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타그룹 라탄 타타 회장

타타그룹은 신흥국 다국적 기업의 대표 주자로, 타타 회장은 그 사령탑으로 이미지를 확고히 심어가고 있다.난 1월 인도 뉴델리 자동차 전시회에 전 세계의 눈과 귀가 쏠렸다. 인도 돈으로 10만 루피(약 240만 원)의 초저가 자동차가 첫선을 보이는 자리였다. 주인공은 인도의 국민차로 불리는 ‘타타 나노’. 이날 타타그룹의 라탄 타타 회장은 10만 루피짜리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던 2003년을 상기시키며 “약속을 지켰다”고 말했다.‘240만 원짜리’ 자동차 프로젝트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 없이는 이 가격대를 맞추기 어렵다. 플라스틱 자동차 차체에 새로운 조립 라인을 갖춰야 한다. 핵심 부품을 표준화한 모듈로 만들어 각 지역에 공급하면 해당 지역의 제휴 업체가 직접 조립, 공급하는 방식을 택했다. 올해 70세의 라탄 타타 회장이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추진해 나가는 면모는 젊은 경영인을 능가한다는 평가다.타타 회장은 세계 인수·합병(M&A) 시장의 큰손이기도 하다. 2000년 세계 2위의 영국 차(茶) 업체 테틀리를 사들인 데 이어 2003년에는 우리나라의 대우자동차 트럭 부문을 인수했다. 2004년엔 해저 통신케이블 회사인 타이코를 1억3000만 달러에 사들여 타타를 세계 최대 국제전화 사업자로 만들었다. 연도별 M&A 건수는 2004년 5건, 2005년 10건, 2006년 20건 등 숨이 가쁠 정도다.그 절정은 작년 1월 영국과 네덜란드 합작 철강 회사인 코러스 인수였다. 코러스의 인수는 인도 역사상 최대 규모의 M&A였다. 조강량 기준으로 세계 56위였던 타타가 일약 세계 5대 철강회사로 우뚝 서는 계기가 됐다. 타타 회장은 최근엔 포드의 재규어와 랜드로버를 인수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초저가차 개발로 주목받았던 타타자동차가 고급 브랜드 자동차 시장을 파고들려는 움직임이다. 타타그룹은 세계무대로 뻗어가는 신흥국 다국적기업(Emerging Market Multinationals)의 대표 주자로, 타타 회장은 그 사령탑으로 이미지를 확고히 심어가고 있다.인도 최대 재벌 타타그룹은 우리나라로 따지면 옛 현대그룹에 비견할 만하다. 자동차 제철 엔지니어링 원자재 에너지 화학 정보통신 서비스 소비재 등 사업 부문에서 거대한 계열 기업들을 거느리고 있다. 인도에서 총리는 몰라도 타타 회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타타그룹은 라탄 타타의 증조부뻘인 잠셋지 타타가 1868년 창립했다. 뭄바이에서 직물공장을 시작해 인도 근대화를 이끈 기업 중 하나가 됐다. 타타 일가는 구자라티 말을 쓰는 파시(parsi) 상인이 그 뿌리다.여기서 잠깐 인도 상인 계급에 대해 살펴보자. 타타뿐만 아니라 인도 비즈니스계를 이해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인도 상인은 ‘상인 카스트’ 또는 ‘비즈니스 패밀리’로 불린다. 대대로 가업을 이어가는 상인 계급을 말한다. 인도 전체 인구의 2%에 불과하지만 인도 상권을 쥐고 흔들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하다. 주요 상인 카스트로는 인도 서부 라자스탄주에 뿌리를 둔 ‘마르와리 상인’, 자이나교를 신봉하는 ‘제인 상인’, 중서부 구자라트주의 ‘구자라티 상인’, 파키스탄 접경 펀잡주의 ‘펀자비 힌드 카트리’, 뭄바이 지역의 ‘파시 상인’등을 꼽을 수 있다.마르와리 상인은 인도의 유대인이라 불린다. 금융과 유통업을 장악, 인도 부의 절반을 차지한다. 제조업에서도 영향력이 크다. 세계 1위 철강 기업인 아르셀로-미탈의 락시미 미탈 회장이 마르와리 출신이다. 타타는 파시 상인을 대표하는 비즈니스 패밀리라고 할 수 있다.1938년생인 타타 회장는 일곱 살 되던 해에 부모의 이혼으로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뭄바이 캠피언스쿨을 졸업한 그는 미국 코넬대에서 건축공학과 구조역학을 공부했다. 이어 하버드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졸업하던 1962년 12월 그는 바로 타타그룹에 합류했다. 잠셋푸르 지방의 타타철강 공장에서 블루칼라 노동자들과 함께 현장 일을 했다. 삽으로 석회석을 떠 나르고 녹아내릴 듯한 용광로를 다루는 일을 했다. 락시미 미탈 회장처럼 유학 뒤에 바로 현장에서 밑바닥 일부터 배웠다.1971년 타타는 재무 위기를 맞은 국영 라디오와 가전제품 제조회사인 넬코의 사장에 임명됐다. 넬코는 인도 가전제품 시장에서 2%에 불과한 점유율을 갖고 있었다. 주주들에게 변변한 배당금을 지급한 적도 없었다. 타타는 회사 경영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가전제품이 아닌 첨단제품 개발에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주들도 타타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차츰 경쟁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넬코는 1975년엔 시장점유율을 20%까지 높이고 수익 구조를 확립했다.