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고 살아갈 땅은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선택해야 한다. 커다란 강과 산이 어우러진 곳은 좁은 시내(川)와 자그마한 동산이 어우러진 곳만 못하다. 좋은 땅으로 들어가려면 골짜기를 따라 들어가야 하는데 그 어귀에는 깎아지른 절벽에 기우뚱하게 서 있는 바위들 몇이 있어야 한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병풍이 펼쳐지듯 시계가 환하게 열리면서 눈을 번쩍 뜨이게 해주는, 이런 곳이라야 복된 땅이다. 한가운데 땅의 기운이 맺힌 곳에 띳집 서너 칸을 정남향으로 짓는다…. 방 안에는 책꽂이 두 개를 설치하고 거기에는 1300~1400권의 책을 꽂아야 한다….”다산 정약용이 제자 황상에게 써 준 ‘숨어사는 자의 모습(題黃裳幽人帖)’을 읽다 보면 금세 은자가 사는 공간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다. 어느 날 다산이 황상에게 명 말기 황주성(黃周星)의 ‘장취원기(將就園記)’를 읽어주자 황상이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스승에게 아뢰면서 그 꿈을 시로 지어 올렸다. 이때 다산은 ‘제황상유인첩’을 지어주며 어린 제자에게 숨어 사는 선비의 바른 마음가짐을 말해 주었다.그런데 ‘제황산유인첩’에서 유인, 즉 은자의 삶은 강진에 유배돼 있는 다산이 이루고자 했던 삶이 아니었을까. 열다섯 살 때 다산을 만나 가르침을 받은 황상은 강진군 대구면 천개산 아래 백적동에 자신만의 은자 공간을 마련해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은둔하는 선비의 삶을 살았다. 주역에는 ‘유인정길(幽人貞吉)’이라고 하여 은자의 자세를 견지하면 길하다고 말한다. 유인은 은둔해서 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막후, 학문 교육계, 연구계, 집안에서 일하며 사는 은자 등을 두루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황상은 집 안에서 일하며 학문과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은 선비의 삶을 선택한 것일 게다.황상은 후일에는 대구면 항동에 ‘일속산방(一粟山房: 좁쌀 한 톨 만한 작은 집)’이라 불리는 집을 짓고 살았다. 일속산방은 추사 김정희가 그에게 내려준 당호다. 스승인 다산은 가끔 일속산방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도 했다. 다산은 황상이 지어준 조밥에 아욱국을 먹고 시를 짓기도 했다. 일속산방은 당대의 화가인 허소치가 황상을 위해 ‘일속산방도’를 그려 주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황상이 쓴 글에는 일속산방의 내력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내가 일속산방을 짓겠다는 뜻을 아뢰자 선생은 놀라시며 ‘자네가 어찌 내 마음을 말하는가?’라고 하셨다.” 황상은 어린 제자였지만 스승과 유자의 삶에 이심전심으로 통했던 것이다. 황상은 스승의 염원을 담아 “구름과 안개 노을이 포근히 덮어 가려주고, 가는 대나무 숲과 향기 짙은 꽃들이 푸름과 향기를 실어주는 곳”에 은자의 거처를 마련했고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겨 시골 소년에서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일속산방에 살며 부패한 사회를 고발하는 풍자의 다산 시풍을 계승했고 ‘치원유고(梔園遺稿)’라는 문집을 남겼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이며 삶이런가.“뜰 앞에는 벽을 한 줄 두르는데, 너무 높지 않게 해야 한다. 담장 안에는 석류와 치자, 목련 등 갖가지 화분을 각기 품격을 갖추어 놓아둔다. 국화는 제일 많이 갖추어서 48종쯤은 되어야 한다. 마당 오른편에는 작은 연못을 판다. 사방 수십 걸음쯤 되면 넉넉하다. 연못 속에는 연꽃 수십 포기를 심고 붕어를 길러야 한다. 대나무를 따로 쪼개 물받이 홈통을 만들어 산의 샘물을 끌어다가 연못으로 졸졸졸 떨어지게 한다. 연못의 물이 넘치면 담장 틈새를 따라 채마밭으로 흐르게 한다…. 문밖에 임금이 부른다는 공문이 당도하더라도 씩 웃으며 응하면서 나아가지 않는다.”그야말로 누구나 한번쯤 희구하는 전원의 삶이 아닐까. 여기서 임금이 불러도 씩 웃으며 나아가지 않는다는 표현에서 유배지에서 자신의 꿈을 삭여야만 했던 다산의 한스러운 정서가 그대로 묻어나온다.아파트에 살면서 가끔 아래 위층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생각하면 끔찍한 생각이 든다. “정말 아파트는 야만적인 곳이야!” 누구나 한번쯤 탄식처럼 이런 푸념을 할 것이다. 우리 시대는 그야말로 숨 막히는 ‘압축 공간’에 살고 있다.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집은 재테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도구적 공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황상에게 집은 결코 부를 축적하는 도구적 공간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아늑한 오이코스(oikos) 였다. 오이코스는 공적 영역으로서의 폴리스에 대비되는 사적 생활단위로서의 ‘집’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황상의 일속산방은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꿈을 만들어가는 오이코스라고 할 수 있다. 채마밭에서 먹고 살만큼의 농작물을 키워내면서 자신의 내면을 가꾸는 하나의 작은 세계의 축소판이었던 것이다. 일속산방에서 그는 부족한 게 없었을 것이다.