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택(陰宅)

풍수지리를 믿는 사람들은 풍수지리를 운명개척학이라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게 묘지다. 어떤 묘를 쓰느냐에 따라 자손의 명운이 달라진다고 그들은 믿는다. 풍수지리학에서 말하는 복을 부르는 묘의 조건을 알아본다.
풍수에서는 명당과 흉지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어떤 곳에 산소를 쓸지 고민을 거듭했다.
풍수에서는 명당과 흉지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어떤 곳에 산소를 쓸지 고민을 거듭했다.
풍수지리의 경전인 <장경>(葬經)에는 “지리의 도(道)를 터득한 풍수사가 길지를 정해 묘를 쓰면 자연의 신령한 공덕(功德)을 취할 수 있어, 하늘이 내린 운명까지도 더욱 복되게 바꿀 수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장경>에 등장하는 이 문구는 탈신공개천명(奪神功改天命)을 주장하는 대표적 사례로 풍수지리가 적극적인 운명개척학임을 밝히고 있다.

동양의 많은 철학이 사람은 타고난 운명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반면, 풍수지리는 초자연적인 힘을 빌려 불운을 막고 행운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풍수지리는 그런 ‘운명 바꾸기’의 일환으로 예나 지금이나 동양과 서양에서 모두 선호되고 있다. 그 결과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부자가 되고픈 사람이라면 한번쯤 풍수지리를 믿어보고 싶고 또 기대보고 싶은 그 무엇으로 생각해왔다.


절과 탑을 허물고 부친 묘를 이장한 흥선대원군

조선시대 세도 정치하에서 기인(奇人)으로 행세하며 몸을 감추었던 흥선군은 풍수설을 믿고서 아비를 명당에 장사지냄으로써 묘의 발복(發福)을 통해 실추된 왕권을 되찾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 스스로 전국의 명당을 찾아다녔던 흥선군은 당대의 풍수가 정만인(鄭萬仁)에게 앞일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금북정맥 중 명당이 많은 가야산(伽倻山)을 가리키며, “덕산 땅에 만대를 거쳐 영화를 누릴 곳이 있고,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가 있다. 부친의 묘를 그곳으로 이장하시오”라고 권했다.

정만인의 말을 들은 흥선군은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에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기로 결심을 굳힌다. 그런데 묘를 쓸 명당에는 가야사(伽耶寺)라는 절이 이미 터를 잡고 있었다. 봉분을 지어야 할 혈장에는 석탑이 서 있었다.

이에 흥선군은 먼저 가깝게 지내던 김병학의 집으로 가 난 그림을 그려 주고서 가보로 전해오는 벼루를 얻은 후, 영의정 김좌근 대감댁을 찾아가 선물로 주었다. 명품 벼루를 얻은 김좌근은 곧 충청 감사에게 가야사 터를 흥선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로 쓰는 데 협조하라는 편지를 써 주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1846년 가야사를 불태우고 석탑을 부순 뒤 경기도 연천(漣川)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하지만 풍수에 조예가 깊었던 흥선군은 이 묘의 발복이 3대를 넘지 못할 것을 내다보고 종묘사직을 위해 자기의 묘까지 명당에 잡아 그 발복으로 조선의 왕업을 대대손손 연장하고자 했다.

당시 그가 묘 터로 잡은 곳이 고양군 공덕리(현재 서울 마포구 공덕동)였다. 사후 흥선군은 생전의 뜻에 따라 이곳에 묘를 썼다. 하지만 이 묘는 1906년 조선의 국운번창을 염려한 일제의 계략에 의해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됐고, 1966년 다시 남양주시 지곡리로 이장돼 현재에 이른다.

근대에 흥선군과 함께 풍수지리를 신봉한 유명한 집안이 하나 있다. 바로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고려대를 발족시킴으로써 민족사학의 터전을 다졌던 인촌 김성수 선생 집안이다. 김성수 문중은 호남의 제일가는 명당만을 찾아 묘를 쓰기로 유명한데, 이 집안은 일산일혈(一山一穴)의 원칙에 따라 하나의 산등성에 하나의 능만을 안치했다.

