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함으로 세상에 도전하다

화계에서 송승환이라는 이름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경력 40년이 넘는 베테랑 연기자이며 둘째, 국내 최초의 ‘넌버벌 퍼포먼스’로 올해 10주년을 맞은 ‘난타’의 제작자이자 셋째, ‘뮤지컬 대장금’으로 국내 창작 뮤지컬 수출의 발판을 마련한 한국 공연계의 선구자라는 것이다.뮤지컬 대장금의 개막을 코앞에 두고 있을 즈음 송승환을 만나기 위해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바로 뒤쪽에 있는 PMC프로덕션은 연간 2000억 원 매출에 순이익 40억~50억 원을 꾸준히 내고 있는 기업답게 매우 분주하고 활발하게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안쪽에 있는 사장실로 갔다. 한쪽 벽면이 창으로 탁 트여 있고 저 멀리 청와대와 북한산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풍수지리에는 문외한이지만 언뜻 보기에도 좋은 기운을 한껏 실어주는 느낌이다. 집무실 한쪽엔 그동안 송 대표가 받은 각종 상장과 상패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한 가지 여느 CEO들과 다른 점을 알아챘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답게 감성이 듬뿍 묻어나는 대표 자신의 사진들이 벽면 여기저기를 장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명 배우와 능력 있는 CEO의 모습이 혼재돼 사무실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평소에도 포멀한 정장 차림보다는 캐주얼을 즐긴다는 송 대표는 어김없이 편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반소매 면 티셔츠에 편한 바지, 그리고 슬리퍼를 착용한 그에게서는 일말의 가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아역 배우로 출발해 쉰 살이 넘은 지금까지, 그는 한국 공연계의 산증인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특히 한국 공연계를 들었다 놨다 하는 그의 굵직굵직한 업적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공연계의 역사가 되고 있다.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 틀림없다.“사람들은 제가 특별하다고 하죠. 세상에 도전하는 방식과 그에 대응하는 방식 모두 새롭대요. 하지만 제가 지닌 ‘특별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단 하나입니다. 바로 한 우물만 파지 않았다는 사실이죠. 전 어려서부터 멀티였어요. 학교 다니면서 영화에 출연하고, 연극 무대에 서고, 라디오 DJ로 활동하기도 했죠. 저에겐 그게 재밌고 잘 맞았어요.”그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린이 말하기 대회서 우승한 것을 계기로 연예계 첫발을 내디딘 그는 1968년엔 동아연극상 특별상을 수상, 연기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줬다. 보성중 휘문고를 거친 그는 고교 1년 때 드라마 ‘여로’를 끝으로 연기를 끊고 학업에 전념했고, 1년간의 재수 생활을 거쳐 외국어대 아랍어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도저히 연기를 끊을 수가 없었기에 연극반 문을 두드렸다. “당시 저는 연극반에서 활동하는 것도 모자라 대학을 중퇴하고 극단 ‘76극장’에 입단해 버렸어요. 물론 부모님의 반대가 거셌지만 연극에 대한 나의 열정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었습니다.”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그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다. 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MC를 맡게 됐고, 당시 최고 인기의 하이틴 프로그램이었던 ‘젊음의 행진’을 왕영은과 공동으로 진행했다. 또 김수현 작가가 집필하는 드라마에는 매번 출연했다. 연극 ‘에쿠우스’의 2대 앨런도 그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인기도 새로움을 향한 그의 열정을 막지 못했다. 마침내 새로운 문화에 대한 갈증으로 또 한번의 ‘도전’을 감행했다. 1985년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뉴욕행 비행기에 오른 것.“모두들 제게 미쳤다고 했죠. 당시 저는 최고의 청춘 스타였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엄청난 부를 안을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지금 돈을 버는 것보다 젊을 때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끼는 게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용기를 내 감행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돌이켜 보면 뉴욕에서 머문 3년 6개월이 지금 제 모든 활동과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는 것 같습니다.”