그렇지만 우리 시대에는 평수가 넓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항상 욕망의 결핍에 사로잡힌다. 잉여쾌락(욕망을 덧없게 하는 또 다른 욕망)이라는 말처럼 또 다른 재테크의 욕망은 끝이 없다. 넓은 집에 고급 승용차가 있어야 하고 욕망을 채워줄 각종 유희가 항상 대기 상태에 있어야 한다.임진왜란을 전후해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은 평생 청렴결백하게 살았고 관직에 있을 때에도 전셋집을 얻어 생활했다고 한다. 당시 양반들은 첩을 두는 게 묵인되던 시절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벼슬아치들도 한양에 첩을 두었는데 이를 ‘경첩(京妾)’이라고 불렀다. 영의정을 지낸 서애는 경첩을 두지 않았다.서애는 66세로 세상을 떠날 때에는 장례비용조차 없었다고 한다. 서애의 제자였던 우복 정경세는 “어찌 10년 동안이나 재상을 지내고도 제갈량이 남겼다는 뽕나무 800그루도 없단 말인가”라고 시를 지어 그의 청렴을 전했다.서애는 57세 때 파직돼 고향인 풍산 하회로 돌아와 귀전은거(歸田隱居: 고향으로 돌아가 부귀영화를 탐하지 않으면서 은둔자로 살아가는 것)의 오랜 소원을 이뤘다. 청백리로 서울에서도 집이 없어 전세를 살던 그는 고향에서도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었다. 형님인 겸암 류운룡의 집에 잠시 머물렀지만 수많은 문사들이 그를 보러 찾아오자 풍산 서미동의 산중에 초가를 지었다. 여기서 그는 임진왜란을 후세의 교훈으로 전하기 위해 회고록인 ‘징비록’을 썼다고 한다. 현재 하회마을의 충효당은 서애 사후에 맏손자인 유원지가 문하생들의 도움을 받아 충효당을 건립한 것이다.집이 없어 가난하게 살기로는 율곡 이이를 빼놓을 수 없다. 율곡은 16세 때 어머니를, 26세 때에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율곡이 가난하게 살자 이를 보다 못해 장인 노경린이 서울에 집 한 채를 사서 율곡에게 준 적이 있었다. 율곡은 형제들이 모두 가난하게 살아 끼니를 못 이어가는 형편임을 보고 자기가 그 집을 지니고 태연히 있을 수 없다면서 그 집을 팔아 형제들에게 골고루 분배해 버렸다. 요즘 율곡과 같이 가난한 형제를 위해 자신이 살던 집을 처분하는 이가 과연 있을까.대한민국 어디를 가나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고 있다. 아파트가 전통적인 주거 형태인 한옥을 밀어낸 지 오래다. 이미 서울에서도 한옥은 마치 찐빵의 ‘팥소(앙꼬)’처럼 도심에 외롭게 남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한옥도 부자들의 재테크 수단이 되고 있다. 서울 도심에서는 웬만한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한옥에 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다. 이로 인해 서울시에 의해 한옥마을로 조성된 북촌(조선후기 집권층인 노론의 주요 거주지)은 다시 ‘부(富)의 공간’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고 한다.“사람은 평생 열심히 살면 세 채의 집을 짓는다”는 말이 있다. 요즘도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66㎡(20평)대 아파트를 한 번 사고 이어 열심히 살면 99㎡(30평), 132㎡(40평)대 아파트를 살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이는 165㎡(50평형) 이상의 아파트를 사면서 3번의 집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집짓기, 혹은 집사기가 개인의 행복이나 성취하는 삶과 반드시 비례할까. 또 북촌이나 성북동, 한남동의 대저택들에 사는 사람들은 그 집만큼 삶이나 내면세계도 멋들어질까.황상은 평범한 집짓기보다 더 의미 있는 집을 지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백적동과 항동에서 두 번의 소박한 집을 지었지만 세 번째는 물질의 집이 아닌 정신의 집을 지었다. 바로 다산의 정신을 계승한 시집인 ‘치원유고’를 지었던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대로 ‘문사(文史)를 공부한 그는 부패한 사회를 고발하고 풍자하며 다산의 분신으로 성장했다. 벼슬길에 한계가 있었던 ‘아전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비록 좁쌀만 한 집에 살았지만 ‘다산의 아들’이라는 영예를 누리고 있다. 황상이야말로 흔히 말하는 ‘정신의 귀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고향이 있어도, 귀전은거의 로망이 있어도 이제는 쉽게 돌아가지 못하는 시대. 황상과 같이 작은 개천과 산이 있는 곳에 좁쌀만 한 작은 집을 지어 은둔하며 살아가면 그 삶이 길하다는 ‘유인정길’의 로망도 빛이 바랜 지 오래다. 우리 시대에는 황상 같은 삶은 더 이상 찬미하지 않는다. 또 다산이 써준 ‘제황상유인첩’에 나오는 집을 지을 만큼 땅을 가지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고층의 아파트, 압축 공간에서 살아가는 우리 시대에는 무슨 로망으로 삭막한 가슴을 적시며 살아갈 수 있을까.자녀경영연구소장.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는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는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아빠가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49가지’, ‘메모의 기술 2’, ‘한국의 1인주식회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