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극작가의 도발적 실험이 던진 질문… 연극 지망생들은 저마다 다른 답을 내놨다
-“AI는 내 옆에 특정한 누군가가 있다는 걸 모른다”… 대체 불가능성을 말하는 청년들

생성형 AI가 연극의 독백까지 몇 초 만에 쓰는 시대가 왔다. 정작 그 독백으로 평가받아 온 예비 예술인들의 생각은 엇갈렸다.

지난 5월 30일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2026 한국연극학회 춘계학술대회. ‘포스트휴먼과 연극’을 주제로 한 이 자리에서 극작가이자 연출가 정진새는 자신의 연극 ‘억압받은 비인간을 위한 103개의 모노로그’를 발제했다. 나무, 갈매기, 책상 같은 비인간 사물 103개를 정해 Chat-GPT가 각각의 시점에서 독백을 쓰게 하고, 그 결과물을 모아 극본으로 엮은 작업이다. 해당 연극은 지난해 9월 서울 신촌의 소극장 신촌극장에서 실제 공연으로 올랐다.

발표에서 정진새가 파고든 것은 AI 앞에서 인간 중심 형식이 지닌 문제였다. 그는 연극사의 명장면 속 독백으로 평가받고, 연극계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 한국 연극의 특성을 짚었다. 배우 지망생이 셰익스피어 ‘햄릿’의 독백이나 고전 명작의 독백을 얼마나 잘 소화하느냐로 오디션과 입시의 당락이 갈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독백을 기계가 빠르고 쉽게 찍어낸다. 그의 실험은 독백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 무엇을 측정하는가 라는 질문을 남겼다.

그래서 극작 지망생, 연기 지망생, 연출 지망생에게 물어봤다. 각기 다른 자리에서 공연예술계에 진입하려는 세 명의 청년에게 정진새의 발표 내용을 들려주고 생각을 들었다. 흥미롭게도 이들이 내놓은 답은 조금씩 달랐다.
카이스트 메타융합관 건물 외경
카이스트 메타융합관 건물 외경
극작가 지망생이 본 AI
문예창작과에서 희곡을 쓰는 극작가 지망생 정 모씨(23·여)는 정진새의 실험을 듣고 오히려 궁금증이 커졌다고 했다. “창작의 이유가, 궁금증이 해결됐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저는 그런 얘기를 듣고 더 궁금해지기만 하지 궁금증이 해결됐다는 생각보다는 거기서 더 나아가서 이야기할 걸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나보다 AI가 독백 대사를 더 잘 쓰는 것 같다면 또 그걸 이용해서 소재로 써도 되고, 아니면 AI가 진짜 못 쓸 만한 무언가를 찾아낸다든가.”

그가 강조한 것은 인간의 ‘기세’였다. “AI는 우리가 프롬프트를 넣지 않으면 멈춰 있잖아요. 웬만해서는 내가 궁금증을 물어보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계속 궁금해할 수가 있는 게 인간의 특징이라고 봐요. 호기심이 있다는 거. 그걸로 충분히 창작의 불씨가 꺼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실제로 그는 창작에 AI를 쓰지 않는다. “한 번 해봤거든요. 일단 속된 말로 짜쳐요.” Chat-GPT가 써준 독백을 두고 그는 “껍데기만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인물이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AI는 내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내가 고민한 것만큼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생각해낸 거지 AI가 생각해낸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껍데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나.” 결국 그는 “돌고 돌아 내가 직접 생각하는 방식”으로 쓴다고 했다.

다만 창작 현장의 지형이 바뀌고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일단 간단하게는 학과 내에서 AI나 로봇 관련 소재로 글을 쓰는 사람이 정말 많고, 거의 기피해야 되는 수준이에요. 교수님이 ‘AI 좀 그만 써라’ 하실 정도로.” 학교 안에서도 AI를 대하는 태도가 엇갈린다고 했다. 게임 기획 수업에서는 이미지 작업에 AI를 써도 된다고 하는 반면, 그림책 수업에서는 못 그려도 좋으니 직접 그리라고 한다. “왔다 갔다 해요. 지향하는 쪽이 있고, 지양하는 쪽이 있고. 과도기인 것 같아요.”
강연장 객석 전경
강연장 객석 전경
배우 지망생이 본 AI
정진새의 실험이 남긴 질문은 배우 지망생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가닿았다. 조 모씨(25·여)는 경영 관련 학과에서 연기예술로 전공을 바꿔, 웹드라마와 공연을 병행하며 배우를 준비하는 지망생이다. 그는 정진새의 문제 제기에 “조금 동의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독백은 내가 마음대로 그릴 수가 있거든요. 독백을 전하는 대상을 상상할 때, 카페에서 이야기하는 상황이면 이런 화려한 그림이 있고, 어떤 색의 커튼이 있고, 지금 내 앞에 아메리카노는 거의 다 마셔서 얼음밖에 없는 그런 상황을 얼마큼 자세하게 그리는가는 AI가 해줄 수 없는 영역이라고 봐요.” 따라서 심사위원 앞에서 “내가 어떤 상황을 그리고, 어떻게 앉아 있고, 내 앞에는 어떤 사람이 있을까 등 내가 상상한 걸 잘 보여주기에는 독백도 충분한 평가 요소가 되지 않을까”라는 것이 그의 반론이었다.

