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에게 프랑스는 와인 여행지 이전에 유럽 여행의 일번지다. 드넓은 땅 덩어리 프랑스를 자동차로 다닌다면 신나지 않겠는가. 최고 제한속도는 시속 130km. 잘 포장된 프랑스 구석구석을 기동력 있게 달려보자. 프랑스의 식도락 체험, 미술 및 건축물 관람, 거기에다 포도밭 관광까지 합치면 프랑스의 진면목을 제대로 살피는 여행이 된다. 보름 일정이 쏜살같이 지난다.

자동차로 달린 투르 드 프랑스
[Winery Tour] 자동차로 돌아보는 프랑스 와이너리 투어
주말은 아무래도 대도시에 머무르는 게 낫다. 축제도 있고 행사도 많기 때문이다. 세 번의 토요일 중에 처음과 마지막 토요일을 파리에서 보냈다. 자동차 운전 욕구도 주말엔 쉬는 게 좋다.

파리 시내를 운전하면 스트레스가 서울보다 몇 배는 된다. 자전거까지 거리로 나와 달리기에 아주 복잡하다. 여행 이튿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샹젤리제에서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거대한 그림자를 제공하는 개선문에선 하프 마라톤이나 10km를 완주한 시민들이 시체처럼 드러누워 휴식을 취했다.

에펠탑은 언제나 만원이다. 밤이나 낮이나 할 것 없다. 에펠탑 관광은 식사 때가 좋다. 구경 후에는 근처에 있는 한식당 우정에서 요기하면 딱 좋다. 우정은 파리 한식당 중에 가장 고급스럽고 또한 가장 비싸다.

파리를 즐기려면 야간에 유람선을 타야 한다. 바토 무슈와 바토 파리지앵, 두 선사가 있다. 교민들 얘기로는 바토 파리지앵이 더 낫다고 해서 이번에도 그걸 골랐다. 허접스런 한국어 번역을 서비스로 내세우는 바토 무슈는 사양한다.

대낮 유람선 투어는 밋밋하다. 디너를 곁들이는 저녁 노선이 인기가 많다. 아주 로맨틱하기 때문이다. 센(Seine) 강을 따라 유유히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배를 타고 강변의 유적을 편안하게 관찰한다.

조명을 수놓은 에펠탑이나 이름 모를 많은 다리를 지나는 동안 샴페인에 이어 레드 와인이 테이블에 놓인다. 잊지 못할 장면을 위해, 두고두고 추억할 거리를 위해 배 안의 사진사가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한 장에 20유로.
도시 오랑주에 있는 로마시대의 고대 극장
도시 오랑주에 있는 로마시대의 고대 극장
보르도의 첫 마을, 생테밀리옹과 포므롤

파리에서 보르도로 달린다. 549.8km쯤 되는 장거리 여정이다. 도심을 벗어나면 시속 150km도 가능하다. 포장이 잘 된 길을 쏜살같이 달린다. 보르도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단숨에 달린다는 한 독일 저널리스트가 생각난다.

오직 기름 넣기 위해서만 쉰다는 그의 얘기는 처음엔 아마도 그가 독일군 출신이었을 것이라 여겼지만, 달리다 보니 지금은 그 말이 믿어진다. 우린 오직 차를 위해서만 쉬었다, 고속도로에서는 적어도.
세잔의 고향 액상프로방스의 명물, 카페 ‘레 되 가르송(두 사내)’
세잔의 고향 액상프로방스의 명물, 카페 ‘레 되 가르송(두 사내)’
서울에서 군산 가는 방향으로 파리에서 보르도를 간다. 벌판에는 밀밭과 유채꽃 밭, 그리고 목초 외엔 별로 없을 정도로 평탄한 지형이다. 제주에 유채가 많아 퍽이나 익숙한 풍경이지만 여기 프랑스 벌판은 온통 유채꽃 밭이다.

노랗다. 프랑스 국기를 다시 만든다면 농업 국가이니만큼 녹색, 갈색, 노란색으로 꾸밀 일이다.

보르도 속으로 들어올 때 맨 먼저 맞이하는 이름은 리부른(Libourne)이다. 생테밀리옹과 포므롤 마을이 유명하다. 이윽고 폭이 제법 있는 지롱드 강을 건너기 위해 퐁타키텐 즉 아키텐의 다리를 건너면 보르도 다운타운이다.

부둣가의 화려한 건축물들이 지난날의 영화(榮華)를 대변한다. 영국의 속국 시절부터 본격 장려된 와인 수출은 보르도를 오늘날 세계 최고의 와인산지로 등장시킨 원동력이다. 그 증거가 바로 지롱드 강변의 멋진 건축물들이다.

