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가가와현(香川縣·시코쿠의 북쪽) 쇼도시마(小豆島). 시코쿠의 다카마쓰 공항에서 배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아주 작은 리조트 섬이다. ‘작은 콩의 섬’이란 이름 그대로 특산품인 작은 콩이 유명하다. 일본 사람들이 열광하는 100년 전통의 마루킨 간장과 사누키 우동도 이곳에서 탄생했다.인구 3만2000여 명의 이 작은 섬이 요즘 일본에서 ‘국제 투자가의 섬’으로 주목 받고 있다. 세계 각국의 채권에 투자하는 ‘글로벌 소버린 오픈’이란 투자신탁 상품이 유독 불티나게 팔려서다. 이 섬의 글로벌 소버린 오픈 계약 잔액은 100억 엔(약 800억 원)을 넘었다. 인구 대비로 따지면 일본 전체 평균의 3배 규모다.“여동생이 권해서 가입했습니다. 매월 2만 엔씩 배당금이 나오기 때문에 연금처럼 생활비에 쓸 수 있어 좋더군요(66세 여성 주민).” 섬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고령자가 30%를 차지하고 관광 이외엔 이렇다 할 산업이 없는 쇼도시마의 해외 투신 펀드 열풍은 고령화 사회 일본의 요즘 투자 풍속도를 잘 보여준다.일본의 개미(개인 투자자)들이 변하고 있다. 과거 일본인들은 여윳돈만 생기면 무조건 은행에 예금했다. 본래 성향 자체가 보수적이어서 리스크가 조금이라도 있는 주식이나 외환 등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일본이 항상 저축률 세계 1위를 기록했던 이유다. 그 엄청난 저축은 일본이 산업을 일으켜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그러나 최근엔 일본인들도 바뀌었다. ‘예금에서 투자’로 포트폴리오를 다시 짜고 있다. 통계가 이를 말해준다. 노무라종합연구소에 따르면 주식이나 채권 등 투자 상품을 파는 투자신탁사와 투자자문회사 신탁은행 생명보험사의 2007년 3월 말 신탁 잔액은 413조 엔(약 3300조 원)에 달했다.2003년 3월 말과 비교해 200조 엔 정도 증가한 셈이다. 지난 4년간 2배로 늘어난 것이기도 하다. 반면 은행 예금 잔액은 게걸음처럼 횡보 중이다. 2007년 3월 말 530조 엔으로 지난 4년간 겨우 6% 정도 밖에 늘지 않았다.2007년 3월 은행에서 정년퇴직한 시노미야 히로시(60) 씨는 35년간 은행에서만 근무했지만 퇴직금 6000만 엔(약 4억8000만 원)을 한 푼도 은행 예금에 넣지 않았다. 금리 연 0.5%의 정기예금에 넣어 봤자 한 달에 받는 이자가 2만5000엔(약 20만 원) 밖에 안 돼 그 돈을 갖고는 부부가 도저히 생활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는 퇴직금의 절반은 연 7% 수익이 보장되는 뉴질랜드 채권 펀드, 나머지 절반은 주식형 신탁 상품에 투자했다. 주식형 신탁은 연 10% 정도의 수익률을 내고 있다. 이렇게 투자해 월 43만 엔(약 340만 원)의 이익금으로 생활하고 있다.은행 예금을 외면하고 있는 건 단카이 세대만이 아니다. 일본의 평범한 가정주부들이 엔 캐리 트레이드(싼 엔화를 팔아 고수익 외화에 투자하는 것)를 주도하는 ‘와타나베 부인(Mrs.Watanabe·해외 투자에 나선 일본의 가정주부를 통칭)’으로 변신한 지는 이미 오래됐다.와타나베 부인을 비롯한 개인들의 엔 캐리 트레이드는 도쿄 외환시장 거래액의 20~30%를 차지할 정도까지 불었다. 2006년 말 현재 외화 예금과 외화 신탁을 합친 일본 가계의 외화 자산 잔액은 약 40조300억 엔(약 320조 원)으로 1년 전에 비해 7조5000억 엔 늘었다.이 증가액은 일본의 2006년 무역 흑자액 7조9000억 엔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기업들이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개인들이 고스란히 들고 나가 외국 자산에 투자한 셈이다. 엄청난 무역 흑자에도 불구하고 엔화 약세가 지속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외화 투자에 나선 일본인들은 투기적 거래도 서슴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게 최근 급팽창한 ‘증거금 외환 거래(FX 거래)’다. 금융회사에 일정액의 증거금을 맡기고 그 액수의 20~30배 만큼 인터넷으로 외화를 살 수 있는 환전 거래다. 예컨대 개인이 10만 엔(약 80만 원)을 증거금으로 맡기면 언제든지 온라인으로 200만~300만 엔(1600만~2400만 원)어치의 달러나 유로화를 살 수 있다. 일종의 외환 파생상품으로 환차익을 노린 전형적인 투기 거래다.도쿄에 사는 전업주부 도이 카요(42) 씨는 2007년 6월부터 증거금의 20~30배까지 외화에 투자할 수 있는 FX 거래를 시작했다. 