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이촌동 한강맨션은 1970년 입주 당시에도 ‘사치를 조장한다’는 사회적 비난을 받을 정도로 고가 아파트였다. 부이촌동’이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한 서울 용산구 이촌1동은 한국전쟁 이후 공동주택촌으로는 처음으로 ‘부촌(富村)’으로 성장했다고 봐도 무방하다.원래 한강변 백사장이었던 이곳은 1967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한강변 개발계획에 따라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시작하면서 아파트촌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후 1968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공무원 아파트,한강맨션 등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부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 강남 압구정동에 ‘왕좌’를 물려줄 때까지 동부이촌동은 여의도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부자동네였다.입주한지 40년이 거의 다 돼가는 지금도 서울의 최고가 아파트군(群)에 속해 있는 동부이촌동 한강맨션은 1970년 입주 당시에도 ‘사치를 조장한다’는 사회적 비난을 받을 정도로 고가 아파트였다. 가구별 면적이 92∼181㎡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중·대형 평형으로 이뤄졌다는 점이 국민들에게 이런 인식을 심어준 것. 대한주택공사가 사업을 시행한 이 단지는 건설 당시 도입한 미국식 평면이 지금 봐도 파격적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새롭다. 또 18,28,38동의 경우 전 가구가 한강 조망이 가능해 강남의 부촌들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한강맨션이 1970년대 이후 이 일대를 대표해 온 전통의 명문 단지라면, 원래 공장부지였던 곳을 재건축해 2003년 입주한 GS한강자이는 2000년대 이후 이곳의 대표주자로 떠오른 신흥 명문이다. 허창수 GS그룹 회장, 신상훈 신한금융지주회사 사장 등 재계와 금융계 최고경영자(CEO)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 대기업 및 중견기업 오너와 임원들이 대거 거주해 “출입하는 운전기사만 200명을 넘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동부이촌동은 사실상 1980년대 들어 강남에 최고 부촌자리를 완전히 빼앗겼다. 그렇지만 왕좌의 자리를 되찾아올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용산 국제업무지구 개발, 미군기지 이전 후 용산공원 개발 등 이 동네의 프리미엄을 부각시켜줄 호재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어서다.다만 변수는 있다. 동부이촌동 일대를 비롯한 용산권의 교육 인프라가 개발이 마무리될 것으로 보이는 2020년까지 강남 수준을 좇아가기 어려울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집값에 있어서 주변 교육 인프라가 갈수록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동부이촌동의 장점은 상쇄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동부이촌동 일대에는 ‘일본어 상담 가능’이라는 간판이 붙은 부동산 중개업소들이 유독 많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통에 가까운 이자카야(선술집), 라멘집들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리틀 도쿄’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곳이 바로 동부이촌동이다.이 일대에 이처럼 일본 상점들이 많은 이유는 이곳에 거주하는 일본인만 1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표적인 일본인 집단 거주촌이기 때문이다. 동부이촌동으로 일본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직후로 추정된다. 이곳이 일본인 집단촌이 된 데는 도심으로 진입하기 편리한 교통과 쾌적한 주거환경 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동부이촌동에 일본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시간대는 아침 7시 무렵과 오후 2시대다. 이곳 학부모들이 오전 7시쯤 강남구 개포동에 위치한 일본인 학교에 아이들을 태워 보내기 위해 스쿨버스역 근처로 모여들었다가 2시께 하교하는 아이들을 마중하기 위해 다시 몰려나오기 때문이다. 이곳 부동산 중개업소 관계자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네라는 특성 때문에 상점 부동산중개업소 가운데도 일본어로 소통이 가능한 곳들이 많다”고 귀띔했다.동부이촌동 한강맨션 개요주소: 서울 용산구 이촌동가구당 면적: 92-181㎡입주년도: 1970년 12월가구당 주차대수: 2.2대건설사: 대한주택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