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은 가공의 인물을 통해 인간 세상의 갖가지 모습을 그려낸다.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공상적인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 인간사의 여러 모습을 ‘재현’하는 게 바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자신이 직접 현실에서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간접으로 경험함으로써 소설을 통해 교훈을 얻고 살아가는데 유용한 지침으로 삼기도 한다. 그게 소설의 매력이자 힘이라고 할 수 있다.“사람은 누구라도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실해야 한다. 살고 난 뒷자리도 마찬가지”라고 어른들은 말했다. “앞에서 보면 그럴듯해도 돌아선 뒤태가 이상하게 무너진 듯 허전한 사람은, 그 인생이 미덥고 실하지 못하다”고도 했다. 앞모습은 꾸밀 수도 있으나 뒷모습만큼은 타고난다는 뜻도 있으리라.또 “사람의 귀천은 꼭뒤에 달려 있느니 뒷모습은 숨길 수가 없다”고도 말했다.이는 관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상(前相)이 불여(不如) 후상(後相)이라”고 하여 사람의 앞모습 좋은 것이 뒷모습 좋은 것만 못하며 “후상이 불여 심상(心相)이라”고 하여 뒷모습이 아무리 보기 좋아도 그 사람 마음의 모습이 바르고 훌륭한 것만 못하다고 했다.이는 최명희가 쓴 ‘혼불’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쩌면 사람이나 가문이나 ‘격(格)’은 나타나 보이는 부분보다 나타나지 않는 부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도 격이 있듯이 가문에도 격이 있고 나아가 국가에도 격이 있다. 격이 높은 나라는 선진국이 되고 선망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격은 단순히 가시적으로 보이는 경제적인 척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나타나지 않는 문화적인 척도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우리나라가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과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은 바로 경제적인 척도가 아니라 눈에 잘 나타나지 않는 문화적인 척도일 것이다. 경제적 척도가 ‘전상’이라면 문화적 척도는 ‘후상’이나 ‘심상’에 해당할 것이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중국이 세계, 특히 미국과 유럽 선진국에 가장 보여주고자 한 게 바로 중국의 ‘문화’였다. 한국은 엄청난 국력도, 세계인이 평가해 주는 격조 높은 문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선진국에 가면 부러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인사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는 이런 말이 회자된다. “현재의 일본을 만든 것은 ‘오아시스’이다.” ‘오아시스’는 오하요고자이마스(안녕하세요), 아리가도고자이마스(감사합니다), 시쯔레이시마스(실례합니다), 스미마센(죄송합니다)의 앞 글자를 따온 조어다. 일본인들의 인사 문화가 일본을 선진국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인사 문화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생활 문화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익스큐즈 미(Excuse me)’나 ‘소리(Sorry)’, ‘생큐(Thank you)’라는 말은 늘 입에 붙어 다니는 일상의 언어다.영국을 방문했을 때 영국인들은 삼성이나 LG가 어느 나라인지 잘 모르고 있고 대부분 일본 브랜드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들었다. 첼시팀 선수 유니폼에 ‘SAMSUNG’이라는 로고가 적혀 있지만 한국 브랜드라고 알고 있는 영국인들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삼성 역시 굳이 한국 브랜드라고 알리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삼성을 일본 브랜드라고 여기면 그게 더 비즈니스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생소한 ‘코리아 브랜드’라고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명품, 혹은 명문 브랜드는 바로 나타나 보이는 것만을 챙겨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을 것이다. 나타나지 않는 부분, 뒷모습, 나아가 마음까지 헤아려야 한다. 고객들의 마음까지 헤아리지 않고 나타나는 디자인만 신경 써서는 결코 명품에 도달할 수 없다. 