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자동차 업계는 지금 디자인혁명중

건희 삼성 회장의 말 한마디가 또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는 평소 언론에 노출되는 일이 드물지만 어쩌다 한번씩 주요 행사 때 던지는 한마디는 경영계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왔다. 그런 이 회장이 얼마 전 미국의 코리아소사이어티로부터 상을 받는 자리에서 던진 새로운 화두는 ‘창조적 경영만이 세계 일류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한 창조적 경영이란 무엇인가. 학계에서는 이를 지난 2004년 천명한 ‘디자인 경영’의 연장선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독창적인 디자인을 바탕으로 창조적 경영을 실현하는 것이 21세기 세계 일류 기업들에 놓여진 과제라는 뜻이다.디자인에서의 성공으로 일류 기업의 반열에 올라선 예는 주변에 많다. 디자인 파워를 바탕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 일본 기업이 대표적인 예다. 1950년대 초 마쓰시타전기의 사장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미국 시찰을 끝내고 도쿄 나리타공항에 도착해 처음 한 말이 “앞으로는 디자인이야!”라는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다. 이 외에도 샤프의 하야카와 도쿠지, 소니의 이부카 마사루, 혼다의 혼다 쇼이치로 등은 확고한 디자인 철학을 바탕으로 기업을 일군 일본의 전설적인 기업인들이다.특히 이 중에서도 혼다자동차는 창조적인 디자인이 엄청난 성과로 이어진 대표적인 사례다. 혼다 창업주인 혼다 쇼이치로는 ‘자신의 개성을 충분히 자각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공적으로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이런 철학은 이와쿠라 신야라는 자동차 디자이너를 만나면서 그 가치를 발휘했다. 이와쿠라가 입사하던 1964년은 혼다가 본격적으로 자동차 생산에 돌입한 해였다. 때문에 혼다 쇼이치로 창업주는 디자인팀을 혹독하게 훈련했다.이런 체계적인 훈련은 혼다의 대표 차종인 70년대 시빅과 어코드가 개발되면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이와쿠라의 자동차 디자인 철학은 ‘자동차를 통해 감동을 전하는 것.’이다. 사람의 손으로 다루는 기계인 만큼 미세한 부분까지 감지하는 자동차를 생산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디자인 목표였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혼다의 대표작 어코드다. 어코드는 운전자의 오감, 그중에서도 시각을 방해하지 않는 디자인을 가장 중요시했다. 시야를 넓히고 계기판도 운전자가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두도록 했으며 레버나 스위치 등은 운전자가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조작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렇게 해야 운전에 따른 피로를 최대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혼다에서는 비저빌리티 인덱스(Visibility index)라고 말한다. 이뿐만 아니라 어코드는 앞뒷면을 모두 날렵하게 설계됐고 벨트라인과 보닛의 높이가 낮아 유리가 차지하는 면적이 다른 자동차에 비해 넓다. 이러한 인간 중심의 자동차 설계는 혼다의 모든 자동차 모델로 확대되고 있다.자동차 디자인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이 바로 조르제토 주지아로다. 그는 누치오 베르토네, 세르지오 피닌파리나와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동차 디자이너 3인에 꼽히고 있다. 이탈리아 토리노 근교인 카레시오에서 태어난 조르제토 주지아로는 음악가였던 조부와 화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예술적인 감각이 탁월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이탈리아 북부를 중심으로 공업화 바람이 불자 그는 디자인이 중요시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을 예견했다. 그래서 낮에는 순수미술을 배우고 야간에는 제품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러면서 그는 산업화의 대표작인 자동차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1955년 국립예술아카데미 졸업작품전에 내놓은 자동차 그림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결정지었다. 이탈리아 자동차 회사인 피아트 디자인 책임자였던 단테 지아코사가 그를 직접 천거했던 것. 