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가 신상호 & 장식 성신여대 교수

도예가 신상호의 작업실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있다. 1976년 이곳에 터를 잡았으니 서른다섯 해를 이곳에서 보냈다. 대로에서 벗어난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 칩거하며 작업하기에 그만이다. 해 떨어지면 이따금 개들이 짖는 소리 외에는 적막하기만 한 이곳을 초등학교 동창인 장식 성신여대 조소과 교수가 찾았다.
[Friends] "현대미술은 작가가 아닌 제작자를 원한다"
홍익대 미대 학장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도예가인 신상호 선생의 작업실은 양주에 있다. 꽤 넓은 터에 자리 잡은 그의 작업실은 많은 작가의 부러움의 대상이다. 주변 경관이며 작업 환경이 이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의 작업실을 찾던 날, 초겨울 추위가 옷깃을 여미게 했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곳에 도착하자 육중한 철제 대문이 앞을 가로막았다. 철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별천지가 펼쳐지듯 이국적인 모양과 색깔의 조형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서 기자를 맞은 작가는 2002년 ‘아프리카의 꿈’ 전시 때 제작했던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전시 당시 한국적 샤머니즘을 아프리카 토속미와 결부시킨 작품이라 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1. <Minhwa Horse> , 2010년, 글레이즈드 세라믹, 70×20×50cm(좌), 2. <Minhwa Horse>, 2010년, 글레이즈드 세라믹, 70×18×52cm
1. , 2010년, 글레이즈드 세라믹, 70×20×50cm(좌), 2. , 2010년, 글레이즈드 세라믹, 70×18×5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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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부터 시작한 ‘구운 그림’

조형물을 둘러본 후 작가는 중앙에 자리 잡은 전시실로 기자를 안내했다. 그는 몇 해 전까지 작업실로 쓰던 곳으로 지금은 전시장으로 고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전시장 입구에는 그가 ‘구운 그림(Fired Painting)’이라고 부르는 자기로 된 구운 회화가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도자로 구웠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색채가 눈길을 끌었다.

작가는 흙 안료로 색을 낸 뒤 5~6회 소성 작업을 거쳐 작품이 탄생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작품을 통해 작가는 건축과의 연계를 시도하고 있다. 실제로 작품이 걸린 벽면은 건물이 옷을 갈아입은 듯했다. 작품을 통해 건축에 화려하면서도 영구불변의 색채가 더해지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 시작된 이 작업은 여전히 실험 중이다.
3. <PreDream-Head series>, 2009~2010년, 글레이즈드 세라믹, 각 52×70×90cm
3. , 2009~2010년, 글레이즈드 세라믹, 각 52×70×90cm
, 2009~2010년, 글레이즈드 세라믹, 각 52×70×90cm">전시장을 빠져나와 두 번째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중앙 홀과 작은 서재, 그리고 메인 홀로 이루어진 전시장에는 ‘아프리카의 꿈’ 작품과 ‘구운 그림’ 등이 질서 있게 전시돼 있었다.

황홀한 도예 작품의 숲을 빠져나와 장식 교수와 마주한 것은 그로부터 20여 분이 지난 후였다. 전시장 아래 있는 살림집에 들어서자 장 교수가 그를 맞았다. 조각을 하는 친구는 거실에 진열된 청화백자에 관심을 보였다.


장신(이하 장) : 우리 집에도 신 선생이 만든 분청사기가 하나 있어요.

신상호(이하 신) : 초기 작품인데, 근래 들어 예전 작품을 찾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얼마 전에는 미국 보스턴에 있는 갤러리에서 옛날 작품을 찾더라고. 일본의 한 박물관에서도 찾고.

장 : 나도 얼마 전에 현대미술관에서 옛날 목조 작품을 찾더라고.

신 : 우리도 이제 늙은 거야. 그러니까 이전 작품을 찾지.

장 : 그 도자기가 아마 신 선생이 이천에서 도자기 공장을 할 때 만든 거지. 우리가 초등학교 동창인데, 대학에서 다시 만났거든요. 이 친구는 도예를 하고 나는 조각을 하고. 그때 이 친구가 이천에서 도자기 공장을 했어요. 나도 자주 놀러갔는데. 과는 틀리지만 거기서 흙장난 많이 쳤어요.

신 : 말이 좀 그렇지만 작가에게 ‘장난’은 중요한 겁니다. 다양한 장난을 쳐봐야 새로운 게 나오니까요. 가볍게 느껴지지만 거대한 결과물도 작은 장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천이 그런 터가 돼 준 거죠.
4. <Minhwa Horse>, 2010년, 글레이즈드 세라믹, 그랜드 하얏트 서울
4. , 2010년, 글레이즈드 세라믹, 그랜드 하얏트 서울
, 2010년, 글레이즈드 세라믹, 그랜드 하얏트 서울">
도자기에 빠져 옹기장이가 된 장남을 찾아 이천까지 온 부모님

장 : 도자기 한다고 이천으로 내려간 게 1966년쯤이지.

