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빠진 옷장이 열렸다, 비만치료제 확산에 패션 시장 지각변동
위고비와 마운자로 등 GLP-1 계열 비만치료제가 빠르게 확산하면서 패션 시장의 수요 구조도 흔들리고 있다. 몸이 달라진 소비자들이 옷장을 통째로 교체하면서 어떤 기업은 특수를 누리고, 어떤 기업은 직격탄을 맞고 있다.

비만치료제, 몸집뿐만 아니라 시장도 축소
글로벌 투자은행 번스타인 리서치는 GLP-1 치료제 확산에 따라 미국에서만 연간 의류 지출이 최대 130억 달러(약 19조7700억원) 증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위고비를 1년 복용하면 체중이 평균 10~20% 감소하고 의류 사이즈는 최대 5단계까지 줄어들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번스타인 리서치는 사이즈가 한 단계 줄어들 때마다 소비자가 평균 5~8벌의 새 옷을 구매할 것으로 추산했다.

소비자 행동 변화도 데이터로 확인된다. 의류산업 전문 자문회사 서카나(Circana) 조사에 따르면 비만치료제 이용자 10명 중 8명은 체형 변화로 새로운 의류가 필요하다고 답했고, 이 가운데 55%는 이미 새 옷이나 신발을 구매한 것으로 나타났다. 데이터 분석기업 임팩트 애널리틱스 분석에서도 2022년과 비교해 2024년 여성 하의 기준 26 이하 사이즈 수요는 3%포인트 증가한 반면 남성 하의 XL·XXL 수요는 3%포인트 감소했고, 여성 보정속옷 XL 수요도 1.8%포인트 줄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감지된다. 패션 플랫폼 29CM에 따르면 지난달 '슬림핏 티셔츠' 거래액은 전년 동기 대비 212%, 슬림핏 블라우스는 147% 이상 증가했다. 반면 당근마켓에서는 올해 1~5월 의류 거래량이 전년보다 22% 늘었지만 같은 기간 '빅사이즈' 검색량은 25% 감소했다. 황용식 교수(세종대 경영학부)는 "체중 감량 이후 소비는 바지 한 벌을 바꾸는 수준이 아니라 상·하의와 이너웨어, 신발까지 한꺼번에 교체하는 '옷장 재편'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슬림핏 상품 거래 증가 역시 달라진 체형을 가리는 옷보다 드러내는 옷을 선택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라고 말했다.
살 빠진 옷장이 열렸다, 비만치료제 확산에 패션 시장 지각변동
‘올 체인지’ 소비에 웃는 백화점
살을 뺀 소비자들이 한두 벌이 아니라 옷장 전체를 교체하는 '올 체인지(All Change)' 소비에 나서면서 수혜는 프리미엄 채널로 집중되고 있다. 롯데·신세계·현대 등 주요 백화점의 올해 4~5월 여성복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5%, 남성복도 20% 안팎 증가했다.

유로모니터의 마르그리트 르 롤랑 글로벌 패션 인사이트 매니저는 체중 감량 과정에 있는 소비자들이 '새로운 나(New Me)' 심리에 따라 기존 옷장을 정리하고 새로운 스타일을 찾는 경향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는 "긍정적으로 달라진 신체 이미지와 줄어든 사이즈에 대한 인식이 새로운 옷에 대한 소비 의향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유니클로와 COS처럼 트렌디한 실루엣을 선보이는 브랜드들이 수혜를 입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홍주 교수(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는 "체형 변화에 성공한 소비자들은 그동안 입기 어려웠던 브랜드와 핏을 시도하려는 욕구가 커지면서 백화점과 컨템포러리 브랜드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인다"며 "패션 소비가 단순한 교체 수요를 넘어 자기 이미지 전환 소비로 이어지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눈물짓는 플러스 사이즈 브랜드
반면 플러스 사이즈 시장은 위축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 대표 플러스 사이즈 여성복 브랜드 토리드 홀딩스는 지난해 4분기 순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4% 감소했고, DXL의 연간 매출도 6.9% 줄었다. 보그 비즈니스에 따르면 2026년 FW 시즌 182개 패션쇼에서 공개된 의상 가운데 플러스 사이즈(미국 기준 14 이상) 비중은 0.3%로 전년(0.9%)보다 크게 낮아졌다.

임팩트 애널리틱스는 비만치료제 확산으로 특정 사이즈 수요가 빠르게 변하면서 재고 구성과 상품 기획 전반의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분석했다. 한편 이홍주 교수는 "플러스 사이즈 시장의 위축을 곧바로 수요 소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며 "체형 다양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시장이 움직이면 플러스 사이즈 소비자뿐 아니라 체형 변화 과정에 있는 소비자까지 놓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약이 대중화되면 시장은 더 크게 움직인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변화가 일시적 유행을 넘어 패션 시장의 구조적 재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르 롤랑 매니저는 향후 복용이 간편한 알약 형태의 GLP-1 치료제가 등장하면 시장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번스타인 리서치 역시 미국 의류 판매량이 연간 1~4%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국내 패션업계에 대해 황용식 교수는 "단순히 작은 사이즈 물량을 늘리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체형 변화 과정에 있는 소비자를 위한 전환기 상품과 수선·교환·스타일링 서비스까지 함께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홍주 교수 역시 "앞으로는 '마른 몸을 위한 패션'이 아니라 체형이 변화하는 소비자를 위한 패션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사이즈 교환 편의성과 핏 추천 기술, 체형별 스타일링 등 서비스 경쟁력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비만치료제 확산이 가져오는 변화는 '더 작은 사이즈'만의 문제가 아니다. 체형 변화에 맞춰 소비자의 옷장과 소비 방식이 달라지는 시대, 이를 얼마나 유연하게 흡수하느냐가 패션 기업들의 새로운 경쟁력이 될 전망이다.

이진호 기자/이수민 대학생 기자
jinho23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