖게 된다. 무엇보다 이 산업의 문제는 곧 우리 사회의 문제, 기후위기와 에너지 전환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와 맞닿아 있다. 크고 어려운 문제일수록, 그것을 푸는 회사의 가치도 크다.

다만, 그 도전은 지형을 정확히 아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시장이 제도로 열린다는 것, 시간의
단위가 다르다는 것, 안전이 혁신보다 앞선다는 것, 문이 몇 개 없다는 것, 규칙이 흔들린다는 것. 이 다섯 가지를 알고 시작하는 팀과, 모르고 뛰어드는 팀의 결말은 전혀 다르다.
어렵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이 산업에서의 첫 번째 생존 기술이다.
류준우 그리드위즈 대표(디캠프 배치 멘토)
류준우 그리드위즈 대표(디캠프 배치 멘토)
류준우 그리드위즈 대표(디캠프 배치 멘토)는 통신제어 반도체 설계 엔지니어로 시작해 여러 산업 분야를 접하다, 에너지 분야의 새로운 변화를 보고 2013년 그리드위즈를 공동창업했다. 2024년 상장 이후 현재는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기후테크 분야에 더 많은 스타트업이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디캠프에서 딥테크 스타트업 멘토로도 활동하고 있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