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날씨에는 일반적으로 식욕이 없게 마련이지만, ‘폭식’이란 단어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 죄책감 비슷한 것이 드는 까닭은 왜일까. 한참 식욕이 없어 깨작거리다가도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보면 또다시 과식하고야 만다.

그래서 먹기 전엔 기분 좋았다가 먹고 나면 기분 나빠지는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이 말에 수긍이 갈 것이다. ‘적당히 먹어야지. 적당히’ 하면서도 인간이란 유혹에 약한 존재인 것을. 개인적으로 잘생기고 멋진 이성이나 황금이 쌓인 보물 상자의 유혹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음식의 유혹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먹을 것이 없어 문제였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은 어떤가. 먹을 것이 넘쳐 나다 보니 이젠 뭘 먹을까가 주된 관심사다. 지구 다른 한쪽에서는 아직도 굶주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지만 가족 외식에서 뷔페 레스토랑의 비중이 커지고 있는 요즘 실정을 보면 자신의 평균치 식사량을 넘어서는 과식이나 폭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쯤 경험해 봤을 만한 일이다. 뷔페에 돈 내고 들어가 평소만큼 먹자니 어쩐지 억울한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일까.

탐식 (貪食)에 대한 문제는 오늘날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중요한 죄악으로 다루어졌다. 1995년에 브래드 피트를 확고한 스타덤에 올려놓았던 영화 <세븐>에서는 단테의 <신곡>에 명시된 일곱 가지 죄악으로 인해 살해되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당시 중학생이었던 필자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장면 중 하나가 탐식이라는 죄로 인해 강압적으로 위가 찢어질 때까지 먹고 죽은 남자의 시체다.

이러한 주제를 명화 속에서 주로 다룬 화가가 있었으니, 바로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던 네덜란드의 풍속화가, 피터 브뢰겔(Pieter Bruegel the Elder·1525~69)이다.

피터 브뢰겔, <식도락의 마을>(The land of cockayne), 1566년,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소장

이 그림의 제목을 우리말로 옮긴 몇 가지의 해석이 있다. ‘환락경’,‘향락의 땅’,‘게으름뱅이의 천국’ 등. 모두 다소 의역이 들어가 있는데 그중에서 <식도락의 마을>이라는 제목이 그림에 가장 잘 어울린다 생각한다. 원래 ‘cockayne’이란 단어가 주는 의미는 보다 포괄적인 향락이지만 그림에서 표현된 것은 그중에서 절정인 식도락(食道樂), 즉 탐식의 쾌락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림 속 마을을 자세히 보면 먹을 것 천지다. 일단 배경부터 보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강물의 색깔이 하얗게 그려진 것은 물이 아니라 우유이기 때문이다. 강 옆에 펼쳐진 산들은 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림의 오른쪽 위편을 보면 이 산의 터널에서 막 기어 나온 남자가 한 손에 뭔가 들고 매달려 있다. 남자가 손에 든 것은 국자인데 식도락의 마을에 와서 국자로 실컷 음식을 떠먹을 준비를 하고 열심히 터널을 기어 나온 것이다. 물론 터널을 지나오면서도 국자로 실컷 벽을 긁어먹고 죽으로 배를 채우지 않았을까.
[강지연의 그림읽기] 貪食에 대한 유쾌한 풍자
마을에는 온통 음식들이 널려 있다. 지붕 위에도, 나무 위에도 온갖 먹을 것과 마실 것들이 널려 있고 그 밑에는 잔뜩 먹어 배부른 사람들이 누워있다. 나무 밑에 누워있는 세 사람의 옷차림을 보면 그들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다.

붉은 옷을 입고 창검과 철제장갑을 내려놓은 채 누워있는 기사, 농기구를 깔고 옆으로 누워있는 농부, 모피코트를 입고 옆에 성경이나 책을 놓고 있는 성직자(혹은 학자)는 그 시대 각 계층의 사람들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특히 대(大)자로 누워있는 성직자의 얼굴 표정을 보면 감탄과 웃음이 나온다. 어쩌면 이렇게도 배부르고 나태한 표정을 그림으로 잘 표현해 냈는지. 그런데 이 남자, 음식에 대한 미련을 다 버리지 못하고 아쉬운 듯 나무 위 식탁의 음식들을 아직도 쳐다보고 있다. 남자의 얼굴 쪽으로 기울어진 술병에서는 금방이라도 술이 흘러나올 것 같다. 보이지 않는 손이 술을 따라주기라도 하는 것일까.

