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강 하구에 있는 경남 하동군 악양면이 문화예술인들의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곳은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지역으로 매년 토지문학제가 열리는 문학마을로도 유명하다. 악양이라는 이름도 중국의 후난성 동정호의 동쪽에 있는 ‘위에양(岳陽)’처럼 풍치가 뛰어나서 붙여졌다. 두보(杜甫) 범중암(范仲淹) 등 유명한 시인들이 악양루에 올라 명시를 남겼듯이 작가 박경리는 이곳 악양을 배경으로 토지라는 대하소설을 썼다.악양면은 토지에 묘사된 대로 마을 입구부터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그 주변을 형제봉을 비롯한 지리산 봉우리들이 감싸 안고 있다. 인구 3800명이 사는 조그만 마을인 악양면은 예로부터 ‘사람살기 좋은 곳’으로 평판이 높은 곳이다. “거지가 가을에 악양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면 봄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풍족하고 인심도 후하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지역이어서 외지 문화에 배타적이지 않고 마을사람들도 이방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어주는 곳이다.이곳에 문화예술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대 초반. 섬진강과 지리산 자락이 어우러진 수려한 자연경관과 풍부한 인심으로 사람살기 좋은 동네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부터다. 악양면에는 최근 7∼8년 사이에 100명이 넘는 외지인들이 터를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상당수가 문화예술계 사람들이라는 게 하동군의 설명이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은퇴시기에 귀농을 선택하지만 이들 문화예술인들은 30∼40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악양에 둥지를 틀었다.사진작가인 이창수 씨도 이 시기에 하동에 정착한 초기 귀농인중 한 사람이다. 그는 2000년에 하동에 왔다.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 씨는 “인생의 절반을 도시에서 원 없이 살았으니 나머지 인생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보자고 생각했다”며 “비교적 품이 덜 드는 차 농사를 짓기로 하고 하동에 머물면서 원주민들에게 농사를 배웠다”고 말했다.그는 이곳에서 땅 3만3000㎡(1만 평)를 사들여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녹차 매실 감 등 이 지역의 특산물이 그의 작물 품목이다. 이 씨는 “서울에서 내려와 시골에서 살아가려면 그 지역 사람들이 짓는 농사를 꼭 지어야한다”며 “그래야 농촌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교류를 하면서 동화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씨는 농사 외에도 순천향대에서 포토저널리즘을 강의하고 매주 중앙선데이에 작품을 기고하는 등 본업인 사진작가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올 들어 크게 화제가 된 지리산 학교도 그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지난 5월 개교한 지리산 학교는 이 지역에 정착한 예술인들이 강사로 나서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일종의 교양프로그램이다. 강사가 해당 분야의 저명한 인사들이어서 하동 남원 순천 등 인근지역은 물론 천안 대전에서까지 수강생들이 오고 있다. 현재 10여 개의 과정이 개설돼 있다. 여성 산악인 남난희 씨의 숲길걷기반, 도예가 류대원 씨의 도자기반, 시인 이원규 박남준 씨의 시문학반 등이 대표적이다. 지리산 학교는 조만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방과 후 교육프로그램도 운용할 계획이다.지리산 학교에서 그림반을 맡고 있는 오치근 화백도 하동 생활 6년차인 중고참 귀농인이다. 섬진강 매화꽃을 그리러 이곳에 왔다가 아예 눌러앉은 그는 “지금은 서울에 갔다가도 돌아오는 차안에서 섬진강을 보면 비로소 안도감이 든다”고 말할 정도로 하동사람이 다 됐다.그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곳에 집을 짓고 자연과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오 화백은 “시골에 살면 다른 사람과 교류도 적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며 “서울에 있을 때는 서로 바빠서 못 만나지만 이곳에 있으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아 온다”고 말했다.오 화백은 하동에 살지만 일을 하는 데 불편함은 전혀 없다고 했다. 그는 주로 출판사로부터 하동의 전설을 그린 그림을 주문받아 작업을 한 후 서울로 보내준다. 간혹 전문적인 정보 교류나 업무처리를 위해 서울에 가야하지만 하루 이틀만 지나도 머리가 아프고 피곤해 되도록 빨리 돌아온다. 그는 “아이들에게도 시골의 추억을 주는 게 정서적으로도 좋을 것 같아 이곳에 정착을 했다”며 “이곳에는 노래 영화 글 그림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예술인들이 골고루 숨어서 자기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아마추어 사진작가 겸 생태전문가인 이성오 씨는 마을 이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정도로 완전히 하동군민이 됐다. 스스로를 생계형 귀농자라고 밝힌 그는 차 농사꾼이면서도 악양의 시장에서 ‘조화선방’이라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두부와 책을 팔고 있다. 또 ‘지리산과 섬진강사람들’이라는 시민단체에서 생태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 씨는 “섬진강과 지리산의 매력에 반해 이곳에 정착을 했다”며 “하동은 물자가 풍부하고 텃세가 없어 외지인들이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농사만 지어서 자립하겠다고 온 귀농자들은 대부분 실패했다”며 “대규모로 농사를 짓지 못할 상황이라면 다른 생계수단이 있어야 정착을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문화예술인들이 악양에 몰리면서 인구 3800명의 이 마을의 땅값도 최근 5∼6년 사이에 2∼3배나 뛰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땅을 사려면 3.3㎡당 10만 원은 줘야한다.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이 악양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데는 하동군의 지원도 한몫을 하고 있다. 하동군은 소설 토지의 고향인 이곳을 문화예술 마을로 가꾸고 많은 예술인들을 유치하기 위해 귀농 예술인을 대상으로 창작지원금을 지원해주고 예술인들이 모여 사는 예인촌을 조성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특히 매년 10월에 열리는 토지문학제 행사를 더욱 확대하면서 하동군을 ‘문학수도(文學首都)’ 로 선포할 계획이다. 조유행 하동군수는 “악양의 최 참판댁을 찾는 관광객이 1년에 40만 명이나 된다”며 “하동의 문화적 요소를 적극 활용해 하동을 문화예술인들의 공간으로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1 지리산 형제봉 자락에 자리잡은 이창수 작가의 집.2 이창수 작가가 녹차를 따르며 환하게 웃고 있다.3 이창수씨 집에 놀러온 아이들은 낯설은 사람에 대한 경계가 없었다.4 귀농인들이 악양면 사무소에서 친환경 화장품 만들기 강의를 듣고 있다.오치근 화백 가족 뒤로 집이 보인다.구재봉에서 내려다 본 악양면과 평사리 평야글 김태완· 사진 이승재 기자 tw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