신 : 그때쯤이지. 선생 따라서 이천 놀러갔다가 방학 때 거기 그냥 눌러 앉았지. 장 교수가 알다시피 내가 장남이잖아. 집에 얘기를 안했더니 장남 없어졌다고 난리가 난 거야. 수소문해서 부모님이 어찌어찌 이천까지 찾아오셨더라고. 그때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

더운 날씨에 소나무 아래서 하얀 팬티만 입고 도자기를 만지고 있는데, 고개를 들어 보니 어머니, 아버지가 서 계시더라고. 가만 놔뒀다가는 이놈이 옹기장이가 되겠거든. 그 길로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 술대접하고 가마를 사준 거야. 졸지에 가마 공장 사장이 된 거지.

장 : 우리 누나가 그때 구운 도자기 하나를 가지고 있어. 오동나무 박스에 넣어서는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해.(웃음) 그때 조그만 승용차도 하나 샀잖아. 그게 나만 타면 고장이 나서 아주 골탕을 먹였더랬지.

신 : 그러다 1976년에 장흥으로 들어왔죠. 홍대 강의도 나가야 하니까 서울서도 가까워야 하고, 작업도 해야 하니까 변두리를 찾아본 거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더욱 사람이 없었어. 도예라는 게 일단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어야 해요.

연기도 많이 나고 작업에 방해가 되니까. 젊을 때니까 돈도 없고. 찾다 찾다 여기까지 왔는데, 와보니까 가격도 싸고 딱이야. 전세금 빼서 이리로 온 거지. 장흥 오면서 장 교수한테도 같이 들어가자고 그랬잖아.

장 : 그랬지. 그런데 아직 총각이라 땅 살 생각을 못했지. 그때 옮겼으면 내 작품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지. 작품이란 게 환경에 따라 많이 달라지니까. 신 선생도 여기 와서 작품이 많아 달라졌잖아.

신 : 지금 와서 보면 많은 변화가 있었지. 도예계에서 이단아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5. <Face>, 2010년, 글레이즈드 세라믹, 66×90×165cm, 그랜드 하얏트 서울
5. , 2010년, 글레이즈드 세라믹, 66×90×165cm, 그랜드 하얏트 서울
, 2010년, 글레이즈드 세라믹, 66×90×165cm, 그랜드 하얏트 서울">
작품 값에 위스키까지 얹어야 구할 수 있던 귀한 작품

장 : 신 선생은 젊어서부터 원체 유명했어요. 찾는 사람도 많았고요.

신 : 우리나라 도예계를 보면 1970년대에서 80년대가 중흥기였어요. 일본 사람들이 한국 도자기에 많은 관심을 보였거든. 내 작품을 찾는 일본인들도 많았고.

장 : 한국에서보다 일본 사람들이 더 많이 찾지 않아? 지금도 그렇지?

신 : 일본 사람들이 워낙 한국 도자기를 좋아하니까. 30대에 선생님 소리를 들었으니까. 내 작품을 사려면 돈도 주고 당시로는 귀한 위스키도 줘야 했으니까.

장 : 아, 그럼. 위스키가 참 귀할 때였지. 신 선생 덕에 나도 위스키 맛을 좀 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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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1981년에 홍대 전임강사로 가면서 흙으로 조각 작품을 했지. 그 뒤 1984년에 코네티컷대 교수로 가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됐죠. 세계적 아티스트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됐고, 1987년 전시회를 갖게 됐죠. 서울 올림픽 당시 문화행사의 하나로 외국 작가들과 함께 ‘현대 도예 워크숍’을 열었죠. 그즈음이 한국 현대 도예의 태동기로 보면 됩니다. 그 과정에서 이단아란 소리를 많이 들었죠.

장 : 솔직하게 말해서 이단아란 틀린 표현입니다. 우리나라 미술계 인사들이 공부가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신 선생 작품은 전통에 반했다기보다는 전통을 발전시킨 거죠. 고려자기와 이조백자가 다른 것처럼 작품의 영역을 넓힌 거예요.

신 : 우리나라 교수라는 분들이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교사는 기본적인 것을 가르치지만 교수는 연구가 기본이 돼야 하거든요. 연구란 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거잖아요. 그런 점에서 아쉬운 점이 많아요.

제가 학장 시절에 교수들하고 한 번 터놓고 얘기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됐습니다. 만약 어떤 분이 저한테 “당신은 어떤 생각으로 작품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지 못 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이자 결과물이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장 : 정리가 되면 그때부터는 작품이 안 되지.