쌍분으로 모실 경우 두 분 중 한 분은 혈장에 모실 수가 없어 발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이 묘들은 수십 리에서 멀게는 수백 리까지 떨어져 있게 됐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대한 이 집안의 믿음이 어찌나 깊었던지 명당을 차지하기 위한 법정 다툼도 불사했다.


묘지를 잘 써 머슴에서 재벌이 된 K 집안

좋은 터를 잡기 위한 집안 간의 다툼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낳기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충북 괴산 제월리에 있는 묘다. 이곳에는 두 개의 묘가 이상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어 보는 이의 눈을 잡아끈다.

아래 묘가 위쪽 묘에 바짝 붙어 자리 잡았는데, 맨 위쪽에는 아래 묘가 이장되면서 파진 웅덩이가 그대로 남아 있다. 위에 있는 묘는 모 기업 회장인 K씨의 고조 묘이고, 아래 묘는 Y씨의 조상 묘다.

K씨의 조상은 대대로 Y씨 집안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K씨의 부친은 대단히 부지런하고 성실했다고 한다. 그는 매일같이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니다 Y씨 소유의 산 속에서 천하의 명당 터를 발견하고 주인에게 그곳으로 묘를 이장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곡한 부탁을 드렸다. 주인은 별 생각 없이 허락했고, K씨의 부친은 그날 밤으로 증조부의 묘를 미리 점찍어 둔 곳으로 이장했다.

그 후 발복이 시작됐다. 머슴의 자식들이 승승장구하면서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뒤늦게 그 터가 명당임을 알아 챈 Y씨는 조상의 한 분을 K씨 고조 묘 위쪽에 쓰고는 발복을 기다렸다. 그런데 발복은 깜깜 무소식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세까지 점차 기울어 가는데, 머슴이던 K씨네는 날로 번창했다.

Y씨네가 배 아프고 속이 뒤틀렸음은 인지상정이다. 참다못한 Y씨가 K씨에게 고조 묘를 파 옮기라고 요구하자, 이 사건은 급기야 법정 소송으로까지 번졌다. 그러나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풍수지리에도 통해서 ‘유전명당 무전흉지(有錢明堂 無錢凶地)’다. 그러나 K씨 측은 동네 노인들을 증인으로 출석시켜 유리한 증언을 얻어냈다.

재판 결과는 묘를 이장하기는커녕 도리어 K씨 집안의 묘 터에 대한 연고권만 인정해준 셈이 됐다. 약이 바짝 오른 Y씨는 즉시 위쪽의 조상 묘를 다시 K씨 고조 묘의 아래쪽으로 이장했는데, 진혈에 좀 더 가까이 가고자 머슴의 발아래에 주인이 머리를 조아린 꼴이 되고 말았다.


벌초 때 눈여겨봐야 할 산소의 징후

이처럼 풍수에서는 명당과 흉지(凶地)가 사람의 운명까지도 좌지우지한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어떤 묘지들이 명당일까. 추석이 가까워지면서 벌초나 성묘를 미리 다녀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성묘를 갔을 때 조상의 묘가 온전하며 잔디가 곱게 자라 있으면 후손들의 마음이 기쁘고 편안한 반면, 잔디가 헐었거나 잡초가 무성하거나 묘에 구멍이 뚫려 있으면 왠지 불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왜 이런 흉한 일이 생기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풍수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무덤에 잔디가 전혀 자라지 않고 붉은 흙이 그대로 보이는 경우는 흔히 말하는 좌향(坐向)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좌는 시신의 머리 방향을, 향은 시신의 다리 방향을 말한다. 이를 풍수에서는 용상팔살(龍上八殺)이라고 한다. 무덤 속에 살기가 스며드는 것을 가리키는데 산맥이 내려온 방향과 시신을 안치한 좌향이 조화를 이루지 못해 생기는 현상이다.

풍수적으로 용상팔살에 걸린 묘는 후손들이 암이나 당뇨, 신장병 등에 걸리고 재난을 당해 하루아침에 망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럴 경우에는 즉시 좌향을 고쳐줘야 한다. 봉분에 금이 가고 갈라지거나 가라앉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이는 묘 아래쪽으로 수맥이 흐르기 때문이다. 수맥은 외부의 물을 끊임없이 끌어들이려는 성질이 있어 그 위의 봉분이 가라앉는다고 전해져 온다.

