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제 56호 (2010년 01월)

팝아트의 슈퍼스타 Andy Warhol

기사입력 2010.01.13 오전 10:21

팝아트의 슈퍼스타 Andy Warhol

“팝(Pop) 아트는 대중적이고, 일시적이며, 재치있고, 전략적이며, 섹시하고, 젊다.” (리처드 해밀턴)


팝아트의 슈퍼스타 Andy Warhol
팝아트의 슈퍼스타 Andy Warhol










앤디 워홀(Andy Warhol,1928~87)은 팝 아트의 슈퍼스타였다. 20세기 국제적인 금융, 예술, 상업의 도시 뉴욕에서 예술가도 살아서 스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일대 사건의 주인공이자 예술을 대중화시키고 아트를 상품으로 평가 절하하는 동시에 무한한 부의 가치로 환원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사업을 잘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이다”라고 말하였다. 뉴욕의 예술계는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워홀에 대한 관심은 불꽃처럼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 예술의 중심지는 더 이상 파리가 아니었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유명 화랑들이 뉴욕에 앞다투어 들어섰고, 이곳에서 세계 미술품 가격을 결정하였다. 윌리엄 드 쿠닝과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소위 추상표현주의가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미술의 선두주자 위치를 굳건히 지키던 유럽은 뉴욕으로 그 자리를 내 주어야만 했다. ‘예술이 곧 삶이고, 삶은 예술이다’를 모토로 내건 팝 예술가들은 일상소품에서 조형 모티브를 찾았고, 앤디 워홀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워홀의 유년시절

앤디 워홀(본명은 Andrew Warhola)은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체코슬로바키아계의 가난한 이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직 광부였고, 어린 워홀은 2차 세계대전의 불안과 경제적 암울함 속에 도시의 소외된 빈민구역에서 기죽고 소심한 소년으로 자랐다. 비위생적이고 소란스러운 좁은 골목과 널린 빨래 때문에 창문이 보이는 날이 없는 낡은 집. 하얗게 야윈 얼굴의 소년 워홀은 이처럼 열악한 환경속에 자아를 형성해 나갔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워홀의 그리기 능력은 남달랐다. 워홀의 재능을 간파한 선생님은 그가 카네기 미술관에서 주관하는 미술 강좌를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고등학생이 된 워홀은 그림 외에 또 다른 관심사가 생겨났다. 바로 영화였다. 워홀은 당시에 이미 여배우 셜리 템플의 사인을 소장하고 있었고, 그 후 일생에 걸쳐 수많은 스타의 소품을 수집하였다. 그의 영화사랑은 후에 스스로 영화제작을 하고, 실크스크린 작업으로 리즈 테일러, 마릴린 먼로 같은 배우들의 초상화를 제작하는 식으로 이어졌다.

스타의 꿈

워홀은 1945년 피츠버그 카네기 멜론 공과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1947년 단돈 200달러를 들고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에서 몇몇 광고 잡지에 일러스트를 선보인 뒤 기발한 콘셉트와 기법으로 주목을 끌기 시작하여 오래지 않아 <보그> <하퍼스 바자> <뉴욕커> 같은 대형 잡지사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하게 된다. 초기의 일러스트 중에서 널리 알려진 그림으로는 일련의 구두 그림을 꼽을 수 있다. 잉크 얼룩을 느슨하게 이용한 그 드로잉은 워홀을 단번에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그는 여러 상을 거머쥐고, 1956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드로잉 작품이 전시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의 나이 불과 28살 때의 일이다.

팝아트의 슈퍼스타 Andy Warhol

팝아트의 슈퍼스타 Andy Warhol
하지만 워홀의 꿈은 디자이너가 아닌 순수 화가였다. 그를 세상에 알리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실크스크린 기법의 대량 복제화였다. 그것은 캔버스 위에 코카콜라나 캠벨 수프 같은 일상의 상품에서부터 할리우드의 스타 마릴린 먼로와 존 F. 케네디와 부인 재클린 케네디 등 명사들을 캔버스 위에 옮겨 산업사회의 대량생산과 소비를 냉소적으로 풍자한 작품이었다. 워홀은 이런 이미지를 한 번에 수백 점씩 대량으로 찍어내었다. ‘공장에서 제품 찍어내듯이’ 찍어내는 그의 실크스크린 작업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스타가 되고 싶은 워홀의 꿈이 한 발짝 더 가까이 실현되고 있었다.

