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일본처럼 유럽 대륙에도 수세기 동안 치열하게 싸우고 앙숙으로 남아있는 나라들이 있다. 서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 영국과 프랑스다.

두 나라의 앙금의 역사는 오래 거슬러 올라간다. 백년전쟁을 시작으로 그 이후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두 나라의 자존심 대결의 역사를 그림 속에서 살짝 찾아보자.

존 싱글턴 코플리(John Singleton Copley), <페어슨 소령의 죽음, 1781년 1월 6일>(The death of major Peirson, 6 January 1781), 1783년, 영국 런던 테이트브리튼 미술관 소장

런던의 테이트브리튼 미술관에는 유난히 근대 영국 역사화가 많은 편이다. 그중에서도 엄청 큰 규모로 눈에 들어오는 그림이 있는데, 바로 <페어슨 소령의 죽음, 1781년 1월 6일>이라는 그림이다. 그림 중앙에 크고 자랑스럽게 펄럭이는 영국 국기가 보인다.

그리고 깃발 밑에 축 늘어져 있는 시체 한 구도 눈에 띈다. 바로 스물세 살의 꽃다운 나이에 전쟁터에서 죽은 영국의 페어슨 소령이다. 마치 성화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져 죽는 장면과 자세가 비슷하지 않은가.

화가인 존 싱글턴 코플리가 일부러 의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페어슨 소령의 죽음을 성스럽게 미화시켜 영국군의 거룩한 승리를 표현해야 했으니까. 페어슨 소령 바로 뒤에서 그의 흑인 하인이 총을 들고 주인의 복수를 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도망치고 있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은 라파엘로의 성모와 아기예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영국령이었던 저지 군도로 소규모의 프랑스군이 쳐들어왔다. 그들은 영국군 총독에게 섬을 넘길 것을 요구하고, 영국 수비대와 민병대는 반격을 시도했다. 이때 전열을 가다듬던 페어슨 소령이 마지막 공격 중 프랑스군의 총에 맞아 전사한다.

그리고 그의 흑인 하인이 바로 그 프랑스 군인을 총으로 쏴서 죽여 주인의 복수를 한다. 이윽고 영국군은 페어슨 소령의 거룩한 희생 아래 분연히 싸워 승리를 거두게 됐다.
페어슨 소령의 죽음, 1781년 1월 6일
페어슨 소령의 죽음, 1781년 1월 6일
재미있는 사실은 이 그림이 그려진 시절이 영국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치욕의 시기였다는 점이다. 미국 대륙의 13개 영토를 식민지로 삼아 인디오들을 탄압하고 총독을 보내 통치하던 영국이지만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사정이 달라졌다.

당시 영국은 식민지인 미국에 세금을 엄청 물려대고 있었다. 설탕, 당밀, 소금, 차 등에 전부 관세를 부과하고 하다못해 신문, 트럼프카드까지 세금을 부과했다고 하니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에 동양척식회사를 세웠던 일본이 생각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사람들이 비싼 세금에 불만을 품고 영국산 차 불매운동을 시작하자 영국이 미국인들의 직접 차 수입을 금지하고 영국이 운영하는 동인도회사에 독점권을 부여했다. 결국 영국이 미국에 독점으로 팔아 막대한 이익을 올리려 한 것이다.

열 받은 보스턴 시민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시민들이 밤중에 인디오로 분장하고 동인도회사 배로 쳐들어가서 차가 담긴 상자를 깨부수고 전부 바다로 던져버린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이 독립을 위한 전쟁을 선언하고, 앙숙이었던 프랑스는 당연히 미국편을 들어주었다. 프랑스는 군대까지 파병해서 미국을 적극 지원했고 영국군은 미군과 프랑스군에게 차례로 참혹하게 깨졌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어쩌구저쩌구 하던 영국으로서는 큰 손실과 치욕을 입었다. 이 독립전쟁이 거의 미국의 승리로 끝나갈 무렵, 이 그림에서 나온 전투가 있었던 것이다.