또 봉분이 갈라지는 것은 달의 인력에 의해 봉분 아래 땅 밑에서 밀물과 썰물이 생기기 때문이다. 지하에 수맥이 지나가면 유골은 검게 변하며 후손이 편치 못하다고 한다. 이럴 경우에는 좌향을 고쳐 잡아 수맥을 비껴나는 것이 최선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산소의 주변 환경이 조금씩 변하는데 이런 변화를 잘 살피면 길지인지 명당인지 구분할 수 있다. 따라서 추석 성묘길에 조상의 묘를 잘 살필 필요가 있다.


주택을 수리하듯 묘지도 이상이 있으면 손을 봐야

봉분에 물풀(이끼)이나 쑥대 같은 식물이 덮였을 경우는 묘 속에 물이 차 있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면 봉분에 쌓은 흙과 잔디 뿌리 사이에 서릿발이 돋으면서 잔디 뿌리가 들어 올려지는데, 봄이 돼 서릿발이 녹으면 봉분의 흙과 잔디 뿌리 사이가 들떠 빈 공간이 생기면서 잔디 뿌리가 수분을 흡수하지 못하게 돼 잔디는 말라죽고, 그 대신 말라죽은 잔디 사이로 이끼나 쑥대가 빼곡히 들어차게 된다.

이런 묘는 시신의 육탈(피와 살이 썩어 뼈로부터 분리돼 없어지는 것)이 되지 않으며 후손에게 큰 재앙이 따르므로 조속히 이장해야 한다. 봉분의 호석(護石·둘레석)이 벌어지거나 갈라지는 경우도 간과할 수 없다. 이 역시 묘 속에 물이 차 있기 때문이다.

광중(시신을 묻는 구덩이)의 물은 겨울이 되면 얼어 부피가 커지는데, 이 때문에 호석의 짜 맞춘 부분이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갈라진 틈 사이로 흙이나 이끼가 배어 나오는 것도 볼 수 있다. 이 역시 이장을 해야 한다.

묘에 구멍이 뚫렸거나 개미집이나 벌집이 있는 경우 역시 묘 속이 습하기 때문이다. 개미집이 있는 공간으로부터 지하로 6자(180cm) 밑에 물이 있음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기도 하다. 구멍은 보통 뱀, 두더지, 쥐가 들어간 흔적이며 특히 뱀은 피부로 숨을 쉬기 때문에 건조한 곳에서는 살지 못한다. 봉분에 뱀이 드나든 구멍이 있다면 그 묘 속이 습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유골은 검게 변하며 이장이 최선이다.

주변의 나무가 묘 쪽 또는 바깥쪽으로 기울었을 경우는 지층이 심하게 움직이는 곳이라 볼 수 있다. 이를 풍수에서는 도시혈(盜屍穴)이라 부르는데 시신이 뒤집히거나 도망 가 이장 시에 시신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매우 흉한 곳으로 필히 이장해야 한다.

봉분의 한쪽에 잔디가 벗겨지거나 움푹 팬 경우는 그 방향으로 계속해서 바람이 불어 닥치기 때문이다. 바람은 자연의 순환을 돕는 생명의 기운이긴 하지만, 한 방향에서 계속 불어온다면 흙과 초목의 순분이 증발해 잔디가 말라죽는다.

이것을 팔요풍(八曜風)이라고 한다. 무덤 주위에는 곡장(曲墻: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을 두르는데 이는 바로 묘에 불어 닥치는 바람을 막기 위해서다. 산줄기가 뻗어 내려온 방향과 주변 산세에 따라 바람의 방향이 다를 수 있는데 봉분의 한쪽에 잔디가 벗겨지거나 움푹 팬 것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정확히 찾아 그에 맞게 곡장을 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팔요풍이 들면 유골은 까맣게 변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한 조각도 없이 사라진다. 풍수에서는 이럴 경우 보통 자손이 끊어지거나 후대에 가문이 쇠퇴한다고 본다. 이때에는 곡장을 더 높게 또는 더 길게 쌓거나 나무를 심어 바람을 막는 게 필요하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주택을 수리해 살듯이 묘 역시 잘 살펴 보수하는 것이 후손들의 도리다. 벌초 시 이런 점들을 꼼꼼히 살펴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