대학 동창회에 나갔다가 FX 거래로 한 달에 30만 엔(약 240만 원) 이상씩 벌고 있다는 친구 얘기를 듣고 당장 FX 거래 계좌를 텄다. 80만 엔인 남편 월급으로 늘 빠듯하던 그는 요즘 FX 거래로 월 20만 엔 이상을 벌어 중학생 아들의 과외비를 대고 있다.일본의 야노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이 같은 FX 거래를 위한 개인들의 계좌 수는 2007년 3월 말 64만 개, 증거금 잔액은 6678억 엔에 달했다. 1년 전 33만 계좌, 3781억 엔에서 약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 FX 거래에 따른 개인들의 외환 거래액은 2006년 약 200조 엔으로 추정된다. 도쿄 외환시장 전체 거래액의 20~30% 규모다.도쿄금융선물거래소 관계자는 “지난해 엔화 약세로 FX 거래에서 돈을 번 사람이 많다”며 “입소문이 퍼지면서 대학생부터 정년퇴직한 노년층에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FX 거래 상품을 파는 전문 중개 회사와 온라인 증권사만 100여 개사에 달한다. 2007년 초부터는 일본 최대 증권사인 노무라증권 산하의 조인베스트증권도 이 거래를 취급하기 시작했다.일본 개인들의 엔 캐리 트레이드는 엔화 약세의 핵심 요인이다. 외환 거래 중개회사인 외환토도콤의 다케우치 준 상무는 “개인들의 특징은 헤지 펀드나 기관이 엔 캐리를 청산해 엔화가 오름세를 보여도 계속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인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최근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파문으로 기관투자가들이 엔 캐리 청산에 나섰는데도 엔화가 계속 약세를 보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얘기다. 도이치증권의 오니시 도모 부장은 “2007년 11월 세계 금융시장 불안으로 헤지 펀드 등이 엔 캐리 트레이드를 청산하기 시작해 엔화 가치가 한때 달러당 107엔대까지 올라갔었다(엔·달러 환율 하락)”며 “그러나 개인들의 엔 캐리 트레이드는 지속돼 결국 엔화가 다시 떨어졌다”고 말했다.그렇다면 은행 예금 밖에 모르던 일본인들이 환전 투기에까지 나선 이유는 뭘까. 그 배경엔 불어난 금융자산과 일본의 초저금리가 겹쳐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단카이 세대가 퇴직하면서 일본 가계엔 퇴직금 등 목돈이 생겼다. 퇴직한 노년층은 이 돈을 굴려 생활비를 충당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일본 은행의 1년 정기예금 금리는 연 0.5%도 안 된다. 이 금리로는 생활비가 안 나온다. 일본인들이 높은 이자에 환차익까지 볼 수 있는 외화 투자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일본 캐피털파트너스증권 석송규 이사).”실제 단카이 세대의 퇴직금은 50조 엔 이상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경기 회복으로 개인들의 소득도 늘어 2006년 일본 가계의 자금잉여(금융자산-금융부채)는 전년 대비 2.7배인 17조7984억 엔에 달했다. 일본의 개인 금융자산 규모는 1500조 엔에 달한다는 게 정설이다.그러나 이 돈을 굴리기에 일본의 금리는 너무 낮다. 2006년 7월 제로(0) 금리를 탈피했다곤 하지만 단기 정책 금리가 여전히 연 0.5%다. 미국(연 5.25%)과 비교해 4.75%포인트나 낮다. 일본 시중은행의 1년 정기예금 금리는 연 0.35~0.50%로 은행 예금 이자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단카이뿐만 아니라 일반 가정도 마찬가지다. 오랜 불황의 터널을 지나면서 일본 기업들은 임금 인상을 극도로 억제했다. 도요타자동차 같은 대기업 사원도 10년 이상 봉급이 거의 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예전엔 회사 봉급을 아껴 저축하면 최소한 연 4~5%의 이자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옛날 얘기다.일본 다이암 라이프에셋매니지먼트 고이데 고조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의 개인 투자자들이 최근 예금에서 투자로 포트폴리오를 급속히 재편하고 있지만 아직도 보유 자산 중 예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높은 편”이라며 “앞으로도 개인 자금이 예금에서 이탈해 투신 상품으로 유입되는 현상이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도쿄=차병석 한국경제신문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