이후 그는 알파 로메오로 자리를 옮겨 1963년 알파 로메오 테스투도를 디자인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그는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이탈디자인을 설립했으며 이 회사는 세계적 자동차 디자인 회사로 성장했다.이탈디자인은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다. 현대자동차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74년형 포니를 이 회사가 디자인했고 83년 스텔라와 85년 엑셀 프레스토, 88년 쏘나타 등의 디자인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96년 11월 선보인 라노스부터 대우자동차와 인연을 맺기 시작해 97년 레간자, 98년 마티즈, 99년 매그너스 등을 모두 이곳에서 디자인했다. 그는 1980년 피아트의 판다와 우노를 설계해 산업디자인계의 최고 영예인 영국 골든콤파스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99년에는 세기의 차 선정위원회에서 20세기 최고의 카 디자이너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3대 디자이너 중 누치오 베르토네는 알파로메오 V8, 람보르기니 카운타크, 볼보 780 쿠페 등을 디자인한 거장이며 대우 레조와 현대 라비타 외에도 피아트 130 쿠페와 GM의 크로노스 등 독창적인 자동차를 선보인 세르지오 피닌파리나도 자동차 디자이너로 유명하다.이들이 1세대 자동차 디자이너라면 2세대는 크리스 뱅글, 발터 드 실바, 피터 슈라이어다. 그 중에서도 BMW 수석 디자이너인 크리스 뱅글은 단연 선두주자다. 미국 오하이오에서 태어나 위스콘신대를 졸업한 크리스 뱅글은 디자이너 경력의 대부분을 유럽에서 쌓았다. GM의 오펠, 피아트를 거쳐 BMW로 자리를 옮긴 그는 자동차 디자인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캘리포니아의 패서디나 디자인 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BMW에서 디자인을 정식으로 공부한 최초의 수석 디자이너였지만 미국 태생이라는 것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오펠 주니어, 피아트 쿠페, 알파로메오 145를 디자인한 뱅글을 영입한 BMW는 그에게 북미시장의 선전을 기대했다. 당시 BMW는 전체적으로는 성장 곡선을 그렸지만 최대 자동차 시장인 북미에서는 판매량이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BMW가 뱅글의 영입을 시작으로 새로운 혁신을 준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만 해도 BMW는 정체성을 지키는 데 급급했을 뿐 새로운 시도는 거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뱅글이 혁신적 모델인 7시리즈를 선보이자 독일은 물론 유럽 전체의 비판은 극에 달했다.“BMW의 수석 디자이너가 오하이오에서 태어났고 위스콘신에서 자랐다고?”라는 식의 반응이 회사 내 주류를 이뤘던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고향인 미국에서도 나왔다. 당시 포천은 7시리즈의 헤드라인으로 “이 차가 못생겼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고 뽑았다. 그러니 유럽에서의 비판은 말할 것도 없었다.그러나 그는 길게 내다보는 디자이너였다. 1년 뒤인 2002년 파리모터쇼에서 Z4 로드스터를 선보였다. 이 차는 기하학적 도형뿐만 아니라 불꽃의 소용돌이처럼 자연스러운 선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후 BMW는 완전히 다른 자동차로 거듭났다. 이러한 배경에는 뱅글이 인수·합병(M&A)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디자인웍스의 공로가 컸다. 그는 디자인웍스를 BMW의 ‘정보수집 초소’로 부르고 있다. 뱅글의 디자인 철학은 △진정한 조화로움 △고객과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브랜드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혁신성으로 요약된다.아우디그룹의 디자인을 총괄하고 있는 발터 드 실바는 이탈리아 피아트 디자인 센터와 R 보네토 스튜디오에서 디자인 수련을 받았다. 80~90년대 피아트와 알파 로메오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한 그는 2003년 3월부터 아우디의 디자인을 총괄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세아트의 살사, 살사 에모시옹, 알람브라, 아로사 등이 있으며 이 중 아로사는 2001년 독일의 권위 있는 자동차 전문지 아우토 스트라센페어케어로부터 ‘아우토니스’상을 수상했다. 현재 그는 아우디 외에도 람보르기니, 세아트의 자동차 디자인을 총괄하고 있다.