즉 미국과 프랑스에 엄청나게 깨지고 저 코딱지만한 섬에서 프랑스한테 한 번 이긴 걸 억지로 찾아내서 저렇게나 웅장하고 장엄한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었다.

영국인들 특유의 자존심과 애국심이 고집스러울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더 놀라운 건 화가인 코플리가 애국심이 투철한 영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골수 영국 충성파로서 독립전쟁 얼마 전에 영국으로 건너와서 평생 영국에서 여생을 보냈다. 우리나라로 치면 친일파라고 대대손손 욕먹을 입장이다.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옛 영국의 로스트비프-칼레의 문>(The roast beef of old England-“The gate of Calais”), 1748년, 영국 런던 테이트브리튼 갤러리 소장

같은 테이트브리튼 미술관에 걸려있는 <옛 영국의 로스트비프-칼레의 문>을 보자. 영국의 대표 풍속화가인 윌리엄 호가스의 그림이다. 그림 제목처럼 가운데 떡하니 커다란 로스트비프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다. 고기 마니아인 나로서는 제일 처음 드는 생각이 ‘단면을 보니 대충 레어 미디엄이군’, ‘저거 몇 인분일까’이다.

힘겹게 고기를 운반하고 있는 남자 옆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건 얼마나 먹었는지 기름이 좔좔 흐르는 살찐 수도사. 정말 인격만큼 배가 나왔다. 지나가는 군인들은 너무나 간절하고 불쌍한 눈빛으로 로스트비프 덩어리를 바라보고 있다.

저거 한 입만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병사들 손에 들려있는 건 멀건 수프그릇뿐. 다른 병사들이 들고 가는 수프냄비를 보니 고기 딱 한 점 떠있다. 저런 것만 먹고 어떻게 전쟁을 할까.
옛 영국의 로스트비프-칼레의 문
옛 영국의 로스트비프-칼레의 문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이 그림의 부제다. 부제에 등장하는 칼레는 프랑스의 항구 도시다. 영국 화가인 호가스가 왜 프랑스의 도시 칼레에서 프랑스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을까.

바로 프랑스 혁명 당시 가난하고 부패했던 프랑스 사회를 마음껏 비웃어주기 위해서였다. ‘너희들은 가난해서 멀건 수프만 먹지만 우리 영국은 고기 맘대로 먹는다.’ 마치 도시락 반찬 갖고 자랑하는 밉살맞은 아이 같기도 하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의 시작으로 인해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했고, 프랑스는 가난한 민중들이 프랑스 혁명을 일으킬 정도로 굶주리고 있었다. 호가스는 이런 프랑스의 현실을 풍자하고 비웃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프랑스 요새를 몰래 스케치하다 적국의 스파이로 몰려 나중에 체포되기도 했다. 프랑스인들 입장에서 보면 진짜 호가스가 얄미웠을 것이다.

그 앞 골목어귀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더 가관이다. 왼쪽엔 가오리 한 마리 놓고 모여 앉은 여자들. 당시 영국에서는 가오리는 그야말로 줘도 안 먹는 생선, 다시 말해 정말 최하위급 음식이었다고 한다.

건너편엔 사과 하나 놓고 앉아 기도하는 남자도 보인다. 꼭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그렸어야 했나 싶지만 두 나라가 역사적으로 오랜 앙숙이었고 이해관계가 얽혀있으니 이것 역시 나름 자국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오늘날 영국과 프랑스의 음식 문화를 비교해 보면 모두가 영국은 제대로 된 음식이 없다고 비웃는다는 점이다. 프랑스가 미식가들의 천국인 반면에 영국은 로스트비프랑 피시앤드칩스(튀긴 생선과 감자)밖에 없다고들 비웃곤 하니까.

강지연

교사. <명화 속 비밀이야기>, <명화 읽어주는 엄마> 저자.
네이버 블로그 ‘귀차니스트의 삶(http://blog.naver.com/oilfree07)’ 운영. oilfree0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