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heritance 제 44호 (2009년 01월)

“내게는 골프장 필드가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죠”

기사입력 2009.01.15 오후 04:21

 “내게는 골프장 필드가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죠”
경북 상주군에 있는 오렌지골프리조트(18홀)는 요즘 주말 골퍼들 사이에 최고의 화젯거리다. 지난 2008년 4월에 공식 개장해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한 번 다녀간 아마 골퍼들의 뇌리 속에 남는 인상은 강렬하다. 클럽 챔피언급 고수 상당수가 오렌지골프리조트를 ‘국내 최고의 코스’라고 꼽는다. 오렌지골프리조트의 매력은 마치 수십 년 전 조성된 명문 골프 코스에 온 착각이 들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만큼 자연 훼손이 덜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원래 모습을 간직하면서 라운딩하는 골퍼들에게 골프의 참 묘미를 자연스럽게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 오렌지 골프 코스의 매력이다. 이 때문에 경북 상주에 있지만 서울 수도권 등지에서 찾아오는 주말 골퍼들로 늘 차고 넘친다. 비회원 주말 그린피가 17만 원으로 웬만한 수도권 명문 골프장 수준이지만 최소 2주 전에는 예약해야 자리가 난다. 3억 원에 판매된 창립 회원권도 소리 소문 없이 다 팔려 나갔다.

비수도권이라는 지리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골퍼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오렌지골프리조트에 찬사를 보내는 까닭은 왜일까.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가장 큰 경쟁력은 오렌지골프리조트의 숨은 노하우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오렌지골프리조트를 개발한 오렌지엔지니어링은 국내 골프장 설계, 시공 분야의 지존이다. 화산, 남촌, 렉스필드, 이스트밸리, 마이다스, 버치힐, 몽베르, 골든밸리, 스카이72 등 국내 명문 코스 상당수가 오렌지엔지니어링의 작품이다. 이 때문에 관련 업계에선 ‘오렌지가 개발한 골프장에 투자하면 돈 번다’는 속설까지 등장할 정도다. 허언이 아닌 것이 오렌지가 시공, 설계에 참여한 골프 코스는 하나같이 회원가가 1~2년 후 20% 이상씩 뛴 곳이 많다.

이 회사 권동영 부사장은 국내 대표적인 골프 코스 디자이너다. 마이다스, 몽베르, 경주CC, 오라CC, 알펜시아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지산, 신라, 동부산, 화산, 시그너스, 강촌, 휘닉스파크, 나인브릿지, 제이드팰리스, 한탄강CC 설계 작업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한 해 그려내는 골프 코스만 40~50개에 이른다.

그와 인터뷰에서 처음 던진 질문도 코스 설계 비법이다.

“전 좀 어렵게 코스를 설계하는 편입니다. 물론 골프장 주인이 어떻게 주문하느냐에 따라 난이도를 결정하지만 저에게 결정 권한을 많이 준다면 당연히 좀 어렵게 그려냅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골프 코스에는 라운딩의 묘미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무리수를 둘 만한 기회도 제공해야죠. 가령 지금 한 타 정도 뒤지고 있는데 홀이 몇 개 남지 않았다고 칩시다. 그런 다음 만난 홀이 파5홀이에요. 앞서가는 사람은 안전하게 3번 만에 온그린할 요량으로 공을 칠겁니다. 이때 뒤처진 사람은 세컨드 샷에 공을 그린 위에 올려놓아야 승부가 재밌어 집니다. 이런 면에서 골프 코스를 보면 인생이 보인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세계 최초의 골프 코스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브리티시오픈이 5년마다 열리는 이곳은 골프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골프의 성지’다. 1번 홀 티샷 포인트에 서서 페어웨이를 쳐다보면 골프장이 아니라 거대한 축구 경기장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어찌 보면 너무 평이한 코스라고 할 수 있지만 구력이 쌓인 골퍼일수록 부담 없이 라운딩을 시작하도록 만든 ‘인간중심적 설계’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더군다나 지은 지 600년이 넘은 이 골프 코스는 아직까지도 누가 설계했는지 베일에 싸여 있다. 삽 곡괭이 등 지극히 원초적인 기구로 자연과 가장 근접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는 골퍼들이라면 한 번쯤 라운딩을 꿈꾼다. 지난 2005년 열린 브리티시오픈을 끝으로 은퇴한 잭 니클로스가 “더 이상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에서 뛸 수 없다는 것이 서글프다”며 울먹였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내게는 골프장 필드가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죠”


권 부사장 역시 자신의 설계 철학 요체를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로 대변되는 자연주의라고 설명한다. 아직까지 100% 만족할 만한 작품이 없다는 그가 듣고 싶어 하는 최고의 찬사도 ‘신이 만들어낸 코스’다. 예전부터 쭉 있어 왔던 편안한 느낌을 주는 코스가 최상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골프장 설계 시 기존 지형의 능선이나 계곡 등을 가급적 살리려고 노력한다.

