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의 부상들이 다음과 같이 진정을 올리는 사유는‘온 세상에서 지극히 미약하고 비루하여 살아도 이익이 없고 죽어도 손해가 없는 사람들’이 상중하의 부상(負商)이기 때문입니다.…”1883년 계미년 4월에 통상아문에 올린 행상인의 진성서 첫 구절은 참으로 처절하기까지 하다.‘부보상’은 얼마 전까지도‘보부상’이라고 불렸다. 경기대 이훈섭 교수가‘보부상’이 일제시대에 폄훼된 명칭임을 밝혀내 등짐을 지는 행상인 부상(負商)과 봇짐을 싸서 파는 보상(褓商)을 합쳐 전래의 이름인‘부보상’으로 바로잡았다.옛날부터 나라의 산업을 직업 중심으로 크게 나누는 방법으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으로 분류했던 게 어느새 신분을 나타내는 계급으로 변질됐고, 여기서 상인은 가장 천시받는 말석으로 밀렸다. 상인을 다시 나눠 보면 한 장소에서 머무르며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인‘좌고(坐賈)’,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행상(行商)을 하는 사람인‘상인(商人)’이 있다. 상인의 어원은‘몰락한 상(商)나라 사람’이 말(馬) 장사를 하면서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며 거래하던 것에서 유래했는데 어느덧 좌고까지 포함한 장사꾼의 대명사가 됐다. 조재곤의 연구서에서 따르면 부보상의 뿌리는 대체로 네 가지의 경로를 거친다. 농민 중 이탈한 사람, 몰락한 양반, 수공업 종사자, 천민 출신 등이다. 농경사회에서는 땅이 생산의 중심 요소이므로 농자를‘천하의 대본’으로 존중한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농경사회에서는 지혜 있는 사람인 지식인(선비)과 경험이 풍부한 노인이 자연스럽게 존경의 대상이 됐다. 한 장소에서 오래토록 살아 왔기 때문에 역사와 가문과 전통, 그리고 풍수사상 등을 잘 알고 있어 숭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목사회에서 가축에게 먹이를 먹이기 위해 새로운 땅으로 옮겨가면서 이민족과 부딪쳐 이를 무찌르고 영토를 차지하는‘힘 센 사람’이 존경받는 서구 사회와는 대조적이다. 흔히 상인을‘장돌뱅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인이 이 장(場) 저 장을 돌아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에 대체로 가문의 내력을 잘 알 수 없고, 신용이 없는 사람이 더러 있어서 천한 계층으로 몰락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농경사회에서 멸시받아 온 상인들은 스스로 직업의 신성성을 지키고 천시의 대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들은 스스로 엄격한 규율을 정해 관으로부터 인정받고 이를 어기는 동료에게 가차없이 볼기를 침으로써 상거래 질서를 유지하면서 민중들에게 신용을 얻어 자존을 지켜 왔다.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매헌 윤봉길 의사를 모신 기념관 옆에 부보상 유품 전시관이 있다. 이곳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할 때 충성을 바쳐 훗날 태조로부터‘유아부보상지인장(唯我負褓商之印章)’이라 새겨진 옥도장을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 황해도 토산 출신의 부보상 지도자 백달원(白達元)의 이름을 가장 오른쪽에 적고 그 아래로 1851년의 접장 김상렬을 시작으로 2000년 이경용에 이르는 부보상의 접장과 반수 112인의 이름을 적은 두루마리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와 함께 깃발, 패랭이, 인장, 물미장(물미작대기)과‘예산임방입의절목’,‘보상선생안’등의 문서 자료도 전시하고 있다.‘예산임방입의절목’에 나타난 벌목(벌칙) 14가지가 눈길을 끈다. 이러한 벌칙들은 환난을 서로 구하고 위계질서와 상도의를 세워 사람들에게 널리 인정받고 신용을 높여가기 위한 부보상들의 피나는 자정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남강 이승훈은 몰락한 양반 집안 출신이다. 어린 시절 부보상으로 흘러 들어가 맨주먹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위대한 일생을 일궜다. 남강의 어린 시절 꿈은‘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집 앞에 솟대나무를 세우고 양반이 되는 것’이라고 전기에서 밝히고 있다. 1864년 평북 정주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살 길을 찾아 청정이란 곳으로 이사했고, 14세의 어린 나이로 임권일이 경영하는 유기(鍮器) 공장에 사환으로 들어가 잔심부름을 하면서 장사하는 걸 배웠다. 왕조 말기의 문란한 풍조로‘돈으로 벼슬을 사서 양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희망을 건 이승훈은 16세부터 행상으로 나섰으며 정주(1, 6장), 고읍(2, 7), 청정(3, 8), 설전(4, 9), 갈산(5, 10)장 등을 돌면서 유기를 팔아 돈을 모았고(그는 뒤에 참봉 벼슬을 사서 실제로 양반이 되었다), 나중에는 평안도 일대까지 영역을 넓혀갔으며 24세 때인 1887년에는 청정에 상점을 열었고 곧 유기공장까지 설립했다. 남강은 유기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인간적으로 대했다. 작업복을 입혔고 임금을 올려 주는 한편 신분이나 계급적 차별을 일절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생산성이 높아 날로 번성하게 됐다.1894년 청일전쟁으로 공장이 폐허가 되자 이승훈은 무역상으로 변신해 경인선 개통과 함께 석유, 양약 등의 도매업에도 손댔다. 그는 비범한 상재를 발휘, 큰돈을 모았으나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우피장사 등 몇 번의 사업 실패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유기공장을 계속했다.1907년 가을.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들은 남강 이승훈은 크게 깨달았다. 남강보다 14세 아래였던 젊은 도산은 시대의 선각자로서 시국의 판단과 한민족의 나아갈 길을 명확히 가르쳐 주며 웅변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특히 남강에게는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 보여준 스승이었다. 연설이 끝나자 남강은 바로 도산을 찾아 그의 손을 마주 잡고 감명받은 사실을 고백했다고 한다. 남강은 그날로 상투를 잘랐다. 도산을 만난 후 남강은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다.고향에 돌아온 남강은 곧바로 서당을 수리해 김덕용을 모셔와 신식교육을 시작했다. 남강은 다시 정주읍의 향교를 움직여 그해 12월에 우리나라의 계몽기에 활약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중학교인 오산학교를 설립한다. 오산학교를 설립하면서 그는 민족적 사업인 도자기회사를 새로 시작했으며, 도산의 권유로 태극서관(출판사)을 경영하는 한편 도산이 조직한 신민회에 가담,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만주군관학교사건, 105인사건, 3· 1운동 등으로 투옥되면서 사업은 부진했지만 오산학교 운영에 심혈을 기울인 덕분에 존경받는 민족의 지도자가 됐다. 남강은 1930년 63세로 사망한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오산학교의 해부 실험용으로 제공키로 됐으나 일제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남강 이승훈의 전기는 김도태 김기석 함석헌 등에 의해 출간됐고, 경제사학자 조기준의‘한국기업가사’에도 자세히 기술돼 있다.그는 탁월한 근대 기업가로서 실천력이 뛰어났으며,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진정한 교육자였고 위대한 부보상의 상징이었다. 도산을 만나 가치관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오늘에 와서 이승훈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