드라셀라, 앤디 워홀

워홀은 친구들로부터 <드라셀라(Dracella)>라는 별명을 얻었다. <드라셀라>는 드라큘라와 신데렐라를 합쳐 만든 신조어로 그의 이중적인 성격과 뉴욕 예술계의 스타적 삶이 압축되어 들어있다. 그는 말없고 수줍음 많고 세심하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속임수에 능한 자질을 가졌기 때문에 드라큘라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현대미술의 스타라는 점에서 신델레라적이었다.

평소 워홀은 “훌륭한 그림에 관한 나의 아이디어는 유명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라든가 “미국이 기가 막히게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장 부자도 가장 가난한 사람도 똑같은 물건을 살 수밖에 없는 전통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누구나 텔레비전을 볼 수 있고, 누구나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다. 대통령도 리즈 테일러도 코카콜라를 마신다”라는 말을 했다. 또 “나는 매일 같은 일을 한다. 내 일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최대한 많이 그림을 생산하도록 노력한다”는 말도 남겼다. 이런 말들로 표현된 그의 예술관은 그가 전 미국을 들썩이게 하고 나아가 세계적 스타가 되게 한 최고의 자산이었다.

새로운 시도

워홀은 1950년대 말 이미 뉴욕 최고의 상업디자이너로서 명성을 누리더니 드디어 1957년 29세의 나이로 ‘앤디 워홀 엔터프라이즈’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업은 그의 든든한 인적 구성으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워홀의 어머니 줄리아 워홀라는 인쇄된 실크스크린에 아들 워홀 대신 사인을 하였고, 조수인 네이선 글럭은 프로젝트 수주를 담당했다. 작업실에 놀러온 친구들과 손님들도 동원되기도 하였는데, 워홀은 이들을 ‘컬러링 팀’이라고 부르며 인쇄물의 색상 작업을 맡기기도 하였다. 워홀은 ‘오리지널’이라는 개념에 크게 고민하지 않은 듯하다. 그 일례로 고객 증정용 판화 <샘이라는 이름의 고양이 스물다섯과 푸른 고양이 하나>를 제작했는데, 모두가 앞쪽 특정번호를 원하자 작품 전체에 같은 에디션 번호를 매겨 이 화보가 몇 권이 나왔는지 아무도 모를 정도였다. 예술작품 컬렉터들은 유일한 작품을 소유한다는 자부심을 갖게 마련인데 워홀은 이마저도 무시한 새로운 도전을 한 것이다.

작업의 모티브

워홀은 맨해튼 작업실에서 캔버스에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하여 다양한 모티브를 캔버스에 담기 시작한다. 끔찍한 교통사고 현장이나 해골, 전기의자가 등장하기도 했고, 마릴린 먼로나 리즈 테일러,제임스 딘, 엘비스 프레슬리도 즐겨 채택하는 모티브가 되었다. 뉴욕타임스에서는 연일 스타들의 사생활이 보도 되었다. 제임스 딘의 요절, 리즈 테일러의 지병과 여러 명의 남편, 마릴린 먼로의 죽음 등이 워홀에게는 모두 작업의 훌륭한 모티브였다. 한편,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돈이라는 주제는 워홀에게도 흥미로운 대상이었다. 워홀은 여러 가지 돈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캔버스에 가득 2달러 지폐 이미지를 실크스크린기법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는가 하면, 코카콜라 병의 이미지를 통해 미국 문화의 단면을 투영하기도 하였다.

워홀의 작품가운데 <캠벨 수프> 깡통 이미지는 1961년 말에 탄생했다. 대량생산되어 반듯하게 진열된 캠벨 수프 깡통의 이미지는 이듬해 7월 로스엔젤레스 피러스 미술관에서 소개되고 유럽으로 순회전을 개최하면서 워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팝아트의 슈퍼스타 Andy Warhol
워홀의 ‘팩토리’

워홀은 1965년 뉴욕 맨해튼 남쪽 231 이스트 47번가 5층의 넓은 작업실로 이사한다. 워홀은 이곳을 ‘팩토리(Factory)’라고 이름 짓고 다양한 예술가들을 불러 모아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 낸다. 이 공간은 작업실이면서 영화촬영장, 주거공간이기도 하였다. 팩토리에는 매일 새로운 인물들이 드나들었고, 워홀은 자신만의 독특한 패션코드가 필요했다. 워홀은 어린 시절, 유전병인 신경질환을 자주 앓았고, 색소결핍증으로 피부와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해버린 탓에 일찍부터 은빛 가발을 썼다. 검은 색 폴라 스웨터에 청바지와 가죽점퍼, 선글라스 등은 워홀의 이미지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됐다. 특히 워홀의 가발은 후에 자화상 시리즈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기도 하였다.