뉴욕에서 그는 신세계를 맞이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양하고 인상적인 수많은 공연들은 그를 전율케 했고, 그 감동은 문화 충격이었다. 그는 그 충격을 어떻게 해서든 풀어내고 싶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환 퍼포먼스’라는 공연 제작사를 차렸다. 당시 국내 공연계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흥행에 대한 부담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감히 들여올 엄두도 내지 못했고 외국 영화조차 잘 상영하지 않았다.“귀국 후 공연 제작을 한다고 선언하자 많은 사람들이 왜 연기자로 복귀하지 않고 험한 길로 가느냐고 물었어요. 연기자의 길을 포기한 건 아니었지만, 우선은 제작자의 길을 택한 거죠. ‘제작진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놓고 한 술 뜬 것 밖에 없다’고 말한 배우 황정민 씨의 수상 소감이 이슈가 된 적이 있죠. 저도 그 말에 동감해요. 배우란 직업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죠. 하지만 전 스스로 판을 벌여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뉴욕에서의 충격과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공연 제작사를 차리게 된 거죠.”책상 2개로 시작한 그의 사업은 변진섭 콘서트로 대박을 내면서 탄력을 받았고, 뉴욕에서 만났던 강수지를 새로운 스타로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모은 돈을 그는 다시 창작 뮤지컬에 투자했다. 무려 7억 원을 투자했지만 실패의 경험을 안겨준 ‘고래사냥’이 그 작품이었다. 고배를 마신 그는 해외 시장에 승부를 걸기로 하고 지금의 ㈜PMC를 설립해 ‘난타’를 탄생시켰다. 한국말로 공연해서는 절대로 세계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그는 비언어극(non-verbal performence) 형식을 사용했다. 1997년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첫 막을 올렸고 대성공을 거뒀다. 이후 ‘난타’ 공연은 한국 공연사를 새롭게 써 내려갔다. 하지만 문제는 세계로 나가는 것이었다.“난타 팸플릿을 들고 미국 일본 영국 등 세계 5개 국가를 돌아다녔지요. 하지만 대부분 ‘NO’였어요. 코리아란 국가 브랜드가 문화 부문에서는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외국의 유명 프로모터에게 난타 영업을 맡겼습니다.”브로드웨이 작품을 아시아에 파는 ‘브로드웨이 아시아’가 그 역할을 맡았다. 이 회사는 세계 최고의 연극 축제인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난타’를 올리는 등 ‘난타 세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올 10월이면 10주년을 맞이하는 ‘난타’는 이제 세계적인 공연으로 발돋움했고 PMC에 고정적인 수익을 안겨다 주는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물론 그에게도 힘든 시기는 있었다. 사업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그는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다.“제 생애 처음으로 1979년에 ‘루브’라는 뮤지컬을 제작한 적이 있는데 자금이 턱없이 모자라 당시 최고 인기 스타였던 김자옥 누나에게 100만 원을 빌려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요. 이후 난타 초창기 때와 에든버러에 갈 때도 자금난은 저를 압박했죠. 그때 친구가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줬어요.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더군요. 누구나 다 인생의 고비는 있게 마련이죠. 전 주변 좋은 친구와 동료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사업이 성공 궤도에 올라선 그는 요즘도 멀티 플레이어로 지내고 있다. 뮤지컬 대장금 제작 막바지 작업과 명지대 뮤지컬 공연학과 교수로 제자들도 양성해 내고 있다. 대장금 때문에 바빠 3년 동안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여성시대’에서는 하차했지만 내년쯤 다른 프로그램으로 다시 컴백할 생각이다. 뮤지컬 대장금도 올해 국내 공연을 시작으로 중국 일본 홍콩 싱가포르에 진출할 예정이다.“보통 인생에는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하죠. 제 첫 번째 기회는 초등학교 때 어린이 말하기 대회에서 우승해 연예계에 첫발을 딛게 됐던 것이고, 두 번째는 한창 잘나갈 때 돌연 미국행을 선택하고 그걸 난타로 풀어낸 것이라고 생각해요. 세 번째 기회요? 아직 남아 있어요. 앞으로 우리의 문화 상품이 제대로 대접받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문화 마케팅을 펼쳐 국가 브랜드를 알리고 새로운 차원의 외화 수익원을 창출해 낼 겁니다. 문화 CEO 송승환의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예요. 인생은 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