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 미용실 프랜차이즈 ‘이철헤어커커’원장의 성공노하우

부에 통 관심이 없었던 고교생 이철(본명 이승철). 적성과 소질을 감안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획일적 교육이 이뤄지고 있던 70년대 후반 그는 부모 속을 무던히도 썩이던 반항아였다. 하지만 그는 패션에 대해서만은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최신 유행이었던 판탈롱 청바지를 사기 위해 새벽부터 남대문 시장을 기웃거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이철은 86개의 프랜차이즈를 거느린 ‘이철헤어커커’의 원장으로 성공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국내 헤어살롱의 선두주자로 불리는 그의 회사가 미용실 프랜차이즈와 미용 교육 등을 통해 연간 벌어들이는 돈은 73억 원에 달한다(2005년 매출). 강남 1번지 압구정동에 둥지를 틀고 청담동과 미사리 등에 헤어 아카데미를 두고 있는 등 외연도 튼실하다. ‘동네 이발소’의 이미지를 벗고 ‘토털 미용 전문회사’로 거듭난 결과다.“너 공부하기 싫으면 미용사 할래?”새어머니는 공부는 뒷전이고 유달리 패션에만 관심이 많은 아들의 의중을 떠봤다. 사실 새어머니는 미용사였다. 당초 이철 원장은 패션모델이나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미용사로서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결국 이 선택은 그의 인생을 확 바꿔 놓았다.그래서 그는 스물두 살 때 미용사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처음 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국내 남성 헤어 디자이너 1세대로 불리는 유지승 씨의 가게에서였다. 손재주가 있었는지 유지승 선생은 입사 3개월 만에 그의 손에 가위를 쥐어주었다. 남자 미용사가 귀하던 시절 남들보다 화려하게 치장하고 다니는 이철은 처음부터 주목받았다. ‘감각 있는 젊은 남자 미용사’라는 호평을 들었다.미용사로서의 기초를 닦으며 1년 여를 보내던 그는 23세에 명동의 ‘희’미용실을 인수하며 처음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겁 없이 덤빈 일은 경험과 능력이 부족한 탓에 1년도 되지 않아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창업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게 화근이었다. 솜씨도 무르익지 않았고 고객 관리 방법도 서투른 이 원장에게 머리를 맡기러 오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는 보증금도 받지 못하고 철수해야 했다.그는 실패를 계기로 인생의 전환을 시도했다. 오랜 꿈이었던 패션모델이 되기로 결심한 것. 그는 모델을 키우는 학원에 다니면서 때가 오길 기다렸다. 사진에 더 잘 나오는 방법을 찾다가 직접 사진을 공부하면서 감각을 익히기도 했다. 2~3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가끔씩 꽤 규모가 큰 행사에서도 모델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꿈같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당신은 모델 되기엔 키가 너무 작은 거 아냐?”라며 누군가 던진 이야기는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보통 사람들보다는 큰 173cm의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였지만 모델로 대성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당시 최고 모델로 성장하려면 적어도 키가 180cm는 넘어야 했다. 또 모델로서의 끼도 부족했다고 이 원장은 회상한다. “나름대로 포즈를 잡아보는데 영 어색하더라고요.”결국 그는 패션모델이 되겠다는 꿈을 접고 다시 가위를 잡았다. 세 살 연상인 부인 심해식 씨와 결혼하면서 가정도 꾸려가야 했기에 희망도 보이지 않는 패션모델 일에 계속 인생을 허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경옥 미용타운’과 ‘세리미용실’에서 헤어 디자이너로 복귀했다가 87년 명동에 ‘하이클래스’라는 미용실을 직접 열었다. 그러다 1년 만에 과감히 명동 미용실을 접고 압구정동에 ‘이철헤어커커’라는 이름의 헤어살롱을 개설했다. 강남이 한창 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이번에는 결코 실패하지 않겠다며 독한 마음을 먹었다. 고객이 하나 둘씩 늘어가면서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꼬박 12시간을 일해야 하는 날도 많아졌다. 식사할 짬도 나지 않아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배달시켜 놓고 오후 4시가 넘어서야 퉁퉁 불은 걸 먹는 일도 허다했다. 머리 깎는 속도에도 점점 가속이 붙었다. 어찌나 손이 빠른지 남자 머리는 5분 만에 말끔하게 다듬어줄 정도가 됐다.미용실의 고급화 전략도 장사에 단단히 한몫 했다. 그는 처음부터 최고급을 추구했다. 미용실 바닥은 대리석을 깔았고 칸막이도 달아 고급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췄다. 인테리어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고 직원들에게도 철저한 서비스 마인드를 고취시켰다. 당시 명동의 유명한 미용실들이 머리를 다듬는 기능적 공간으로 꾸며놓았던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났다. 