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ㆍ정주영

년 초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60~70달러였다. 반만년 동안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야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었던 슬픈 나라였다. 그나마 밥 세끼를 먹을 수 있는 국민은 도시 지역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농민은 두 끼 밥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그러한 시대에 이병철 정주영 회장과 박정희 대통령이 한 일은 한국의 공업화였다. 오늘날 울산공업단지가 대표적 산물이다.그중 이병철 회장은 미국 투자 유치단 단장을 맡아 미국의 기업인을 울산에 초청해 투자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울산석유화학단지다. 오늘날 울산은 1인당 소득 2만6000달러로 한국 전체에서 가장 앞서가는 도시가 됐을 뿐 아니라 한국 수출의 견인차다.그러나 이 회장의 진정한 면모는 반도체 사업에서 찾아진다. 제당 모직 비료 산업 등을 통해 돈을 번 이 회장은 1983년 삼성그룹의 사활을 걸고 반도체 사업에 ‘올인’했다. 1983년 2월3일 새벽 6시30분, 일본 도쿄의 오쿠라 호텔 505호실에서 이 회장은 전화기를 들었다. 그의 손에는 반도체 사업에 관한 보고서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 보고서를 밤을 새우고 읽고 또 읽었다. 당시 그 자신 또한 반도체에 관한한 국내에서 추종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문가가 돼 있었다.이 회장은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에게 전화로 이제부터 삼성이 반도체에 올인할 것이니 그 내용을 신문기사에 공표해 달라고 말했다. 사업에 관해서는 달인의 경지에 오른 이 회장이었으나 반도체 사업에 관해서는 고심했다. 반도체 1개 라인 설비에 1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라인도 한 개가 아니고 2개였다. 즉 2조원의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삼성그룹 전체가 가지고 있었던 전 재산이 2조원 밖에 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말하자면 삼성그룹 전체의 운명을 걸고 풀 베팅한 것이다. 반도체 사업이 실패하면 삼성그룹 전체가 날아가는 것이고, 잘 되면 삼성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탄생하는 기로였다. 이 회장은 산업사회가 반도체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예감하고 있었으므로 선점하기 위해서 사상 최대의 도박을 한 것이다.그후 20년. 오늘날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 관한 한 세계 1위의 국가가 됐다. 세계 1위의 메모리 반도체 생산 회사는 삼성전자이고, 3위가 하이닉스다. 2005년 삼성전자가 아시아 기업 중에서 유이하게 일본의 도요타자동차와 더불어 100억달러 흑자를 낸 것은 바로 반도체 덕분이다. 그 외에도 이 회장은 국내 최초로 종합상사를 설립해 78년 한국의 1000억달러 수출 시대를 여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그가 살아생전에 세운 23개의 크고 작은 기업들은 모두 성공했다. 이 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재고 또 재보는’ 예측 경영이다. 전 세계의 모든 정보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수집해 철저하게 앞으로의 상황을 시뮬레이션 해보기 때문에 실행 후에는 최상의 결과가 나왔다. 정보수집-분석-판단-실행의 과정에서 이 회장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메모광이었던 그는 확인에 확인을 거듭해서 거의 모든 사업을 다 성공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삼성의 경영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 회장과 필적한 만한 근대화의 기수는 현대그룹 창업자인 정주영 회장이다. 정 회장은 월남전에서 돈을 벌었다. 박격포탄이 밤 하늘을 가르는 메콩강에서의 준설 작업을 비롯해 학교 도로 항만 공사를 하면서 현대건설을 키웠다. 월남전 이전까지 정 회장은 무수한 실패를 겪었다.고량교 공사에서 막대한 빚을 져 그 빚을 갚는데 20년이 걸렸고, 국내 최초로 해외 건설 공사인 태국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에 도전했다가도 빚을 졌다. 하지만 월남전 이후 그는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대형 해외 공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첫 번째 성공은 사상 최대의 공사라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항 공사였다. 그 공사에서 그는 9억3000달러를 벌어들였다. 그후 한국 건설 회사들이 앞 다투어 중동에 진출해 77년에 34억달러, 78년 80억달러, 79년 60억달러, 80년 78억달러, 81년 126억달러, 82년 113억달러, 83년 90억달러, 84년에 59억달러를 벌어들였다. 정 회장의 또 다른 공로는 조선 산업의 진출이다. 그는 주머니 속에 허허벌판 울산의 바닷가 백사장 사진 한 장을 넣고 여기에 조선소를 지을 테니 돈을 꿔달라고 영국의 버클레이 은행장을 협박(?)했고, 어렵사리 세계적 선박왕인 그리스의 리바노스에게 배 2척을 주문받아 결국은 차관을 빌려왔다. 그는 조선소를 지으면서 한쪽에서는 26만 톤급 유조선 2척을 동시에 만드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 결과 오늘날 현대중공업은 세계 1위의 조선 회사가 됐고 2,3위도 모두 한국의 대우조선, 삼성중공업이 차지하고 있다. 또 정 회장은 현대자동차도 탄생시켰다. 자동차 바퀴 하나 만들지 못하는 나라에서 그가 만든 포니는 한국인이 최초로 만든 국산 승용차였다. 그는 이 국산차를 처음으로 해외에 수출했다. 76년 에콰도르에 6대를 수출하면서 시작된 국산 승용차의 수출은 2005년 누계 1000만 대 수출의 시대를 열었고, 오늘날 현대자동차는 세계 6위의 자동차 회사가 됐다. 살아생전에 정 회장은 소양강 댐, 서산간척지, 서울올림픽 유치, 현대아산병원(서울아산병원) 개원, 소떼 방북 등 열손가락으로는 도저히 셀 수 없는 수많은 일을 했다. 단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우리가 매일 건너다니는 한강다리 28개 중의 절반은 그와 현대건설이 만든 것이다. 다시 이 회장으로 돌아가 보자. 이 회장은 계산의 달인이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세 자리 곱하기를 암산으로 할 정도의 비상한 산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계산만 잘한 것이 아니라 사업의 구상과 계산도 치밀했다. 용인자연농원의 돼지는 새끼를 8마리밖에 낳지 못하는데 일본의 돼지는 아홉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며 그 차이를 밝히지 못하면 양돈 산업, 더 나아가서는 기업이 무너진다며 사장들에게 연구하도록 독려했다.하지만 정 회장은 정반대다. 그는 세밀한 숫자 하나하나보다는 큰 밑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세부적인 부분을 덧붙이는 스타일이었다. 정 회장은 주베일 항만 공사를 하면서 모든 원자재를 한국에서 가져다 쓰라고 지시했다. 수천만대분의 자재를 운반해야 하는 엄청난 양에 사장들이 기겁하자 ‘모든 것은 나에게 맡겨라. 자신이 없으면 집에서 누워 기다려라’라고 일갈했다. 너무나 용감한 회장이 있었기에 사장들도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이병철과 정주영. 오늘날 한국이 국민소득 62달러의 국가에서 1만6500달러 국가까지 오면서 이만큼 살게 된 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두 사람의 공이 가장 크다. 국민소득 1만달러를 돌파하는데 일본이 100년, 미국이 180년, 영국이 200년 걸린데 비해 한국은 단 36년 만에 그것을 해냈다. 이것은 지구에 존재하는 국가 중 최단 시간 기록이다. 거기에 가장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을 말하라면 필자는 단연 우리 근대경제사의 두 거목인 이병철 정주영을 지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