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처럼 자본주의 사상이 뿌리 깊이 박힌 나라도 드물다. 자본주의 정신을 세 가지 단어로 나타낸다면‘사유·영리·자유’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어느 하나의 요소가 제한되면 자본주의가 억제된다. 서양에서는 오랜 투쟁 끝에 조금씩 자본주의를 키워왔지만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요소들을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정치적 상황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부분적으로 제한돼 왔을 뿐이다. 사마천(司馬遷,BC145~BC86)의‘사기(史記)’화식열전(貨殖列傳)에 보면 이러한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무릇 천하에는 물자가 아주 적은 곳도 있고 풍부한 곳도 있게 마련이다. 또한 물자가 풍부한 때도 있고 부족한 때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물자가 풍부한 지역이나 때의 물자를 부족한 곳이나 때로 옮겨 주어 골고루 취하게 하는 것이 상업이니 그래서 없어서는 아니 될 사민(사·농·상·공)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사람들은 각기 저마다의 능력에 따라 그 힘을 다하여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물건 값이 싼 것은 장차 비싸질 징조이며, 비싼 것은 싸질 징조라 하여 적당히 팔고 사며, 각자가 그 생업에 힘쓰고 일을 즐기는 상태는,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과 같아 밤낮을 쉬지 않는다. 물건은 부르지 않아도 절로 모여들고, 강제로 구하지 않아도 백성이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말은 오늘날 수요와 공급의 시장원리를 설명한 말과 꼭 같다고 할 수 있다.화식열전에는 태공망(太公望)이 부녀자의 일(재봉·자수)을 장려하고, 공예의 기술을 다하게 하며, 또 각지에 물고기와 소금을 유통케 하여 사람들과 물건이 모여들게 했음을 먼저 적고 있다. 다음으로는 제(齊)나라의 관중(管仲)은 국정을 맡으면서 물가를 조절하는 경중(輕重)과 재화 및 화폐를 맡아보는 아홉 개의 관서인 구부(九府)를 설치해 천하를 바로잡았다. 관중은“창고가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예와 치욕을 안다”고 말했으며, 나라를 부강하게 했음은 물론 스스로도“지위는 신하였으나 열국의 군주보다 부유했다”고 하여 경제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옛날 월왕 구천은 회계산 위에서 고통을 겪고 범려와 계연(범려의 스승이라고 함)을 중용했다. 계연은 이렇게 말했다.“6년마다 풍년이 들고, 6년마다 한해가 발생하며, 12년마다 대기근이 일어난다. 무릇 쌀값이 한 말에 20전밖에 안 되면 농민이 고통을 겪고, 90전으로 비싼 값이 되면 상인이 고통을 받는다. 상인이 고통을 받으면 상품이 나오지 않고, 농민이 고통을 받으면 농경지가 황폐해진다. 비싸더라도 80전을 넘지 않고, 싸더라도 30전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하면 농민과 상인이 모두 이롭게 된다.(중략)”이것은 자연환경과 계절적 변화를 예측해 경기순환의 리듬을 발견하고 쌀값의 상한가과 하한가를 책정, 국민 모두가 골고루 소득을 얻도록 한 탁월한 경제정책이라 할 수 있다. 쌀값이 안정된 가격을 유지하고 물자가 공평하게 유통돼야 나라가 풍요로워지는 것은 오늘날에도 통하는 진리다. 이러한 계연의 뜻을 배운 범려는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를 평정하고 난 후 홀연히 벼슬을 버리고 제(齊)나라로 가서 이름을 바꾸고 농사를 지었고, 다시 도(陶)나라로 가서 19년 동안 세 번이나 천금을 모았는데 그중 두 번까지는 가난한 친구와 먼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그래도 말년에 자손에게 물려준 재산은 거만(鉅萬)에 달했다. 