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알같은 글씨로 신천지 만들고파”

미술계에 범상치 않은 인물이 등장했다. 화가 유승호씨(33). 멀리서 보는 그의 작품은 평범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 속에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제목을 표현하는 깨알 같은 글씨의 집합은 소우주를 보는 듯하다. 이런 생경함이 보는 사람에게 희열을 준다. 이게 유승호 작품의 매력이다.승호는 깨알 같은 글씨로 구상화를 그리고, 콩알 크기의 점으로 반추상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화가다. 특히 한지라는 전통적인 매체에 붓 대신 펜을 사용해 그림을 완성, 화단에서 주목받고 있다. 독특한 생각을 덧칠한 ‘으-씨’그가 그림 그릴 때 사용하는 도구는 먹과 유사한 성분의 ‘로트링 드로잉 펜’. 이 펜에 들어가는 카트리지 하나로 대략 20~30호 크기의 작품 1점을 그릴 수 있다고 한다. 유승호의 캔버스(점 작업)작업과 종이(글쓰기작업)작업에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보통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30~50일이 걸린다. 피 말리는 작업일까. 유승호의 대답은 다르다. “작업할 때 놀이 하는 기분으로 몰두해요. 놀이가 그리 즐겁지 않을지라도 무언가가 끊임없이 손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는 포만감 때문에 작업합니다. 생활에서 만나는 즐거움이나 유희, 유머 등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집중하죠. 친구들은 도(道)닦는 것 같다고 하네요.”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에서 신천지를 그려가고 있는 유승호는 자의식이 강한 작가다. 그가 그려내는 작품의 주제는 현실에서 고민하는 그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대표 작품의 하나인 ‘으-씨’는 프랑스 화가 윌렘 드 쿠닝의 ‘여인 Ⅰ’의 이미지에서 그만의 독특한 생각을 덧칠한 그림이다. 쿠닝의 원작이 마치 물감을 채찍질해 놓은 느낌이라면, ‘으-씨’는 ‘으’와 ‘씨’라는 문자를 총구에서 마구 쏘아대는(격발) 장면이 연상된다. 제목의 의미를 묻자 화가는 “그냥 그림의 여인이 ‘으-씨’라고 화내고 있는 듯해서 그렇게 정했다” 고 말한다. 재치가 넘친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배움을 터득한다. 그 배움의 터전 위에 새살을 돋게 하는 것은 분명 창발성이다. 어느 평론가는 이 작품을 ‘시각과 청각이 떠도는 촉각의 공간’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슈-’는 ‘슈’라는 글씨를 수없이 반복해 중국 송나라 시대의 ‘계산행려도’의 후경을 재현하는 기발함을 보인다. 그는 “‘슈-’ 하면서 로켓이 발사되듯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산봉우리를 표현했다”고 말한다. 또 다른 그의 대표작품 ‘쉬-’에 대한 미술 평론가 이정우의 비평은 유승호를 새롭게 조망하게 만든다. “‘쉬-’의 화면에 얼룩을 만들어내고 있는 깨알 같은 글씨는 아이 오줌을 뉠 때 사용하는 의성의태어 ‘쉬’다. 이 글씨들의 얼룩을 잘 보면 오줌 누는 어린이의 형상이 나타난다. 기이하게도 우리의 뇌는 펼쳐진 얼룩과 흐릿한 인체의 형상을 동시에 보지 못한다. 따라서 그 경계선 상에 선 이미지는 묘하게 보는 이의 뇌를 자극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작업은 여타 작업에 비해 유달리 천진난만하고 해학적이다. 그러니 소장 가치가 어찌 높지 않겠는가.”11월 11일 ‘echowords’개인전그의 새로운 시도는 화단에 처음 나왔을 때부터 주목받았다. 한성대 회화과를 졸업한 유승호는 같은 해 조성희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아트선재센터의 기획전 ‘산수풍경’, 엘렌 킴 머피 화랑의 ‘한국현대미술-90년대의 정황전’ 등에 참가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순조롭게 화단에 데뷔한 것이다. 2000년에는 서남미술전시관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가졌고, 2001년에는 쌈지스페이스의 제3기 스튜디오 프로그램에 선발돼 1년 간 작업했으며, 2002년에는 광주비엔날레 등의 크고 작은 전시에서 작품을 선보였다.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그의 ‘화가의 길’은 순탄했다. 2003년 석남미술상을 작가 홍영인과 공동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경성 오광수 등으로 짜여진 심사위원회는 그의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유승호는 11월11일부터 12월10일까지 ‘echowords’라는 주제로 원 앤드 제이 갤러리(ONE & J. GALLERY)에서 개인전을 연다. 그는 “젊은 화가에게 장르가 문제될 게 없다”며 “새로운 매체를 통해 남들이 그려내지 못했던 신천지를 그려내고 싶다”고 말했다. 기자에겐 이 말이 소설 ‘다빈치 코드’에 나오는 암호풀이 게임을 계속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의 기지가 어떤 멋진 암호를 만들어 낼지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