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부자들의 집이 아티스틱해지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고급 인테리어라고 하면 유럽의 앤티크 가구를 떠올렸지만 요즘 척도는 디자이너 가구로 바뀌었다. 모던 디자인의 선두주자 미국과 스칸디나비안 풍의 북유럽 디자이너 이름 몇몇은 읊어줘야 하는 것은 기본. 짙은 갈색의 무겁고 화려했던 앤티크 가구들은 자리를 내주고 그 자리에 ‘모던 내추럴’ 스타일의 디자이너 가구들이 모셔졌다.
디자이너 가구는 단순히 인테리어를 위한 소품이 아니라 작가정신과 미술의 시대 사조를 담은 예술 작품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홈 갤러리로 꾸미고 싶은 주부들은 그래서 디자이너 가구에 열광한다.
디자이너 가구는 단순히 인테리어를 위한 소품이 아니라 작가정신과 미술의 시대 사조를 담은 예술 작품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홈 갤러리로 꾸미고 싶은 주부들은 그래서 디자이너 가구에 열광한다.
동네 카페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플라스틱 소재의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의 의자. 알고 보면 20세기 미국 대표 디자이너 찰스 앤드 레이 임스(Charles & Ray Eames)의 카피들이다. 이 의자는 인테리어 전문 인터넷 카페에서 일명 ‘국민 의자’로 불릴 정도로 인기다.

심플한 디자인에 어떤 인테리어 공간에도 잘 어울리는 데다 카피지만 오리지널 제품의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디자인 덕에 ‘메이드 인 차이나’ 딱지를 붙이고도 날개돋친 듯 주문이 끊이질 않는다. 오리지널 제품의 가격은 70만~80만 원대를 호가하지만 카피 제품은 6만 원대부터 시작된다.

실제 디자이너 가구들의 카피 제품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구 업체 관계자에 따르면 모조품도 등급에 따라 가격 책정이 달라진다고 한다. 매장에 가보니 직원이 직접 오리지널 제품과 카피 아이템을 함께 보여주며 차이가 거의 없다고 강조한다. 소재의 광택이나 의자 다리의 마무리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차이가 나지만 언뜻 보기엔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내추럴하면서도 모던한 분위기의 스칸디나비안 인테리어가 유행하면서 해외 유명 디자이너 가구들로 집 안에 꾸미는 사례가 늘고 있다.
내추럴하면서도 모던한 분위기의 스칸디나비안 인테리어가 유행하면서 해외 유명 디자이너 가구들로 집 안에 꾸미는 사례가 늘고 있다.
디자이너 가구가 이처럼 급격한 사랑을 받게 된 이유는 홍대나 강남 신사동 가로수길의 카페 문화가 다양해진 데에도 한몫한다. 획일적인 분위기의 인테리어는 지양하고 취향 까다로운 고객들을 잡기 위해 막대한 자본을 들여 카페 대부분의 가구나 의자를 유명 디자이너의 것으로 꾸미는 일은 이제 더 이상 흥밋거리도 아닐 정도다. 이러한 디자이너 가구 열풍은 자연히 내 집에도 하나쯤 두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자연미가 느껴지는 조지 나카시마의 롱 체어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자연미가 느껴지는 조지 나카시마의 롱 체어
수천만 원대 테이블이 말해주는 작가주의 정신

한때 돈 많은 사모님들의 사랑방이었던 이태원 앤티크 가구 숍들은 최근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산해진 모습이다. 그 사랑방은 대신 청담동으로 옮겨졌다. 청담 사거리에서 청담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오른편에는 유명 디자이너 가구 숍들이 포진해 있다.

북유럽 디자인의 대가 덴마크 프리츠 한센(Fritz Hansen), 아르네 야콥센(Arne Jacobsen) 등의 유명 가구들을 만날 수 있다. 비트라와 카르텔, 까시나 등 해외 유명 디자이너들의 가구를 독점 수입하는 가구점이 갤러리처럼 손님을 맞고 있다.