사람들은 부자 하면 바로 범려를 떠올리고 그를‘도주공’이라 부르며 존경했다. 백규는 주나라 사람이다. 사마천의 기록에 의하면 “위나라 사람 문후 때에 이극이란 사람은 농경을 중시하여 토지를 충분히 이용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으나, 백규는 때의 변화에 따른 물가의 변동을 관찰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때에는 사들이고, 세상 사람들이 사들일 때에는 팔아넘겼다. 풍작일 때는 곡물을 사들이고, 대신 실과 옷을 팔아 넘겼으며, 흉작이 되어 고치가 나돌면 비단과 솜을 사들이고 대신 곡물을 팔아 넘겼던 것이다.”투자에는 크게 가치 투자와 기술적 투자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백규는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면 기술적 투자의 대가라 할 만하다. 워런 버핏이 가치 투자의 대가로서‘오마하의 현인’이라고 한다면, 백규는‘주나라의 현인’이라 할 수 있다.“풍년과 흉년의 변화를 보며 사고팔고 했으므로, 대체로 해마다 재산이 배로 늘어났다. 돈을 늘리려고 생각하면 싼 곡물을 사들이고, 수확을 늘리려고 생각하면 좋은 종자를 썼다. 거친 음식을 달게 먹고, 욕심을 억제하며, 의복을 검소하게 절약하고, 일을 시키는 노복과 고락을 함께 하며, 시기를 보아 행동하는 데는 맹수나 맹금이 먹이를 보고 달려드는 것처럼 빨랐다.”백규는 수급 및 경기의 변화를 정확히 예측하고 민첩하게 거래해 시세 차익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검소하면서 사욕을 채우지 않고 이웃이나 노복과 함께 나누었기 때문에 존경받았다. 백규는 그의 지혜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내가 생업을 운영하는 것은 마치 큰 정치가인 이윤(伊尹:은나라 탕왕의 재상)과 여상(呂尙:태공망)이 정책을 도모하여 펴듯, 병법가인 손자(孫子)가 군사를 쓰듯, 법술가인 상군(商君)이 법을 행하듯이 했다. 그러므로 임기응변으로 처리하는 지혜도 없고, 일을 결단하는 용기도 없고, 얻었다가 도로 주는 어짊도 없고, 지킬 것을 끝까지 지키는 강단도 없는 사람은 내 방법을 배우고 싶어 하더라도 가르쳐 주지 않겠다.”‘사업가의 표상’으로 존중받는 백규의 경제 철학은 한마디로 지(智)·용(勇)·인(仁)·인(忍)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사마천이 열거하는 부자들의 공통적 철학은‘나눔 정신’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1년을 살려거든 곡식을 심어라. 10년을 살려거든 나무를 심어라. 백년을 살려거든 덕을 베풀어라(자손에게 그 보상이 돌아가니까).” 봉(封)이란 영지로부터 조세를 거두는 것이다. 부자는 관으로부터의 봉록도 없고, 작위나 영지에 따른 수입도 없으면서 이자나 소작료를 조세처럼 거둔다고 하여 소봉(素封)이라 불렀다.오지(烏氏)란 나라의 나()라는 사람은 목축으로 가축이 늘어 이를 팔아 진기한 견직물을 융(戎)의 왕에게 바치고 열 배의 가축으로 보상받아 골짜기마다 가축으로 가득 차 골짜기 수로 마소를 셀 정도가 되었으며, 진의 시황제는 그를 “제후와 동등하게 대우하여 참조했다”고 하며, 파(巴)나라의 청(淸)이란 과부는 단사(丹沙)가 나오는 굴을 발견해 큰 부자가 되었는데 진 시황제는 그녀를“정녀(貞女)로 대우해 여회청대를 지었다”고 하니 모두 ‘부의 힘’에 의한 것이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을 맺는다. “부를 얻는 데는 일정한 직업이 없고, 재물에는 일정한 주인이 없다. 재능이 있는 자에게는 재물이 모이고, 못난 자에게는 재물이 흩어진다. 천금을 모은 집은 한 도시를 영유한 군주에 필적하고, 거만의 부를 가진 자는 왕자와 즐거움을 같이한다. 그들이야말로 소위 소봉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2000년 전 중국인의 부자 사상과 이를 기록한 사마천에 탄복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