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제 32호 (2008년 01월)

백자를 닮은 인품, 붓끝에 묻어나는 듯

기사입력 2008.01.16 오후 03:56


우리시대의 수묵 지킴이 남천 송수남

'꽃향기에 취해 묵향 잠시 잊었죠’, ‘사방팔방에 핀 꽃들 캔버스서 색잔치’, ‘고희 맞은 노작가 꽃으로 회춘하다’…. 인터넷에서 남천 송수남에 관한 최근 기사를 검색했을 때 뜨는 헤드라인이다. 먹그림으로 1970년대 이후 한국화 화단을 이끌어 온 그가 왜 오색찬란한 아크릴화를 그리는 것일까.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가 3학년에 동양화로 전과했으니 완전히 새로운 도전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를 만난 후 과거에서 현재가 아닌, 현재에서 과거로 물어보자는 생각으로 꽃그림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그러자 질문보다 짧은 답변 한마디가 돌아왔다. “좋잖아요.”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오랜 시간 장편 대하소설에 천착했던 작가가 탈고 후 수필 쓰는 것을 보고 왜 수필을 쓰느냐고 묻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남천 송수남 화백은 ‘수묵 지킴이’라고 할 수 있다.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성을 지키는 수문장 같은 지킴이가 아니라 우리 것이 사라져 없어지지 않고 그 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물꼬를 터주는 인물이다. 특히 1970년대 후반 그가 주축이 된 ‘수묵화 운동’은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동양화는 그야말로 나아가야 할 길을 잃고 헤매는 상황이었다. 서양화에 맞서 한국화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만족할만한 대안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의 관심도 옮겨 가는데, 이전의 한국화적 특성과 구도를 답습하는 것이 전부였던 것. 수묵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에 도전하기보다는 관념주의적인 방법에 안주해 있는 것에 반발심이 생겼다. 전통은 좋은 것이지만 전통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푸른 하늘을 파랑으로 칠하는 서양 방식과 달리 동양에서는 대나무든 난초든 청정한 산수든 모든 것을 먹의 단색으로 처리합니다. 대상이 지닌 색채에 구애받지 않았던 것이죠. 재료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그 재료는 현실 대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수묵은 시작부터 추상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수묵 표현에 정진하는 것이야말로 한국화가 지닌 최고의 덕목이죠.”

그는 전통 산수화 기법과 다른 새로운 표현법을 고심하고, 동양화의 재료와 기법으로 추상 표현을 시도하는 등 다양한 변화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청색, 적색 등 강렬한 원색을 짙게 번지게 한 발색산수가 대표적인 예. 그러나 다시 고유의 ‘수묵’에 초점을 맞추게 됐다. 1975년 스웨덴 왕립동양박물관 초대 개인전을 갖고 세계 각국의 미술계를 둘러 본 것이 계기였다. 고작 4색 크레파스를 가지고 48색 크레파스를 가지고 있는 서양화와 색채 경쟁을 벌인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한국인이란 무엇인가’, ‘한국의 그림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자문을 수차례 던진 그에게 떠오른 것은 결국‘묵향’이었던 것이다. 먹은 흑색의 단색이지만 농담과 필력으로 다양한 색감을 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먹은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뽐내지 않기에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남천이 그린 우리나라 산과 산천 또한 엄마 품속처럼 포근한 느낌을 준다. 깎아지른 절벽과 울창한 산림으로 힘과 기개를 발산하는 여타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아우라를 뿜어내는 것이다. 이런 작품의 멋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화면 속의 대상을 하나씩 해체해 ‘보지 말고’ 전체적으로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느껴야’ 한다. 뜻밖에도 산과 강, 그리고 강촌의 나무를 소재로 그리지만 자신이 한 번도 높은 산 위에 오르거나 계곡에 묻혀본 일이 없다고 한다.

“산에 오르면 산을 못 보지요. 밖에서 봐야 산을 전체로, 하나의 조형으로 파악할 수 있지 그 속에 들어가서는 바위나 나무밖에 뭘 보겠습니까. 그건 바위, 흙, 나무지 산이 아닙니다. 바람은 볼 수 없고 느끼듯이 산은 우리 생활 속에 들어와 있는 것 아닙니까. 산은 하나의 형체지 사람이 오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우리나라의 산은 한국인의 인성과 생활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미술평론가 박용숙은 송수남 작가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남천을 대할 때마다 나는 한 마리 황소를 연상하게 된다. 그것은 온순하게 밭을 갈거나 무거운 달구지를 끌고 가는 그런 황소가 아니라 싸움을 하기 위해 길들여진 전투적인 투우를 연상하게 된다는 말이다. 우선 그의 딱 벌어진 덩치며 기력이 펄펄 넘칠 듯한 벌그레한 얼굴이 그렇다. 물이 차면 넘쳐서 둑을 허물고, 나뭇가지가 뻗을 곳이 없으면 벽을 밀친다. 하물며 싸우길 작정한 황소의 힘인들 오죽하랴. 그가 다행히 붓에다 먹을 묻혀 휘둘러대는 화가이기에 망정이지 씨름꾼이 되었으면 천하장사는 떼어 놓은 당상이고 정치꾼이 되었으면 왕년의 김두한이 저리 가라였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설명도 그의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작업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놓여진 100개가 족히 넘는 양초. 송수남 화백의 부인이 사다 놓은 것일까 싶었지만 자신이 하나둘씩 산 것이란다. “공도 못치고, 별다른 취미도 없고, 유일하게 끄적거리는 게 그림이라서 화가로 산다”고 하지만 기실 그는 책에 대한 욕심도 많다. 작업실에는 소설가의 서재 못지않게 책이 쌓여 있고, 철학서 문학서의 구분 없이 다독을 한다. 여행을 가더라도 책방은 필수 코스라고. 무뚝뚝하고 투박한 인상의 이면에는 뜻밖에도 책 냄새가 숨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고미술 사랑은 인사동에서도 유명하다. 민화나 고미술 특히 목기나 백자에는 조예가 깊다.

“조선조 문화의 극치는 백자였지요. 조선인의 심성이 단순하고 담백하게 표현되었습니다. 당시 백자를 빚어내는 도공들이 청자나 그보다 현란한 중국의 도자기를 구워낼 수도 있었지만 백자를 고집했지요. 그렇게 나타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 민족의 심성이었고 우리의 우주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그 백자의 예술이 수묵화의 본질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남천 송수남은 백자를 닮았다. 간결하게 이야기하고 자신을 치장해서 말하거나 지식의 허세도 부리지 않는다. (요즘에는 원고 청탁을 거절하지만) 신문이나 잡지에 원고를 기고했을 만큼 글 솜씨 좋은 그가 표현을 잘 못해서 말을 아끼는 것일 리 없을 것이다. 홍익대 재학 시절 조소과 동기였던 소설가 이제하와 명동의 ‘돌체’, 종로의 ‘르네상스’, 신촌의 ‘빠리 다방’과 같은 음악다방을 전전했고 현재까지도 작업실에 클래식 음악을 습관적으로 틀어 놓은 채 지낸다. 그의 말마따나 작곡가가 누구인지 곡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듣는다손 치더라도 ‘듣는 귀’는 명연주자의 수준에 닿아 있을지 모른다. 극치의 미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담박한 자태로 놓여 있는 백자처럼 남천 송수남 또한 예술적, 문학적, 철학적 소양을 가득 품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백자를 닮은 인품, 붓끝에 묻어나는 듯

여름나무, 120×90cm, 한지에 수묵, 2000

글 정지현 미술전문 칼럼니스트·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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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08-01-1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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