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 개정은 한국 경제 ‘저속 노화’ 프로젝트

한국 경제가 구조적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가운데, 자본시장에서의 체질 개선 노력이 본격화되고 있다. 상법 개정과 주주환원 강화 등 정책 모멘텀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와 시장 재평가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마켓 인사이트]

지난 7월 1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상법 개정안 관련 공청회 장면. 사진=한국경제


한국 경제가 늙어 가고 있다. 저출산 및 고령화로 인해 구조적인 노동력과 소비의 기반은 약화되는 가운데, 대외 여건의 어려움도 더욱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은 과거 글로벌 공급망에서 대표적인 수혜를 누리며 제조업 수출 중심의 성장세를 지속해 왔으나, 이제는 탈세계화와 보호무역주의라는 글로벌 교역 환경의 변화 속에서 점차 활력을 잃어 가고 있다. 사람으로 비유한다면 고성장을 구가하던 건장한 청년 시절을 거쳐 기초 체력이 저하되는 중장년층에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노화를 피할 수 없다면 그 속도를 늦추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천천히, 건강하게 나이 드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저속 노화(slow aging)’의 가치를 한국 경제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저속 노화’가 필요한 한국 경제

저속 노화의 핵심은 일회성 다이어트와 같은 단기 처방보다는 운동, 식단, 수면 패턴 등과 같은 전반적 생활습관을 꾸준히 개선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즉, 저성장 진입에 따른 한국 경제의 노화 과정은 인정하되, 급격한 악화 가능성을 막고 체질 개선을 이루는 길을 지금이라도 모색해야 한다.

체질 개선은 말이 아닌 행동에서 비롯된다. 한국 경제의 체질 개선은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인구구조, 대외 무역 환경 등은 당장의 노력으로 큰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편,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자본시장 내에서 최근 확인되고 있는 상법 개정 및 주주 환원 강화의 움직임은 체질 개선 노력의 주요 신호탄이라고 볼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 시장은 오랜 기간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라는 고질병에 시달려 왔다. 이 표현은 2000년대 초반 처음 등장한 이후 20년 이상 지난 현시점에도 한국 시장을 대변하는 용어로 빈번히 언급되고 있다. 다른 시장에 비해 크게 할인된 가격이라도, 투자자들의 지속적인 외면을 받는다면 결국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취약한 지배구조와 낮은 수준의 주주 환원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만드는 대표적 원인이다.

따라서 상법 개정은 고질병 개선을 위한 핵심적인 처방이 될 수 있다. 지배주주의 사적 이익 추구를 견제하고, 소액주주의 권익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장치를 강화해 시장의 체질을 바꾸는 시스템 전환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7월 3일 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 전자 주주총회 도입 의무화, 사외이사 명칭 변경 및 역할 강화, 사외이사 감사위원에 대한 3%룰 적용 등의 핵심 내용을 포함한 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상법 개정과 더불어 배당소득 분리과세, 자사주 소각 의무화 등에 대한 후속 논의 역시 지속되고 있는 만큼 기존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지난 5월 이후 한국 주식에 대한 순매수를 유지하며 시장의 모멘텀을 주도하고 있다. 필자는 글로벌 은행의 구성원으로서 다양한 외국인 동료들과 시장을 논의할 기회를 갖고 있으며, 최근 이들 역시 한국의 자본시장 활성화 정책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한국이 일본 증시의 사례와 유사한 경로를 따를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 많다. 일본 주식은 꾸준한 지배구조 개선 및 주주 환원 정책을 통해 최근 몇 년 사이 시장의 재평가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한국 코스피 지수 내에는 시가총액이 장부상 순자산(자산-부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즉 주가순자산비율(PBR)이 0.5배 미만인 기업의 비율이 무려 약 43%로 미국(0%), 유럽(2%)은 물론 일본(9%)보다도 현저히 높다. 이로 인해 연초 이후 이어진 한국 증시의 강세로 코스피 지수가 3000포인트 시대를 열었음에도 외국인 투자자들과 대화에서 한국 시장이 ‘비싸다’는 인식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주요 밸류에이션 지표만 놓고 보면 절대적, 상대적 측면 모두 과거 평균에 못 미치는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



지배구조 개선의 실행력 및 제도의 일관성 증명해야

다만 단순히 저평가됐다는 근거만으로는 추가 상승 모멘텀을 얻기에 부족하다. 불투명한 지배구조, 미흡한 주주 환원 등이 재확인된다면 ‘싸도 접근이 어려운 시장’이라는 기존의 낙인으로 다시 귀결될 수 있다. 결국 현재 외국인의 핵심 질문은 ‘한국이 장기 투자가 가능한 선진화된 시장으로 볼 수 있는가’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 시장이 글로벌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지배구조 개선의 실행력 및 제도의 일관성을 증명해야 한다. 상법 개정이 형식적 통과에 그치지 않고, 이사회의 독립성을 실질적으로 강화해 나가는지 여부가 관건이다. 이를 계기로 기업들이 주주들의 가치 회복을 의식하고, 낮은 배당성향 및 자본 배분의 비효율에 대한 해결 의지를 보이는 것 역시 중요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 경제는 구조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고령화, 저출산, 글로벌 교역 둔화 등이 성장 잠재력을 위협함에 따라 올해와 내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은 모두 1%대(블룸버그 컨센서스 기준 2025년 1.0%· 2026년 1.8% 성장 전망)에 그치며 저성장이 고착화되고 있다.

한국 경제와 기업 실적에 대한 낮은 성장 기대는 주식 시장의 추세적 상승을 정당화하기에 부족한 면이 있다. 다행스러운 점은 정책 모멘텀을 바탕으로 자본시장 중심의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은 숫자만 보지 않는다. 우호적인 정책 방향성과 이에 기반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라는 내러티브는 추가적인 재평가의 핵심 동력이 될 수 있다.

저속 노화를 위한 한국의 체질 개선 프로젝트는 이제 막 시작됐다. 투자자들은 한국의 자본시장 변화라는 새로운 흐름에 적응하며 긴 호흡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홍동희 SC제일은행 투자전략상품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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