삼성 등 대기업들이 한국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비록 제품에 대한 명성을 얻었을지는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과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명문가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명문가는, 달리 말하자면 이웃과 사회적 소통을 잘해 온 가문에 주어지는 사회적 명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웃들이 어려울 때 그들에게 물질적인 도움만 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웃들이 어려울 때 곤경을 이용해 재테크에 열을 올린다면 결코 명문가가 될 수 없다. 이웃이 어려울 때에는 어려움을 이용하지 않아야 한다. 경주 최부자 집의 경우 흉작이 들 때에는 결코 이웃의 논밭을 사들이지 않았다. 헐값으로 나온 땅을 산다면 그 이웃들의 마음을 더욱 사납게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만 이웃을 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는 결코 명문가로 대우해 주지 않는다. 명문가는 바로 앞에서 이웃을 도울 뿐만 아니라(전상) 음지에서도 보이지 않는 도움을 주며 사회적 소통을 잘 유지할 때 주어지는 최상의 칭호인 것이다. 즉, 전상뿐만 아니라 후상, 나아가 심상이 아름다운 사람과 그 가문만이 진정 명문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최명희의 ‘혼불’은 남원의 한 종가의 삶을 재현한 작품으로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종부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인 청암부인은 불행하게도 첫날밤조차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그만 10대에 과부가 된다. 이른바 ‘묵신행’의 풍습에 따라 남편은 신부 집에 가 결혼식을 올리고 본가로 돌아가는데 도중에 열병으로 죽고만 것이다. 소설 ‘혼불’은 청암부인이 남편도 없는 시댁으로 오면서부터 시작되는데 억척같은 종부의 삶으로 스러져 가는 종가를 재건하고 천석지기 이상의 부를 축적한다. 소설에서는 청암부인의 ‘심상’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대목이 나온다.마당쇠는 제가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해 놓은 손님이 빗자루를 세워 들고 마당 한쪽에 쑥스러운 기색으로 오두마니 서 있는 것을 그때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마당쇠는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곧바로 청암부인에게로 가서 “마님, 아무아무가 오늘 아침에 마당을 깨끗이 쓸어 놓았습니다”하고 고하였다.“알았느니라.” 청암부인의 대답은 그뿐이었다.손님은 그 대답에 송구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었다. 그러고는 잠시 후에 부인은 광으로 가서, 자루에 쌀이나 보리 혹은 다른 곡식을 들고 갈 수 있을 만큼 담아 내, 그가 타성 같으면 직접 가지고 가게 주었고 문중의 일가라면 마당쇠한테 가져다 드리라 시켰다. 그러니까 그 곡식이 마당 쓴 값이라고나 할까. 집안에 양식이 떨어져 먹을 것이 없게 되면, 가난한 가장은 그렇게 빗자루 하나 들고 그 마당으로 찾아가, 성심껏 쓰는 것으로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였으며, 청암부인은 그 정경으로 모든 것을 짐작하고 두말없이 곡식을 내주었던 것이다.“신새벽에 귀설은 빗자루 소리 들리면, 오늘은 또 누가 와서 마당을 쓰는고 싶더니라. 인제 후제 내가 죽더라도 그렇게 이 마당 찾는 사람을 박대하지는 말어라. 그것이 인심이고 인정이다. 이 마당에 활인(活人) 복덕(福德)이 쌓여야 훗날이 좋지. 태장(笞杖)소리 낭자하면 안택굿도 소용이 없어. 집안이 조용허지를 못헌 법이다.” 청암부인은 그렇게 아들 이기채에게 일렀다.사람은 누구나 앞모습에 신경을 쓴다. 심지어 고약한 얼굴을 화장으로 가리기도 한다. 또 누구나 나타나는 실적을 중시한다. 보이는 것이 ‘착시’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그것도 능력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참모습이 나타날 때가 있다. 청암부인은 바로 아들 이기채에게 ‘심상’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앞모습과 함께 뒷모습을 챙기고 나아가 마음의 모습까지 관리할 후 있다면 그게 바로 사람을 얻는 길이요, 격이 있는 삶의 길일 것이다. 박경리의 ‘토지’에는 “사람은 죽어 관 뚜껑을 닫아봐야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 역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경구다.전상과 후상, 나아가 심상까지 관리하지 않는다면 오랜 시간 후광을 보이는 명성을 얻을 수 없다. 이는 사람뿐만 아니라 기업, 나아가 국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앞모습도 실해야 하지만 뒷모습이 더 실한 사람, 나아가 마음의 모습이 더 실한 사람이 그리운 시절이다.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는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는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아빠가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49가지’, ‘메모의 기술 2’, ‘한국의 1인주식회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