보르도에서 멋진 하룻밤을 꿈꾼다면 리젠트 호텔(www.theregentbordeaux.com)이 제격이다. 보르도 전역에서 이보다 더한 곳은 없다. 아침도 맛깔나고, 분위기도 아주 좋다. 차를 타고 보르도 대극장 바로 앞에 있는 리젠트 호텔에 이르는 길은 폼 난다.

한번쯤은 이런 호사를 할 만하다. 자동차 통행이 금지된 시내 한복판이지만, 호텔과의 핫라인을 가동하면 막아서던 둥근 원기둥이 서서히 내려가 통과할 수 있다. 보행자들이 활보하는 보르도의 중심을 승용차를 타고 진입하는 기쁨은 오로지 리젠트 투숙자에게만 주어지니 방값은 그 특혜를 합쳐 산정된다.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된 레스토랑에서의 최고의 정찬
아비뇽 교황청 앞에 거꾸로 서 있는 코끼리 조각품
아비뇽 교황청 앞에 거꾸로 서 있는 코끼리 조각품
보르도는 와인의 도시라서 머무는 기간 내내 와인에만 집중하는 것이 좋다. 메도크 입구에 자리 잡은 골프 뒤 메도크(www.golf-du-medoc.com) 호텔은 합리적인 가격에 안락하고 편리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한 후에 이튿날부터 와인 사냥에 나선다.

보르도 샤토 투어를 마친 기념 쫑파티를 생각한다면, 랑곤의 레스토랑 겸 호텔 클로드 다로즈(www.darroze.com)를 권한다. 양고기나 비둘기 요리의 기름진 입맛을 달래 줄 최고의 와인 리스트가 있기 때문이다.

샤토 라투르, 샤토 마고, 샤토 라피트 로트칠드의 1934년, 1945년, 1962년 등 올드 빈티지가 기다린다. 이번 여행 최고의 와인인 1955년산 샤토 마고 역시 여기서 마신 거다. 가격은 50만 원 상당이다. 이것을 파리 레스토랑에서 마셨다면 10배는 지불해야 할 테지만.

맛도 최고였다. 역시 와인은 움직임이 적어야 하며 현지에서 마셔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소믈리에는 제대로 된 맛을 주기 위해 병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개봉했으며 디캔팅에 따르고 곧 마개로 막아 향기를 보존했다.

틈틈이 조금씩 잔에 따라 주며 시간이 흐르면서 오래된 와인의 향기와 맛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무언으로 안내했다. 참 음식이 맛있다는 친구에게 여기가 ‘미슐랭 별 하나’라고 얘기해 주었더니, 그 의미를 씹어 먹는 것처럼 분명하게 이해하겠다며 좋아했다.

파리 별 하나 레스토랑처럼 멋지거나 위압적인 고전미가 없는 아주 소박한 식당이지만 맛은 기억할 만하며 특히 양고기가 근사했다. 흥겨운 저녁을 마치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음주운전을 하는 일은 여행 전체를 망치는 일이니 여기서 잘 것을 추천한다. 다음 날 프로방스로 가는 길을 1시간 버는 길이기도 하다.

보르도에서 프로방스로 가는 길 역시 392.7km가 훨씬 넘는 정도다. 태양의 지방을 선글라스 없이 운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파리~보르도 구간보다는 보르도~프로방스 구간이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어 더 굴곡지다.

도착 예정지는 아비뇽이다. 세계사 시간에 들었던 아비뇽 유수 사건의 무대다. 아비뇽으로 이르는 여정에도 프로방스는 지중해를 보여주지 않는다. 지중해를 보려면 마르세유까지 남하해야 한다. 아비뇽은 바다에서 멀다.

아비뇽에 다다르기 전에 님(Nimes)이라는 도시가 있다. 주유소 편의점에서 본 과자 포장지에 님과 원형경기장이 그려져 있어 자연스럽게 운전대를 그리로 꺾었다. 철자와 발음이 도무지 연결이 안 돼 물어보니 그렇게 발음을 한다.

‘님스타일의 빵집’이란 구멍가게에서 도너스를 하나 사서 입에 물고 원형경기장을 찾아 간다. 검투사를 만나기 전에 투우사를 먼저 만났다. 스페인이 아닌 프로방스에서도 투우 경기는 전통 있는 놀이임을 님의 원형경기장에 와서야 알게 됐다.

한 블록을 돌아가면 3000년도 더 된 신전이 있는데, 금방 개장한 것 같은 느낌에 깜짝 놀란다. ‘메종 카레’로 불리는 흰 신전은 원형 보전 상태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아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없다.

