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인프라 산업 스타트업의 생존 전략…제도는 내 통장의 잔고를 고려해 주지 않는다
류준우 그리드위즈 대표(디캠프 배치 멘토)

지난 글에서 규제·인프라 산업의 다섯 가지 특성을 이야기했다. 시장은 제도로 열리고, 시간의 단위가 다르며, 안전이 혁신보다 앞서고, 들어갈 문은 몇 개 없는데, 그 규칙마저 흔들린다는 것이었다. 어렵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이 산업에서의 첫 번째 생존 기술이라고도 적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정해져 있다. 그 지형 위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살아남는가. 미리 밝혀두면 이번 글은 성장 전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산업에서는 성장보다 생존이 먼저다. 시장이 열리는 날 그 자리에 살아서 서 있는 것, 거기까지가 이번 글에서 이야기 하려는 범위다.

먼저, 내 사업과 관련하여 어떤 제도가 열릴지를 보고 시장에서의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리드위즈는 2013년에 창업했고, 지금의 주력인 수요반응(DR) 사업의 무대가 된 수요자원 거래시장은 전기사업법 개정을 통해 이듬해인 2014년 11월에 열렸다.

시장이 열린 뒤에 준비를 시작했다면 늦었을 것이다. 제도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법안이 발의되고, 연구용역 보고서가 나오고, 시범사업이 돌고, 공청회가 열린다. 길게는 몇 년에 걸쳐 신호를 보낸다. 창업자는 그 신호를 정확히 읽어야 하고, 할 수 있다면 그 과정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실증사업과 규제샌드박스에 참여하고, 협회와 토론회에 나가 현장의 경험과 데이터를 전하는 일이다. 작은 스타트업이 무슨 정책 참여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도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늘 부족한 것이 현장에서 실제로 해본 사람들의 경험과 데이터다. 그것을 가진 팀은 작아도 앉을 자리가 생긴다.

다만, 한 가지는 냉정하게 구분해야 한다. 열릴 조짐이 보이는 시장과 내가 열리기를 바라는 시장은 다르다. 그러니 자칫 후자에 회사를 걸면 안 된다.

다음은 시간의 문제다. 제도의 시계는 창업자의 통장 잔고를 고려해 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도가 열리기 전에도 우리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수단은 따로 있어야 한다.

우리의 첫해 매출은 3억 원 남짓이었다. 어디 내놓기에 근사한 숫자는 아니었지만 그 매출이 있어서 다음 해를 맞을 수 있었다. 핵심 기술과 같은 방향에 있으면서, 제도와 무관하게 고객이 지금 당장 필요로 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 작고 폼 나지 않는 일이어도 된다. 그런 일은 현금도 주지만 고객의 현장을 배우게 해주고, 나중에 본 사업이 열렸을 때 첫 고객 명단이 되어 준다.

처음 우리가 이 분야에 기술의 변화를 소개하고 설득할 당시 정말 여러가지 일들을 다양하게 했고 그 덕분에 좋은 분들께 우리팀과 사업에 대해 의미 있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투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첫 기관투자를 받은 것은 창업하고 3년이 더 지난 2016년이었다. 이 산업에서 투자는 시장이 눈에 확실히 보이기 시작한 뒤에야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편이 안전하다. 특히나 기존에 없던 제도나 시장에 기반을 둔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런웨이에 대한 고민을 할 때도 제도가 예정대로 열린다는 가정은 조심해야 한다. 예정보다 언제든 뒤로 밀릴 수 있다. 그러니 ‘그 상황에서도 1~2년 이상 계속 버틸 수 있는가?’ 나는 이것이 최소한의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 이 산업의 언어가 안전과 신뢰성이라면 스타트업이 쌓아야 할 자산은 화려한 데모보다는 착실한 기록이다. DR 사업에서 우리의 성적표는 단순했다. 전력거래소가 감축을 지시했을 때 약속한 만큼 실제로 줄여냈는가. 그 이행률이 쌓여 신뢰가 되었고, 그 신뢰가 다음 고객을 데려왔다.

처음부터 큰 것을 맡겨 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 문제가 생겨도 되돌릴 수 있는 작은 범위, 고객의 기존 설비를 건드리지 않는 방식부터 시작해 사고 없이 운영한 시간을 늘려가야 한다.

인증서와 시험성적서, 운영 데이터처럼 고객이 조직 안에서 근거로 쓸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를 만들어 제공하는 것도 우리의 일이다. 우리가 항상 설득해야 하는 기업과 기관의 담당자들이 새로운 기술을 싫어해서 보수적인 것이 아니다. 인프라 사업에서는 문제가 없어야 함은 너무나 중요한 기본중의 기본이다. 그리고, 혹시나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해결하고 설명할 근거가 없는 것을 두려워할 뿐이다. 그 두려움을 확실히 없애 주는 팀이 선택된다.

마지막으로, 규칙이 흔들리는 산업에서는 제도 하나에 회사 전체를 걸면 안 된다. 지난 글에서 국내 에너지저장장치 시장이 멈춰 선 이야기를 했다. 우리도 그 충격을 그대로 받았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DR이라는 다른 다리가 있었고, 전기차 충전기에 들어가는 통신 모뎀처럼 국내 제도와 상관없이 해외에서도 팔리는 제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여러 사업을 벌이라는 말은 아니다. 작은 팀일수록 하나에 집중해야 한다. 다만, 같은 기술을 다른 제도, 다른 고객, 다른 나라에도 팔 수 있는 길 하나쯤은 열어두라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 매출의 몇 퍼센트가 특정 제도 하나에 달려 있는지를 늘 숫자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규칙이 바뀐 날부터 대책을 세우면 이미 늦다. 상장한 지금도 내가 늘 귀를 열고 날을 세우고 있는 이유다.

적고 보니 화려한 전략은 하나도 없다. 열릴 시장을 잘 선택해 그 과정에 참여하는 것, 시장이 열리지 않았다면 열리는 그때까지 먹고살 매출을 따로 갖는 것, 화려함보다 고객의 입장에서 착실한 기록을 쌓는 것, 제도 하나에 전부를 걸지 않는 것.

그런데 돌아보면 이 산업에서 사라진 많은 팀들은 대부분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장이 열리는 날까지 버티지 못해서 사라졌다. 반대로 끝까지 남아 있던 팀은 시장이 열린 날 경쟁자가 몇 없는 자리에 서 있었다. 이 산업에서는 버티는 것이 화려해 보이진 않지만 가장 적극적인 전략 중 하나이다.
"스타트업 생존 전략? 버티는 것이 가장 강한 전략" [텍스트브이로그]
류준우 그리드위즈 대표(디캠프 배치 멘토)는 통신제어 반도체 설계 엔지니어로 시작해 여러 산업 분야를 접하다, 에너지 분야의 새로운 변화를 보고 2013년 그리드위즈를 공동창업했다. 2024년 상장 이후 현재는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기후테크 분야에 더 많은 스타트업이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디캠프에서 딥테크 스타트업 멘토로도 활동하고 있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