이 마을 전체가 일종의 뷔페 레스토랑처럼 보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셀프로 가져다 먹는 게 아니라 음식 스스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그림 오른편에 있는 통돼지구이는 자기 몸에 잘라먹을 칼을 꽃은 채 ‘나를 먹어 달라’고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다.

그림 아래쪽에는 칼이 꽂힌 달걀도 발이 달린 채 움직이고 있다. 그림 왼편 지붕 위에는 파이들이 잔뜩 늘어서 있고 그 밑에서 또 한 명의 기사가 입을 벌린 채 파이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모양이다.

이런 마을에 들어간다면 누군들 폭식을 피해갈 수 있을까. 브뢰겔이 나무 밑 세 사람을 각기 다른 계층의 사람들로 그린 것 또한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탐식에 대한 유혹은 인간 고유의 본능이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는 뜻이다.

신분이 높고 낮은 것이 이 마을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누구나 원하는 만큼 먹고 마실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림 속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문득 깨닫게 된다. 아무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이란 끝이 없는 것이라 아무리 채워도 더 바라게 되니까 말이다.

이 그림은 1546년에 안트베르펜에서 출간된 한스 작스(Hans Sachs)의 동명 문학작품을 소재로 그려졌다. 작스는 계몽시인이자 극작가로 탐식과 게으름을 경계하는 내용이 담긴 을 썼다. 그러나 문학작품이 아닌 이러한 그림은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히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당시에 인기 있던 그림들의 소스는 신화나 성경의 내용들이었고 그것을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들이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좋아하던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하고 폭식 후 나태함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그림은 마치 감추고 싶었던 치부를 드러내놓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브뢰겔은 거침없이 다른 사람들이 그리지 않았던 인간 본연의 모습들을 그려냈고 그의 풍자는 날카롭지만 한편으로는 유쾌하게 다가온다.

피터 브뢰겔, <농가의 혼례>(Peasant Wedding), 1568년,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브뢰겔의 또 다른 작품 중 매우 유명한 <농가의 혼례>다. 어느 시골 마을의 결혼식 풍경을 그린 이 그림은 떠들썩한 결혼식 당일 피로연을 묘사했다. 사람들로 꽉 찬 테이블과 바쁘게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도 보인다. 그림 가운데 양손을 마주잡고 앉아있는 신부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먹고 마시기에 여념이 없다.

그림의 왼편에서는 계속해서 술을 따르는 남자,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다 먹은 접시를 든 채 손가락을 빨고 있는 아이, 나르고 있는 파이를 집어 옆으로 바삐 건네고 있는 남자도 보인다. 언뜻 보면 단순한 시골 농가의 결혼식 풍경 같지만, 뭔가 약간 이상하다.

결혼식이 주제라면 신랑, 신부가 주가 돼야 하는데, 그림 속에는 온통 먹고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만 가득 차 있다. 심지어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조차 파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다.
[강지연의 그림읽기] 貪食에 대한 유쾌한 풍자
브뢰겔은 이 그림 안에서도 탐식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 왼쪽 윗부분을 보면 열려 있는 문으로 계속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오고 있다. 자세히 보면 문 옆에는 술병을 통째로 들고 마시고 있는 사람도 보인다.

신랑, 신부의 축하보다 먹을 것이 우선인 사람들, 그림 속 결혼식 풍경을 보고 있자니 뭔가 우리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지 않는지. 요즘에도 결혼식에 가면 신랑, 신부에 대한 축하의 마음으로 식에 끝까지 참석하기보다는 밥 먹으러 가기 바쁜 사람들이 많다.

어느 잔치든 먹고 마시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게다가 그림 속 잔치 음식은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당시 가난하게 살아가던 농민들에게 결혼식 날은 고픈 배를 마음껏 채울 수 있는 귀중한 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들은 어떠할까. 먹을 것이 넘쳐나는 평소 생활에도 불구하고 막상 음식을 보면 더욱 탐닉하진 않는지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된다.

필자 또한 이러한 탐식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몸이기에 이러한 고민은 살아있는 동안 쭉 계속될 것 같다. 폭염은 계절이 지나가면 가시겠지만 그와 더불어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 오면 또 주체 못하는 식욕으로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브뢰겔의 그림을 때때로 보면서 한 번씩 더 생각해 본다. 인간은 ‘본능’에 순응하며 살아가지만 우리에겐 ‘이성’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강지연

교사. <명화 속 비밀이야기>, <명화 읽어주는 엄마> 저자.
네이버 블로그 ‘귀차니스트의 삶(http://blog.naver.com/oilfree07)’ 운영. oilfree0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