폴 세잔(Paul Cezanne)의 고향이며 그의 아틀리에가 있는 액상프로방스(Aix-En-Provence)도 빼놓을 수 없는 목적지다. 아비뇽에서 국도를 따라 액상프로방스로 이르는 길이 4월인데도 여러 빛깔로 빛나는 것은 아마도 후기인상파가 느낀 햇빛 조각들 때문일 것이다.

지중해 연안 여기저기에 자라는 뾰족한 사이프러스와 올곧은 소나무, 그리고 늘어진 플라타너스들이 도로에 줄 지어 서 있으며, 들판에는 로즈마리, 라벤더, 유채꽃이 흩뿌려져 있다. 세잔이 매일 오후 어김없이 들러 커피 한 잔을 즐겼다는 카페에선 꼭 차 한 잔 할 일이다.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고생한다면 그 카페 바로 옆 일식집에서 요기할 만하다. 거장에게 휴식을 주고, 영감을 준 공간이 범생이 같은 여행자에게도 쉼의 세례를 베풀지 않겠는가. 반 고흐의 휴식처 아를(Arles)도 들러야 한다.
필자 주먹보다 훨씬 큰 샤토뇌프 뒤 파프 포도밭의 자갈돌
필자 주먹보다 훨씬 큰 샤토뇌프 뒤 파프 포도밭의 자갈돌
아비뇽의 와인, 샤토뇌프 뒤 파프

도로 표지판에서 발견한 오랑주(Orange)는 오렌지가 아니라 ‘오항쥬’로 발음해야 한다. 역시 로마시대의 식민 도시로 로마인들은 여기서 공연되는 여러 연극을 즐겼고, 요즘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상연되고 있다.

유령이 로마시대 때부터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고풍스러운 돌 극장이다. 도시 오랑주는 과일 오렌지와는 무관하나 프로방스의 태양이 어떤 연관성을 부여해 사람들은 헷갈리기 일쑤다. 방향을 바꾸어 아비뇽 대신 호텔로 먼저 길을 잡았다. 여러 도시를 잠시 들리며 도착한 프로방스는 햇빛의 색깔이 무뎌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쉼이 필요했다.

아비뇽에서 가장 맛있는 와인을 맛보려면 샤토뇌프 뒤 파프로 가야 한다. 마을 이름이자 와인 이름인 샤토뇌프 뒤 파프는 ‘교황의 새로운 성’이란 뜻이다. 아비뇽에 갇힌 교황은 주변에 포도밭을 조성했고,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그렇게 전해져 온다.

샤토뇌프 뒤 파프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중심에 호텔이 있긴 하지만 자동차 여행에 걸맞지는 않다고 여겨 오랑주 방향으로 5분 거리에 있는 호텔 소믈레리(www.la-sommellerie.fr)를 골랐다.

프로방스에서의 첫 디너를 기대하며 호텔에서 ‘와인과 구루메 디너’라는 코스를 선택했으나 맛은 별로였다. 프로방스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그 호텔의 음식은 좀 궁색했다. 차라리 샤토뇌프 뒤 파프의 노천카페에 앉아 무명의 와인을 홀짝거리는 편이 더 프로방스답다고 생각한다.
‘이보다 더 숭고한 건축물은 없으리’ 롱샹 마을에 소재한 성당 노트르담뒤오는 건축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걸작품이다
‘이보다 더 숭고한 건축물은 없으리’ 롱샹 마을에 소재한 성당 노트르담뒤오는 건축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걸작품이다
와인 샤토뇌프 뒤 파프는 묵직한 맛이 일품이며 진하고 화끈한 느낌이라서 남성들의 와인이다. 구두 크기의 돌멩이가 가득한 땅바닥에서 어떻게 포도나무가 자랄까 의아하지만, 샤토뇌프 뒤 파프의 밭들은 자갈이 듬뿍 깔린 황량한 토양이 특징이다.

기계가 밭갈이를 해도 사람이 곡괭이질로 마무리를 해야 제대로 김매기를 할 수 있다. 땅이 거칠고 건조하니 잡초 한 뿌리가 빨아들이는 물 분자까지도 아껴야 한다.

오늘날의 아비뇽은 옛날 아비뇽이 아니라며 많은 예술가들이 여름이면 아비뇽 축제에 모인다. 교황청 앞에는 미구엘 바르셀로가 만든 돌 조각품이 인상적이다. 코끼리가 육중한 몸을 코로 지탱하는 이 우스꽝스런 작품을 통해 생동감 넘치는 예술도시로서의 아비뇽을 작가는 주장하고 있으니 올 여름 구경가보자.

글·사진 조정용 <올댓와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