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말기, 장보고의 든든한 제해권과 해상무역의 독점으로 신라는 당나라와 모든 방면에서 폭넓은 교류가 이뤄졌다. 구법유학승들에 의해 선종(禪宗)이 들어오면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이 형성되고, 선종과 함께 차 문화도 화려하게 꽃피운다.고려가 건국되고 불교를 더욱 숭상해 범국가적 제전인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가 열릴 때는 물론이요, 외국 사신을 맞이할 때, 왕자가 태어났을 때, 태자를 책봉할 때, 공주를 시집보낼 때,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 때 등 국가적인 예식에 모두 다례(茶禮)를 행했다. 이 모든 궁중 다례에서 차와 꽃 과일 약을 담당하는 다방(茶房)을 설치했고, 왕의 순행(巡幸)에서 차 일을 담당하는 차군사(茶軍士)가 있었다. 민간에서도 차를 마시고 쉬어갈 수 있는 다점(茶店)이 생기고 중국차를 파는 상점과 엉터리 차 행상까지 생겨나는 등 차의 대중화가 이뤄졌다. 이렇게 궁중에서 차의 수요가 증가하고 민간에서도 음다 풍속이 확산되자 차의 수급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당시 유명한 차 산지였던 지리산 화개동에 다소(茶所)가 있었다. 지역 명에 향(鄕) 소(所) 부곡(部曲)이 붙은 지역은 특별한 토산물이 생산되거나 특정한 기술이 있는 자들을 모여 살게 한 곳이다. 그 특산물이나 생산품을 공납하게 하는 제도가 신라 때부터 있었다. 화개부곡은 차를 만들어 바치던 다소가 있던 곳으로 차의 진상은 조선조 말까지 계속됐다. 고려 때 화개다소의 차 따는 시기와 차의 종류 품질, 노역에 종사하는 주민의 고통, 개경에 공납하는 방법과 시기 등을 상세히 보여주는 장편 시(詩) 5편이 전하고 있다. 모두 백운 이규보(白雲 李奎報, 1168~1241년) 선생의 시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수록돼 있는 내용이다. 선생은 시와 술, 거문고를 너무나 사랑해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고 불렸고 차도 좋아해 차 문화, 특히 지리산 화개 차에 관한 기록을 많이 남겨 당시의 차 생활에 대해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자.먼저, 화개차는 진상품이었다. 그 어느 누구보다 임금님께 먼저 올리기 위해 ‘험한 산중에서 간신히 따 모아 머나먼 서울까지 등짐으로 져 날랐네’라고 했다.둘째, 차는 섣달에 좁쌀 같은 어린 순만을 따서 덩이차로 만들었다.셋째, 차는 임금의 하사품이었다. 서울의 부귀한 재상도 얻기 어려운 차를 고승 대덕에게 예물로 보내기도 한 기록이 있다.넷째, 화개차는 색향기미(色香氣味)가 빼어나 선생이 유차(孺茶)라고 이름 지었다. 향기는 코를 찌르고 색깔과 달콤한 맛은 빼어났다. 특히 향기가 갓난아기의 배냇냄새 같은 젖 냄새가 나는 최상품이었다. 하사받은 선사도 차마 마시지 못하고 아끼며 깊이 간직했다고 한다.다섯째, 차풍류(茶風流)도 즐겼다.여섯째, 차의 부역이 혹독했다. 관에서 노약자까지 강제로 징발해 노역을 시키니, 험준한 산 속에서 맹수의 두려움에 떨면서 야생차를 따고 추위에 손을 불면서 차를 만들어 머나먼 개경까지 등짐으로 져다가 궁궐에 바쳤다.선생은 차 세금이 없어지면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화개차는 백성의 애끓는 고혈이니수 많은 사람의 피땀으로 이루어 졌다네. …일천가지 망가뜨려 한 모금 차 마련하니 …내 시의 은밀한 뜻 부디 기억하게나.산과 들의 차나무 불살라 차 세금 금지한다면남녘 백성 편히 쉼이 이로부터 시작되리라.”차가 얼마나 귀한 상품이면 이랬을까. 그윽한 차 한잔에 감사의 마음을 담는다.농수산식품부 지정 대한민국 녹차 명인쌍계제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