신 : 지금 생각하면 학생들은 너무 많이 가르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길들이지 말라는 말이죠. 스스로 고민하고 깨닫는 게 중요한 거죠. 지금은 교단을 떠났지만 그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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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5년 남기고 작품에 몰두하기 위해 교수직 사퇴

장 : 이 친구 학교 그만둘 때 저로선 참 부러웠습니다. 정년 5년을 남기고 그만뒀거든요. 그런 결단을 내리는 걸 보고 대단한 친구란 걸 새삼 느꼈죠. 저처럼 마음 약한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일이죠. 우리나라 작가치고 홍대 미대 교수직을 내놓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그런 선례도 없었을 겁니다. 사표 냈다는 소식을 듣고 “부럽다”고 했더니 이 친구가 “부러워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더라”며 웃더군요. 작가가 작품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 : 처음 강단에 설 때부터 집사람한테 정년은 채우지 않을 거라고 얘기했습니다. 강단에 서면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이름도 얻으니까 다들 선망을 하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자기 작품을 하려면 학교에 남아서는 안 됩니다. 학생들 가르치고 연구도 하면서 자기 작품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인간의 능력이란 게 한계가 있거든요. 작가와 교수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는데, 저는 작가의 길을 선택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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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 한국의 풍토는 훌륭한 작가가 곧 훌륭한 교수입니다. 그래서 학교를 못 벗어나죠. 하지만 외국에서는 적당히 이름을 얻으면 학교 밖으로 나가서 자기 작품만 합니다.

신 : 제가 그렇습니다. 밥 먹고 자는 시간을 빼면 거의 작품만 합니다. 꿈속에서도 작품 생각을 합니다. 여기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로지 저 혼자인 거죠. 그래도 작품이 있어서 그걸 가지고 노니까 심심하지는 않습니다.(웃음) 그러니까 새로운 작품도 나올 수 있는 거죠. 우스운 얘기 하나 할까요. 2009년 런던에 들렀을 때 데미안 허스트 전시회에 갔어요. 그런데 그놈이 항아리를 만들어서 전시를 하더라고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장 : 외국은 우리와 작업 환경이 무척 다르긴 합니다. 프랭크 스텔라 같은 작가는 그 밑에 작업하는 사람이 200여 명이나 있습니다.

신 : 제가 스텔라의 요청으로 세라믹 작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뉴욕으로 그를 만나러 갔는데 빌딩 전체를 작업실로 쓰고 있었습니다. 코네티컷에도 작업실이 있고, 허드슨 강 주변에 판화만 찍는 또 다른 작업실이 있더군요. 설계는 그가 하지만 작품을 만드는 사람, 그 작품을 파는 로비스트는 따로 있습니다. 작품을 한다고 캔버스 앞에 혼자 앉아서 붓으로 그림 그리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작가가 아니라 제작자가 돼야 하는 거죠. 컬렉션도 예전처럼 좋아서 한다는 건 순진한 발상입니다. 미술 작품도 주식처럼 투자 가치가 있어야 좋은 시대가 된 겁니다.

장 : 예술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장르가 미술 시장입니다. 그걸 따라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실제로 한국 작가 중에 외국에서 인정받는 작가가 몇이나 됩니까.

신 : 우리처럼 나이 먹은 작가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게 자신을 틀 속에 가두는 겁니다. 논리적으로 정리가 안 되더라도 저항하고 반항할 때 비로소 작품이 가능한 거죠. 편안해지면 작품은 끝났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기 위해 이렇게 애쓰는 거죠.
6. <Dream of Africa-Head>, 2006년, 글레이즈드 세라믹, 각 70×40×70cm
6. , 2006년, 글레이즈드 세라믹, 각 70×40×70cm
, 2006년, 글레이즈드 세라믹, 각 70×40×70cm">

식을 줄 모르던 대화의 열기는 집안일을 돕는 아주머니가 차를 한 잔 내면서 잦아들었다. 신 작가는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한 것 같다”며 차를 권했다. 차를 마시며 장 교수는 “나도 좀 있음 정년이야”라며 기대 섞인 듯한 웃음을 흘렸다. 차를 마시고 신 작가는 기자를 작업실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너덧 명의 문하생들이 그가 그린 도안을 보며 채색을 하고 자기를 다듬고 있었다. 두 동으로 된 작업실을 둘러보며 장 교수는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안료 실험에만 1년에 억대를 쓴다는 말이 있다”고 귀띔했다. 장 교수의 말을 들었는지 신 작가는 “그래야 새로운 작품이 나오지”라며 흘리듯 말했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