워홀은 웬만해서는 참석할 수 있는 범위의 모든 파티와 대중적인 사건을 놓치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때로는 대역을 통해 등장하길 좋아했다. 첫 번째 사건은 워홀이 <첼시의 소녀들>로 영화제작자로서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것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였고, 두 번째는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몇 차례 강연을 마친 후였다. 점차 지루해진 그는 앨런 미첼에게 자신의 대역을 맡기고 해야 할 일들을 넘겨주어 워홀 행세를 하도록 하였다. 워홀다운 이 두 사건은 결과적으로 큰 소동을 일으켰다. 워홀처럼 보이기는 아주 쉬웠다. 이를 위해 워홀은 자신의 대역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형적인 워홀패션으로 꾸미고 검은 안경과 은빛가발까지 씌웠다. 참으로 앤디 워홀다운 발상이 아닌가.

앤디 워홀은 새로운 종류의 스타였다. 창작자 제작자 배우를 겸했던 그는 우리에게 미술세계의 우상을 제공함으로써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뛰어난 사업가이기도 했던 그는 정의하기 어려운 그의 재능을 매매함과 동시에 ‘팩토리’ 작업실에서 일하는 18명의 조수들, 일명 ‘소년들과 소녀들’의 대표자 역할을 통해서 자신을 매매했다. 워홀은 “예술은 근본적으로 금전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획득한다”라고 했는데 결국 사업과 예술을 매혹적으로 결합하여 20세기 예술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워홀의 시련

팝아트의 슈퍼스타 Andy Warhol
워홀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968년 6월 3일, 팩토리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수많은 워홀영화에 조연을 맡았던 극단주의적인 여성주의자 발레리 솔라나스가 팩토리에서 작업하던 워홀을 저격한 것이다. 워홀은 생명이 위독한 상태로 병원에 후송됐고, 뉴욕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언론매체는 흥분에 휩싸였다. <뉴욕포스트>는 1면 기사에 ‘앤디 워홀, 위독’이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희생자와 가해자의 사진을 나란히 실었다. 솔라나스는 구속 후 정신이상으로 진단받고 병원에 강제로 입원됐다.

범행 동기는 워홀이 영화에서 여성을 폄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워홀의 부상은 점차 호전되었고, 9월에는 팩토리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하지만 부상의 후유증으로 평생 코르셋을 착용했고, 또 솔라리스가 자신을 암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워홀은 다시 자신의 회화와 실크스크린 작품 제작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조수들에게 맡기는 분량도 늘어갔다. 워홀은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를 발견한 후 팩토리의 일상을 열심히 영상으로 담기 시작했다.

팝아트의 슈퍼스타 Andy Warh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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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 아트의 신화

워홀은 갈수록 쇠약해져 갔다. “나는 항상 기계이기를 바랐다”던 워홀은 담낭질환을 앓고 있던 1987년 2월 자신이 제작한 <최후의 만찬>전시회 오프닝에 참석차 이탈리아 밀라노로 향했지만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곧바로 뉴욕으로 돌아왔다. 워홀은 2월 20일 뉴욕종합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지만 합병증이 발생해 다음날 아침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앤디 워홀을 애도하기 위해 뉴욕 세인트 패트릭 성당에서 열린 추모미사에는 2000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죽음이 그를 덮쳤을 때 의심의 여지없이 앤디 워홀 자신은 팝아트의 신화가 되었다. 그는 6개의 각기 다른 자화상 연작을 제작하면서 확실한 슈퍼스타가 되었고, 1981년 미키마우스와 엉클 샘, 슈퍼맨 같은 미국인의 신화 속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글·사진 최선호(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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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시 : 2010-01-1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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