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색 캐딜락 클래식 카와 중년 남녀가 등장하는 사진 작품 ‘로케이션#12’. 정연두라는 작가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작업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구상 작품임에도 추상 못지않게 난해하게 느껴질 것이다. 먼저 눈에 보이는 장면을 하나하나 꼽아 보자면 이렇다. 사진은 흑백영화에서 남녀가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장면을 연출할 때 으레 보이던 전형적인 앵글로 찍혀 있다.배경과 합성한 티가 ‘팍팍’ 나는 그런 장면처럼 말이다. 그리고 차 안에는 번쩍이는 금빛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와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 스타일의 중년 여성이 앉아 있다. 어딘가 언밸런스하고 감상 포인트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헷갈리는 이 사진은 정연두와 그의 작품을 설명하기에 제격이다.우선 그는 사진작가가 아니다. ‘로케이션’ 시리즈를 비롯해 ‘내사랑 지니’, ‘원더 랜드’와 같은 작업의 결과물이 사진으로 보여 지는 탓에 종종 ‘사진작가’라고 소개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작가의 시선으로 순간을 포착하고 사진 한 장에 의미를 함축해 담아내는 작업을 하는 이들과 그는 다르다. 서울대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런던 골드스미스 미술학교에서 순수미술을 공부한 그에게 사진이라는 매체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표현하는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90% 이상 생각하고, 제작은 10%도 안 되고 실질적 촬영은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는 무엇을 찍겠다는 생각과 왜 찍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생기기 전까지 카메라를 들지 않는다.“역사상 사진처럼 대중 사이에서 향유된 예술 매체가 있을까요. 회화의 전성시대에 사람들이 훌륭한 풍경이나 신기한 것을 보았을 때 드로잉 북을 꺼내서 그리지는 않았죠. 그렇지만 디지털 카메라가 흔한 요즘은 전 세계 무수히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진이 공유되는 시대입니다.이런 때 그들과 차별화된, 작가로서의 작품은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에 관해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사진기를 꺼내드는 데 신중한 것은 시각적인 것 이전에 이유에 대한 철학적 생활, 사고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작품이 달랑 사진 한 장인 것 같지만 작업을 구상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요컨대 이유나 사유가 구체화되면 드로잉을 하고 그에 맞는 적당한 장소를 찾고 소품을 준비한 후 현장에 세팅해 촬영을 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것이다. 마치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찍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객에게 보이는 결과물은 판이하게 다르다. 예컨대 ‘로케이션#12’같은 작품이 영화의 한 장면이라면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전 장면과 그 다음 장면이 이어지기 때문이다.그러나 사진은 사실적 매체임에도 구체적이지 않다. 동영상처럼 이야기해 주지 않기 때문에 하는 과정인 것인지, 하고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고 단지 제시할 뿐이다. 한눈에 파악할 수 없는 만큼 다의적 해석이 가능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여지가 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부분을 상상케 하는 것이 바로 정연두 작품의 특징이랄 수 있다.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글의 행간을 읽을 수 있어야 하듯 사진 이면의 모습을 읽어내야 한다.‘내 사랑 지니’ 연작은 일견 꿈을 실현시켜 주는 프로젝트처럼 보인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위해 멋진 레스토랑의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웨이터, 남극 여행을 가는 것이 꿈인 아이스크림 가게 아르바이트 고등학생, 나이트클럽에서 사랑에 빠지고 싶은 남자 등 그들의 소망이 사진으로 재현돼 있기 때문이다.“2000년 분당의 한 주유소에서 윈도 와이퍼를 판촉하는 소녀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저 아이는 어떤 생각으로 살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낯모르는 이에게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털어놓기란 쉽지 않습니다. ‘미술’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죠. 이 작품의 가장 큰 재미는 미술작품이 작가의 머리에서 나와서 만들어져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얘기를 듣고 나누며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관람객에게는 아르바이트 차림의 사진과 남극탐험대와 같은 모습으로 연출한 사진, 즉 비포(Before)와 애프터(After) 컷만 보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보이는 않는 그 사이입니다. 두 작품 간의 ‘시간적 갭’을 제시해 실질적으로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을 추측하고 상상하는 것은 보는 사람의 몫인 거죠.”앞서 말했듯 이런 작업을 구상해서 구체화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영감이 떠오르면 이내 신들린 듯 뚝딱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떠오른 아이디어를 한참 동안 실행하지 못할 때도 있다. 기회, 상황, 재정적 뒷받침이 매번 원하는 때에 갖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최근 세계적인 아트 페어와 비엔날레 등에서 그의 이름이 많이 거론되지만 1년 내내 전시를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아주든 말든 그는 끊임없이 작업에 대해 생각했고, 그 시기 동안 들어둔 적금(작품 아이디어)이 많이 있다. 지난해 ‘올해의 작가’에 선정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게 됐을 때도 ‘적금 하나를 깨서’ 새로운 작업을 선보였다. 주변에서는 시간적 여유도 없고 공간도 넓으니까 위험 부담이 없는 회고전 형식으로 지금까지 나온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 주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넓은 전시장’을 얻은 호기를 놓칠 그가 아니었다. 내내 구상하고 있었지만 공간의 제약으로 펼치지 못했던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를 선보인 것이다. 한 장의 사진으로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모든 준비 과정이 담긴 영상물과 함께 그것을 촬영하기 위해 만들었던 세트장을 모두 설치, 전시해 놓은 것이다.“비용은 얼마든지 댈 테니 다음 달까지 좋은 작품을 만들어 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그때부터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제작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러나 준비된 작가라면 제의가 들어왔을 때 이미 숙성된 아이디어를 갖고 있어야 하며 무릎을 치는 기발한 작업을 쏟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는 1년 이상 구상하고 있던 것을 실현한 것이지요.성찰과 사유를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이를 숙성하지 않은 채 작품화하면 유치하고 조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적인 것보다 무형적인 ‘퀄리티’가 있어야 하고 이는 더 좋은 작품을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그가 추구하는 세계는 현실에서 출발한 판타지 같은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판타지가 판타지로서만 존재하면 아름답지만 공허하고 현실만 다루면 건조하다. 이 두 가지를 절묘하게 결합해 현실을 통해 판타지를 제공하는 것이 정연두 작품의 힘이다. 이 과정 속에서 작가는 유치원 어린이들, 군인들, 회사원들 등 여러 사람과 교류하고 이는 자연스레 작품 속에 녹아들어간다. 유치원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한 ‘원더 랜드’ 연작은 아이들의 순수한 환상 세계를 재현해 사진으로 보여준다. 이때는 ‘우직하게’ 유치원을 다니며 아이들의 실제 작품을 모으기도 했다.그는 영화 속 주인공인 포레스트 검프 같은 사람이 멋지다고 생각한다.머리 굴려가면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달려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그런 면이 말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쉬지 않고 달리는 그가 비록 바보 같은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비웃음을 살 때도 있고, 잘 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열심히 하면 결국 인정받게 마련 아니겠는가.글 정지현 미술전문 칼럼니스트·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