그는 아우디에 패밀리 룩인 싱글 프레임 그릴을 채택한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지난 2003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컨셉트카 누볼라리 콰트로에 처음 선보인 싱글 프레임 그릴은 아우디를 대표하는 디자인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싱글 프레임 그릴은 기존의 ‘더블 그릴’에 다이내믹함을 더해 역동적이면서도 깊은 아우디 브랜드 내면의 힘을 표현한 것으로, 정체되지 않고 늘 시대의 흐름을 앞서 진보하는 아우디의 역동적인 디자인 철학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뿐만 아니라 ‘적을수록 좋다.’는 디자인 철학을 확립한 그는 단순함 속에서 역동성과 중후함을 동시에 갖는 데 주력했다.지난 8월 정몽구 회장이 공을 들여 영입한 피터 슈라이어 기아차 디자인 총괄 부사장도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다. 기아차가 슈라이어를 영입한 배경은 ‘21세기 자동차 전쟁은 디자인에서 승부가 결정난다.’는 생각에서다. 슈라이어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아우디 디자인 총괄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아우디 TT, 아우디 A6 등을 개발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2002년 폭스바겐 디자인 총괄책임자로 자리를 옮긴 그는 독일연방디자인대상을 4번이나 수상했고 시카고 굿디자인상을 2회나 수상한 베테랑이다. 그가 지금까지 선보인 자동차는 곡선이 많이 강조됐다. 자동차의 윗부분을 돔 형태로 설계해 공기 저항을 최소화했다. 폭스바겐 재직 시에는 5세대 골프를 선보여 골프가 회사 매출의 15%를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닛산은 자동차 디자인이 회사를 수렁에서 건진 케이스다. 카를로스 곤(현 르노-닛산자동차 그룹 CEO)이 최고경영자(CEO)로 입성하면서 시작한 닛산회생계획(NRP)의 핵심은 디자인 혁신이었다. 그 전까지 닛산자동차는 품질은 뛰어났지만 브랜드 이미지가 약해 디자인 컨셉트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었다. 카를로스 곤은 이스즈에서 맹활약했던 나카무라 시로를 영입해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했다. 나카무라는 곧장 닛산과 인피니티의 디자인을 차별화하는 데 주력했다. 닛산은 대중적 이미지를 파고들게 했고 상류층에는 고급스러운 인피니티를 강조했다. 열정 상상 혁신을 디자인 핵심 요소로 정한 나카무라는 닛산 350Z와 타이탄, 무라노 크로스오버카, 알티마, 인피니티 M시리즈와 FX45 등을 디자인했다. 나카무라는 개발부서와의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고객의 니즈를 디자인에 적극 반영했다. 그는 공식석상에서 연설할 때마다 “닛산의 디자인은 개발 멤버와 끊임없는 토론과 조정을 거치며 이를 통해 CFT(Cross Functional Team-부서 간 협력시스템)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GM계열의 사브는 기능과의 조화를 가장 강조한다. 스웨덴 자동차인 사브는 스칸디나비안의 대표적 디자인으로 군더더기를 지양하는 실용적인 자동차다. 깔끔하면서도 멋스러운 북유럽 특유의 모습이 사브 내·외부에 그대로 녹아 있다. 수석 브랜드 디자이너인 사이먼 파디안은 가장 좋은 디자인을 △비율이 잘 맞는가 △일관된 형태를 갖고 있는가 △사브 디자인 전통에 부합하는가 △스칸디나비아식 디자인 전통에 부합하는가 △여러 사람에게 공감이 가는 디자인인가로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강조한다. 최근 사브 9-5는 차 앞부분의 그릴을 길게 늘려 강조했다.현재 사브는 새로운 디자인 모델을 수립 중이다. 올초 열린 제네바 모터쇼에서 선보인 컨셉트카 에어로X는 디자인의 변화를 예고하는 모델이다. 사브 에어로X는 사브의 항공기 역학과 스칸디나비아의 실용주의적 디자인의 전통을 적용한 역동적인 스포츠 쿠페다.재규어 수석 디자이너로 활동 중인 이안 칼럼은 그의 디자인 철학(아름다운 고성능)처럼 고전미와 현대미를 적절하게 조합하는 자동차 디자이너다. 지난 9월에 출시한 재규어 New XK는 이안 칼럼이 재규어 취임 후 처음으로 주도한 스포츠카다.포드 북미지역 디자인 총 책임자인 피터 호버리는 미국적인 대담함과 강인함을 추구한다. 강인하다는 것은 공격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감을 뜻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올 북미국제모터쇼에서 선보였던 ‘F-250 수퍼 치프’는 미국 동서를 누빈 초호화열차 산타페 수퍼치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낭만이 넘치는 여행’을 디자인 컨셉트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