매장 관계자는 최근 럭셔리, 하이엔드 아이템을 찾는 소비자층이 넓어지고 있고 무엇보다 집 안 인테리어를 주도하는 가정주부들이 주고객층이라고 밝혔다. 그중엔 선호하는 디자이너 가구를 남편과 함께 꾸준히 찾는 손님들도 많고, 한 디자이너 제품을 꾸준히 모아 ‘컬렉션’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톰 닉슨 의자가 놓인 다이닝 공간. 유니크한 디자인과 작가의 개성을 주방공간에서도 즐길 수 있다.
톰 닉슨 의자가 놓인 다이닝 공간. 유니크한 디자인과 작가의 개성을 주방공간에서도 즐길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디자이너 가구의 가격대는 얼마나 될까. 가격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의자의 경우 수십만 원대에서 디자인의 전설이라 불릴 만한 라운지체어의 경우 1000만 원대 제품까지 다양하다.

2010년 국내에 론칭한 일본의 유명 나무작가 조지 나카시마의 경우 일반 서민들에겐 믿기지 않는 높은 가격대로 화제를 불러 모으기도 했다. 국내엔 이제 막 소개가 됐지만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가 집 안에 유일하게 두는 가구로 소개한 바 있을 정도로 명품 중 명품으로 알려져 있다.

널찍한 나무 상판을 다리 위에 툭 얹어 둔 듯한 테이블이나 나뭇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삐딱한 모양의 롱 체어 등은 재벌가의 큰손 사모님들이 앞 다투어 사들였다는 후문인데 가격대는 무려 수천만 원대를 호가한다.
미니멀리즘 디자인의 대가 재스퍼 모리슨(Jasper Morison)이 디자인한 핼 체어(Hal Chair). 모던한 디자인과 컬러감이 공간에 미학을 더해준다.
미니멀리즘 디자인의 대가 재스퍼 모리슨(Jasper Morison)이 디자인한 핼 체어(Hal Chair). 모던한 디자인과 컬러감이 공간에 미학을 더해준다.
내가 산 의자, 가구가 아니라‘아트 퍼니처’

지난달 강남구 도곡동의 아파트로 이사한 P 씨는 60평형대의 집 안 인테리어를 리모델링했다. 집 안 전체를 고급스러우면서도 내추럴한 콘셉트로 꾸미고 싶었다. 그래서 과도한 장식적 요소나 값비싼 내장재 사용보다는 거실, 침실 등 디자이너 가구를 들였다.

디자이너 가구들의 가격대가 부담스럽긴 해도 공간마다 가구 한 점을 작품 고르듯 골라 들여놓으니 돈 들인 보람이 느껴졌다. 실제로 거실에는 작가 데미안 허스트의 해골 작품이 걸려 있고 바로 그 앞에 아르네 야콥슨의 스완 체어를 놓았다.

P 씨는 “한때 주변에서 열광했던 앤티크나 빈티지 무드의 인테리어는 쉽게 질리는 반면 디자이너 작가들의 가구는 오랜 시간을 두고 봐도 질리지 않는 매력이 있다. 고민하고 구입한 스완 체어도 바우하우스 사조에 영향을 받은 아르네 야콥슨의 대표작이라 들였다.

그게 바로 ‘명품’의 가치 아닌가 싶다”며 디자이너 가구에 눈을 뜨면서 갤러리에 이러한 스타급 디자이너 작가들의 작품전을 친구들과 찾아가 관람하기도 한다고 했다. 일종의 예술을 향유하고 그저 사치 일색이라는 눈총과 비난을 받던 럭셔리 인테리어 소품과는 다른 대우를 받는 이러한 디자이너 작가들의 가구 인기는 실구매자들에게 더없는 면죄부가 되기도 한다.
[Trend Report] 강남 주부들, 디자이너 가구에 꽂히다
단순한 인테리어 소품이 아닌 작품이라는 인식이 커지면서 대를 물려 쓸 수 있기에 디자이너 가구에 꽂힌 이들의 남들보다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 ‘급이 다른’ 소유욕 또한 중요한 원인이 된다. 공장에서 찍어 나온 듯 획일적인 수입 가구 브랜드 대신 작가주의와 미술 사조의 영향을 받은 해외의 유명 아티스트 작품을 소장한다는 것에 자부심과 가치를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에 최근 심플하고 내추럴한 모던 콘셉트의 인테리어가 유행하면서 디자이너 가구가 더욱 각광받기 시작했다. 인테리어 리모델링을 전문으로 하는 디자인 파트너 길연(www.cyworld.com/kilyeon76)의 이길연 대표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 경우 작품을 소장하는 ‘프라이드’가 점차 커진다고 밝혔다.