라운딩하는 골퍼들이야 ‘뭐 별 차이 있겠어’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코스 설계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주변 지형과 코스의 수려함 외에도 클럽하우스와 인접한 1번 홀부터 시작해 18번 홀까지 편리하게 동선이 꾸며져야 한다. 골프장의 중심인 클럽하우스를 어디에 놓고 시작하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페어웨이가 너무 좁아도, 넓어도 안 된다. 골퍼들의 심리도 치밀하게 살펴야 한다. 코스의 묘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골프 코스 디자인을 “맨땅에서 하는 미로 찾기”라고 표현했다. 하루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미로가 생겼다 지워지곤 한다. 이 때문에 구상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으면 무작정 여행을 떠나는 일도 더러 있다. 어떨 때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까지 수염을 기르거나 머리를 자르지 않는 예술가다운 고민과 번뇌 속에 휩싸인다.

권 부사장은 조경학도 출신이 아니다. 서양화가를 꿈꾸는 미술학도였던 그는 추계예술대 서양학과를 졸업했다. 서양화가 출신의 골프코스 디자이너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그는 서양화를 공부한 것이 설계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학창 시절, 그는 유독 공간 구조와 기하학에 관심이 많았다. 졸업 작품도 지하철 4호선 회현역 계단 중앙에 서서 아래부터 위를 카메라 렌즈로 연달아 찍어 하나로 나열하는 에스퀴스(Esquiss)였다.

“한정된 공간에 18개의 홀을 넉넉하게 그려 넣고 각 홀마다 그린의 높낮이를 설계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워터 해저드와 벙커까지 집어넣으면서 각 공간마다 특징과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골프장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인 셈이죠. 이 때문에 대학 동기들 만나면 “나보다 큰 그림 그리는 사람 나와 보라”라고 말합니다.(웃음)”

오렌지골프리조트에는 그의 자연주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코스를 디자인하기 위해 그는 스코틀랜드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 세계 유명 골프 코스 곳곳을 누볐다. 13~15번 홀은 그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일부에서는 미국 조지아 주 오거스타내셔널의 11~14번 홀 아멘 홀과 비슷하다고 해 ‘오멘 코너’라고 부른다. 운에 맡길 수도 있지만 노력만 하면 예상외의 행운을 거머쥘 수 있다. 이따금씩 꿩 토끼 등 야생동물도 만난다.

그는 평소에도 코스 구상을 위해 해외 유명 골프 코스를 자주 다닌다. 이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디자인 포인트에 대해 수시로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는다. 요즘 그가 갖고 있는 화두는 자연스러움을 최대한 살리되 필요한 부분에는 인위적인 손을 대 코스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문제다. 가령 페블비치는 캘리포니아 해안선을 따라 코스를 조성해 코스의 난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어떤 홀은 그린 뒤가 바로 절벽이다. 120m 파3인 7번 홀은 일반인 같으면 피칭 웨지나 9번 아이언으로 그린에 볼을 올릴 수 있지만 상황에 따라선 드라이버를 사용해야 할 때도 있다. 해풍이 강해 그때그때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무쌍한 코스가 골퍼들에겐 가슴에 영원히 남는 법이다.

최근 골프 업계에선 브랜드 바람이 거세다. 잭 니클로스, 그레그 노먼 등 유명 골퍼들이 은퇴 후 코스 설계에 뛰어들고 있는 것. 국내에도 잭 니클로스가 설계한 골프 코스가 3~4곳에 이른다. 송도신도시에도 그가 설계한 골프 코스가 들어설 예정이다.

권 부사장은 “선수 출신은 골퍼 입장에서 설계를 하기 때문에 경기에만 집중하는 반면 비선수 출신은 경기 외적인 면도 종합적으로 판단하게 된다”며 “그렇다고 해서 비선수 출신이 설계한 코스가 무조건 좋다는 것은 아니며 각자 뚜렷한 장단점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갑자기 권 부사장의 골프 핸디가 궁금해졌다. 골퍼들의 심리까지 파악할 정도면 언더파를 치는 아마 고수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 그는 보기 플레이 수준이다. 그는 “상당수 주말 골퍼들이 라운딩을 시작할 때 코스 맵을 보지 않는데, 코스 맵만 제대로 봐도 5타 정도는 충분히 줄일 수 있다. 맵을 보면 코스 공략은 물론 설계자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앞으로 해외시장 개척에 적극 나선다는 생각이다. 중국 베이징 가성골프장(36홀), 하이난 2020플라자(36홀), 베트남 하노이 트윈 도브CC(27홀) 골프장 설계를 맡아 진행 중이다. 국내에서는 음성 드래곤힐스, 여주 나인브릿지, 해남 파인비치, 광주 무등산CC 등 40여 곳의 골프장 설계를 맡아 진두지휘하고 있다.

 “내게는 골프장 필드가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죠”
권동영

오렌지엔지니어링 부사장

추계예술대 서양화과 졸업

한양대 환경대학원 졸업

골프매거진 한국 10대 코스 선정 위원

글 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 realsong@money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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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09-01-1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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