대신 그는 가격을 높였다. 그래서 ‘파마 한 번에 10만 원’이란 제목으로 당시 유명했던 ‘썬데이서울’이란 잡지에 그의 미용실이 실리기도 했다. 이런 고급화 전략은 최고급 서비스를 원하는 수요자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처음에 하루 15~20명 남짓했던 고객들은 곧 50~60명으로 불어났다. 혼자 하기가 힘들어 후배 미용사들에게 배분하기도 했다. 또 고급 살롱 이미지 덕분에 연예인과 문화예술인들이 이철헤어커커를 찾기 시작했다. 유명인들의 발걸음이 잦아지자 더욱 상승 효과를 타 그의 가게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고급 미용실로 위상이 높아졌다.“요즘은 고급화라는 것이 특별한 차별화 전략이 될 수 없지만 80년대 후반에는 그런 것에 투자를 하지 않았던 시기여서 고급화 컨셉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주도록 인테리어를 하고, 최고의 서비스를 해주면서, 고객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을 연출해 줬더니 소문을 타고 고객 수가 크게 늘어났습니다.”‘고급 헤어살롱’이란 이미지를 굳힌 그는 1996년 개인사업자로 운영하던 미용실을 법인 전환한다. ㈜헤어커커다. 이 회사는 본격적인 사업 확장에 돌입한다. 90년대는 국내 미용 프랜차이즈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시기다. 자끄데상쥬 모즈헤어 등 해외 브랜드들이 국내에 진출하면서 미용 프랜차이즈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국내 브랜드도 가세했다. 이가자 미용실, 박준 미장, 박승철 헤어스튜디오 등이 프랜차이즈에 뛰어들면서 과거의 좁고 폐쇄된 이발소, 미장원이 깔끔하고 전문화한 공간으로 탈바꿈해 갔다.이철헤어커커도 이 같은 트렌드를 선도하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특히 2000년 들어 급속히 불어나기 시작한 이철헤어커커의 전국 체인점은 2006년 현재 63개에 달한다. 2005년에는 중·저가의 실용적 브랜드인 ‘프레시헤어’도 내놓았다. 프레시헤어는 현재 전국에 23개가 개설돼 있다.프랜차이즈 사업의 핵심은 전국의 지점이 동일한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체인점주와 미용인들에게 반드시 체계적인 고객 서비스 교육, 기술 교육을 시켜야 한다. 특히 매년 발표되는 헤어스타일 트렌드를 전달하고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다.이 원장은 미용인 개개인의 특징과 필요에 맞는 맞춤식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미용 아카데미 강사들이 각 지점을 직접 방문해 지역별, 점포별 특성 및 미용인 개인의 스타일을 파악해 가장 적합한 교육을 실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 수준별, 코스별 교육을 진행함으로써 원활한 기술 습득이 이뤄지도록 했다. 여기에 차원 높은 서비스를 위해 인성 교육, 직업심리 교육, 서비스 교육, 다양한 교양 교육 등도 정기적으로 진행한다.이철 원장도 내년이면 50세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여전히 남다른 개성이 철철 넘친다. 검은색과 해골 무늬가 유행하는 올해는 검은 모자와 검은 재킷,검은 바지에 해골 모양 브로치와 목걸이, 팔찌로 멋을 내고 다닌다.이처럼 영원히 늙지 않는 피터팬 같은 열정으로 국내 최대의 미용 전문회사를 키워낸 이철 원장에게도 아픔은 있다. 미용인을 소위 ‘깍새’라고 부르는 사회적 편견과 패션계의 주변부로 보는 시선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무려 40세가 넘어서였다.“패션모델, 패션 디자이너의 꿈이 좌절된 이후로도 오랫동안 직업을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특히 헤어 디자이너로서 미스코리아 심사위원이 되겠다고 했더니 허락하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세종대 겸임교수가 되니까 금세 심사위원이 돼달라고 제안이 들어오는 거예요. 게다가 행사장에서 소개할 때 ‘헤어 디자이너 이철’이 아니라 ‘세종대 겸임교수 이철’이라고 말하더군요. 정말 화가 많이 났었죠.”그는 직원이 1000여 명이 넘어서자 직업인으로서 정체성을 재확립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후배들에게 미용인으로서의 미래와 자부심을 심어줘야 하니까 저부터 그런 편견을 깨는 데 앞장서야겠다고 생각했어요.”그래서인지 그는 유달리 인성과 직업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이철헤어아카데미는 압구정 스튜디오, 청담 스튜디오, 미사리 스튜디오 등 3곳의 교육 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2005년 미사리에 오픈한 미사리 스튜디오의 경우 700평 규모로 국내 미용 교육 시설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미사리 스튜디오는 시청각 강의실 3곳과 기술 강의실 2곳, 간단한 파티와 휴식의 공간인 메인 룸을 비롯해 장기 교육에 대비한 숙박시설까지 갖추고 있다.그의 목표는 이제 미용인을 육성하는 교육자로 거듭나는 것이다.“60세가 넘으면 미용 교육 전문가로 일하고 싶습니다. 헤어스타일이 패션의 부속일 뿐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헤어스타일의 위상은 이전보다 훨씬 높아졌고 앞으로 발전 가능성도 무궁무진합니다. 더욱 뛰어난 후배들이 나와 주기를 기대하며 교육 사업에 매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