하지만 하늘은 그를 돕지 않았다. 1975년 인디라 간디 인도 총리가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경기 침체가 찾아왔다. 2년 뒤인 1977년에는 노조와의 갈등이 증폭됐다. 노조가 파업에 나서자 타타는 수개월간의 직장 폐쇄로 대치했다. 넬코의 경쟁력과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여전했지만 이런 역경을 딛고 일어서기엔 역부족이었다.결국 타타 회장은 넬코를 떠나 섬유 업체인 엠프레스 밀즈로 옮겼다. 당시 엠프레스 밀즈도 ‘사고(事故) 사업장’ 중 하나였다. 타타 회장이 겨우 흑자 전환과 배당금 지급이란 성과를 일궈냈지만 이번에도 운은 따르지 않았다. 현대화된 설비로 무장한 경쟁사들이 문제였다. 타타의 주장으로 일부 투자가 이뤄지긴 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다시 엠프레스는 적자 더미에 올랐고 1986년 결국 문을 닫았다. 타타는 훗날 “당시 깊은 실망감에 휩싸였다”고 회고했다.연이어 두 번의 실패를 겪은 타타는 1981년 타타그룹 지주회사 중 하나였던 타타산업 회장에 올랐다. 이 회사를 그룹의 핵심 싱크탱크이자 첨단 비즈니스 개발을 위한 창구로 바꾸는 임무를 맡았다. 1991년엔 드디어 그룹 회장직을 맡게 된다. 그는 이때부터 오랜 그룹의 가신들을 쳐내고 대신 젊고 혁신적인 중견 간부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타타 회장은 타타그룹이 시가총액 기준으로 인도 증시 최대 그룹이 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의 공(功) 중 하나는 300여 개에 달했던 계열사를 효과적으로 정리했다는 점이다. 10년 전 그룹 계열사가 재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당시 7만8000여 명의 타타 직원 중 4만여 명을 해고하는 결정을 내렸다. 화장품과 페인트 등 불요불급한 사업들은 모두 정리했다. 이를 통해 경영 합리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첨단산업 중심으로 그룹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타타 회장은 지난 1월 뉴델리 자동차 전시회에서 페라리 자동차의 지분을 원한다고 밝혀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 정도로 타타 회장이 자동차에 쏟는 관심은 엄청나다. 그는 이탈리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자동차와 항공기에 관심이 많다고 밝혔다. 이어 자신이 꿈꿔온 소원 두 가지는 바로 전투기 조종사와 페라리의 주요 주주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타타 회장은 실제로 경비행기와 헬기를 직접 조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열일곱 살 때 처음 단독으로 항공기를 조종했다. 최근엔 인도 방갈로르에서 열린 ‘인도 에어쇼’에서 미국 록히드 마틴이 제작한 F-16 다기능 전투기를 직접 몰아 화제가 됐다. 그가 전투기 조종간을 잡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타타 회장은 아직 독신이다. 애견 ‘탱고’를 키우며 혼자 살고 있다. 그는 출장을 갈 때도 수행원들을 떨치고 혼자 전용기를 타고 이동하기를 좋아한다. 출퇴근할 때는 1만2500달러짜리 타타 인디고 마리나 왜건을 이용한다.타타 회장은 국제 비즈니스계에서도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미국 금융회사 AIG그룹, JP모건, 컨설팅회사 부즈앨런해밀턴, 일본 미쓰비시상사의 국제 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제투자위원회 이사, 뉴욕 증시의 아시아태평양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04년엔 중국 저장성 항저우시의 명예 경제자문역에 위촉됐다. 2006년 3월엔 코넬대 졸업생 중 비즈니스계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주는 ‘로버트 햇필드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그는 또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세운 자선재단인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의 인도 에이즈(AIDS) 퇴치 이사회 일도 하고 있다. 타타그룹은 예전부터 인도과학원과 20여 개 초·중·고교를 세워 교육과 빈민 구제에 힘써오고 있다.타타 회장은 “나이가 들수록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고 느낀다”며 “이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책무”라고 강조해 오고 있다. 이 같은 그의 처신 덕분에 작년엔 카네기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장규호 한국경제신문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