그는 “전체 인테리어를 진행하면서 다른 공사 비용을 아껴 작가의 테이블 등 가구를 구입한다. 숍에 데려가 전혀 모르는 작가의 가구를 자꾸 보고 공부하게끔 안목을 키워준다. 망설이며 구입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에 만족하는 고객들이 대부분이다” 라고 덧붙였다.
에드워드 바버(Edward Barber)와 제이 오스거비(Jay Osgerby)가 디자인한 팁 톤 체어(Tip Ton Chair). 인체공학적인 디자인이 특징이다.
에드워드 바버(Edward Barber)와 제이 오스거비(Jay Osgerby)가 디자인한 팁 톤 체어(Tip Ton Chair). 인체공학적인 디자인이 특징이다.
비움과 절제로 통용되는 ‘로하스 인테리어’의 글로벌 트렌드에도 안성맞춤이다. 편안해 보이는 원목 바닥재에 유명 사진작가의 그림이 걸려있는 벽면의 거실 한 코너에 놓인 디자이너 체어는‘갤러리’처럼 집 안의 품격을 드높여 주는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디자인 가구회사 비트라의 백인정 씨에 따르면 의자 하나를 사도 평생 쓸 수 있는 제품을 사겠다며 매장을 찾는 고객이 대부분이고 의자에서 시작해 식탁 같은 덩치 큰 가구를 순차적으로 들이는 재구매율도 굉장히 높다고 한다.

“젊은 시절 유럽에 체류했던 유학파 출신들이 해당 문화권에서 디자인 문화를 흡수한 경우가 꽤 많다. 왜 좋은 물건을 사서 오래 써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이런 디자이너 가구를 찾는 큰 이유”라며 강조했다.

전혀 모르고 매장을 찾는 고객도 있지만 구매력이 왕성한 40대 여성 고객들의 절반 이상은 특정 작가를 이미 알고 찾아올 정도라고 한다. 이들에게 의자 하나는 더 이상 일상 속의 가구가 아니라 아트 퍼니처(Art Furniture)인 셈이다.
아트 퍼니처에 빠지는 첫 단계는 바로 디자인 체어. 개성 있고 작가의 아이덴티티가 물씬 드러나는 디자이너 체어들이 진열돼 있는 독일 비트라 하우스 본사
아트 퍼니처에 빠지는 첫 단계는 바로 디자인 체어. 개성 있고 작가의 아이덴티티가 물씬 드러나는 디자이너 체어들이 진열돼 있는 독일 비트라 하우스 본사
작품 모시러 비행기 타고 원정까지

얼마 전 디자이너 가구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디자인회사의 신제품 론칭 행사장에는 각 매체의 언론 관계자들과 관련 업체 관계자 외에 50~60대의 중년 여성들이 VIP석에 함께 자리해 눈길을 끌었다.

평소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아 이 숍에서 꾸준히 물건을 구입해 온 ‘큰손’ 고객들이었던 것. 행사 관계자에 따르면 갤러리 관장이나 미대 교수들도 있지만 그중에는 안목 높으신 전업 주부들도 적지 않게 초청장을 받는다고 귀띔해준다. 이들의 발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Trend Report] 강남 주부들, 디자이너 가구에 꽂히다
국내에서 열리는 리빙디자인페어는 물론 세계 각국의 유명 디자이너와 신진 작가들을 소개하는 밀라노국제가구박람회까지 원정 가는 열성팬들도 있다. 해외 유명 작가들의 디자인 수상작들을 직접 만나고 이제 막 디자인 시장에서 주목받고 부상하기 시작한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탐방하기 위한 자리에 밀라노행 비행기삯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명 디자인 가구의 무어만 의자가 놓인 거실
유명 디자인 가구의 무어만 의자가 놓인 거실
이들이 일상에서 즐기는 디자인, 작가주의 매력은 그만큼 뜨겁다. 다이닝 식탁에 유명 디자이너의 카피 체어를 믹스한 이도, 수천만 원대의 테이블로 현관 전실을 꾸미는 이 모두, 한국 인테리어의 가장 뜨거운 혈관이 바로 디자이너 가구 홀릭임에 틀림없다.

이지혜 기자 wisd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