조씨는 Chat-GPT에 자신에 대한 독백을 부탁해본 적이 있다. 결과는 “애매하다”고 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는 인간과 AI의 결정적 차이를 짚었다. “사람은 누구에게 말하는지가 정해져 있어야 하는데, 그건 내가 정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거든요. AI가 삶을 살아준 게 아니니까.” 그는 특정 상대를 정하면 관계의 깊이가 결정되고, 어디까지 속을 털어놓을지가 정해진다고 했다. “근데 Chat-GPT는 내 주변에 누가 있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어떤 여자, 어떤 남자, 이웃 주민, 이런 것까지는 얘기해줄 수 있겠지만 구체적으로 숭실대학교에 다니는 특정한 누군가를 얘기해주지 않아요.”

정진새가 비인간의 독백에 초점을 맞춘 데 대해서도 조씨는 다른 각도를 제시했다. “내가 나무라면, 그게 무슨 나무일까. 소나무, 편백나무, 대나무 등 나무의 종류가 다 다르잖아요. 만약에 내가 소나무로 태어났다면, 자꾸 사람들이 내 이파리를 건드리면서 따갑다고 말하는게 속상할 수 있죠. 저는 그렇게 느끼거든요. 근데 어떤 사람은 만약 자기가 소나무라면 솔방울이 떨어지는 게 아깝다고 느낄 수도 있어요.” 같은 사물을 두고도,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지점이 배우의 몫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AI가 몇 초 만에 독백을 써내는 시대, 왜 우리는 독백으로 평가받나
연출가 지망생이 본 AI
연출가 지망생의 답은 또 달랐다. 비전공자로 연출에 입문한 정 모씨(28·남)는 AI를 ‘도구’와 ‘주체’의 문제로 봤다. 재작년 그가 쓴 작품의 주제가 바로 ‘AI의 간접 지배’였다. “뭘 먹어야 하지, 뭘 써야 하지, 이런 것도 AI에 맡겨버리는 걸 저는 간접 지배라고 봤습니다.” 그가 정리한 원칙은 분명했다. “AI의 도움을 받는다는 얘기는, 제가 뭘 해야 하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나만의 확고한 목표가 있고 AI를 도구로서 쓰겠다는 포지션의 차이인 것 같아요. 다만 제가 이걸 전적으로 AI에게 맡겨버리는 순간 인간이 아니게 되는 거죠.”

연출 지망생 정씨가 경계하는 것은 결과물의 품질이 아니라 과정의 소실이었다. “AI가 붓 하나로 그림을 그려도, 붓질하는 과정을 알려주지 않고 ‘짜잔’ 하면서 결과물이 바로 나와버린단 말이에요. 지브리 풍이 왜 이렇게 느껴지는지, 과정을 아예 모른 채 결과물을 얻게 되니까 저는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출 지망생 정씨가 배우의 연기를 디렉팅하는 방식에서도 AI가 대체하기 어려운 현장의 몫이 드러났다. 예를 들어, 후회하는 인물의 독백을 두고 그가 강조한 것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었다. “진짜 후회하면 그런 말, 대사가 안 나올 수도 있어요. 다만 그 감정을 버티고 끝까지 주어진 대사를 내보내야 합니다. 대사를 끝까지 치지 않고 감정에 휩쓸리는 대로 ‘악!’하고 소리를 지르면 안됩니다. 외려 대사로 내보냈기 때문에 관객으로서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어요.” 감정을 다 터뜨리는 대신 대사에 실어 버티며 보내는 그 미세한 조율이, 텍스트를 몇 초 만에 찍어내는 AI와는 다른 지점이라는 것이다.

AI가 연출까지 대체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연출 지망생 정씨는 회의적이었다. 그가 든 근거는 ‘인간성’이었다. “인간이 생각보다 논리 정연하지 않아요. 자존심이 세고, 대체되는 걸 싫어해요. 그런 걸 보여주는 게 연극인데, 과연 대체할 수 있을까요. 인간성을 보여주는 게 연극이고, 그걸 보는 관객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피드백 도구로서의 쓸모는 열어뒀다. “정보적인 부분에서는 뛰어날 수 있어요. 피드백도 줄 수 있어요.” 그러나 연출을 하는 이유가 “내가 느낀 바가 있고 그걸 올린 것”인 이상, 그 자리는 AI가 침범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세 사람의 결론은 저마다 다른 언어로 같은 곳을 향했다. 극작가 지망생은 ‘호기심’과 ‘기세’를, 연기 지망생은 ‘살아온 경험’과 ‘진심’을, 연출 지망생은 ‘주체’와 ‘인간성’을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꼽았다.

특히 연기 지망생 조씨의 말은 정진새의 실험이 놓친 지점을 정확히 겨눴다. AI는 갈매기의 독백도, 소나무의 독백도 그럴듯하게 써낸다. 그러나 배우의 옆에 숭실대학교에 다니는 특정한 누군가가 실재한다는 사실만은 알지 못한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실제로 마주하는 상대, 그 관계의 구체적 밀도는 삶을 살아본 자만이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망생들의 반응에 대해 정진새는 다른 시각을 내놨다. 그는 “AI가 쓴 독백이 ‘껍데기’인지, 인간이 쓴 독백이 ‘진정성’을 담고 있는지를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연극은 결국 배우가 무대에서 발화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같은 텍스트라도 배우의 해석과 수행에 따라 전혀 다른 감각과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AI 사용 여부보다 중요한 기준을 따로 짚었다.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은 창작자의 지향과 태도, 그리고 자기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다. AI를 사용 여부보다, 일관되게 질문을 던지고, 어떤 세계를 특정하게 바라보며, 무엇을 지속적으로 무대 위에 발생시키려 하는지가 예술가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진호 기자/오윤상 대학생기자
jinho23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