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국적의 한국인 화가 뱅상 드 로즈

30여 년 전 가방 하나 들고 대한민국을 떠난 한 남자가 있었다. 무작정 유럽을 행선지로 정하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다 그는 프랑스에 정착했고, 프랑스 남부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대중적인 화가로 성공했다.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자연을 담은 그림은 엽서로도, 달력으로도 프랑스인들과 소통했고, 이제 그는 그림으로 세계인과 소통하려는 원대한 밑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30년이 지나 고국을 다시 찾은 그는 ‘뱅상 드 로즈(Vicent de Roses)’라는 이름의 화가였다.
프랑스어로 직접 시까지 썼다는 시화집과 도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자연은 프로방스의 그것이었다. 프랑스 남부를 본거지로 그는 프랑스의 이국적이고도 미려한 자연을 쉴 새 없이 화폭에 담았다.
프랑스어로 직접 시까지 썼다는 시화집과 도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자연은 프로방스의 그것이었다. 프랑스 남부를 본거지로 그는 프랑스의 이국적이고도 미려한 자연을 쉴 새 없이 화폭에 담았다.
낯설디낯선 프랑스식 이름 ‘뱅상 드 로즈’. 지인의 소개로 그를 만나러 가는 길만 해도 그를 외국인으로 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지인과의 통화에서 그는 적어도 목소리만 듣고서는 프랑스인으로 착각할 정도의 프랑스어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인사를 영어로 해야 할지, 어쭙잖은 프랑스어로 해야 할지 망설였던 것은 기우에 그쳤다. 그는 그저 여러 언어에 익숙한 ‘세계인’일 뿐이었다. 유쾌한 한국어로 첫인사가 오가고 시원한 냉커피를 대접받은 뒤 기자의 눈은 자연스럽게 그의 그림으로 옮겨갔다.


프랑스 남부에서 ‘잘 팔렸던’ 화가

작업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유화 작품들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프랑스 프로방스를 담고 있었다. 프로방스의 고즈넉한 아침이 있는가 하면 낙조(落照)하는 순간의 시뻘건 태양빛이 들판을 덮친 저녁 풍경도 있었다.

이국적인 풍경화에 넋을 잃고 있을 때 로즈 씨는 흔히 유럽 배낭여행 때 몇 장씩 기념으로 사오곤 하는 프랑스 풍경을 담은 엽서를 꺼내와 기념으로 가지라며 건넸다. 기자가 살짝 당황했던 탓일까. 그는 겸연쩍은 웃음을 섞어 기다리던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기 시작했다.

“그 엽서 아래 이름을 한 번 보세요. ‘뱅상 드 로즈’라고 제 이름이 적혀 있죠. 여긴 작품이 별로 없으니 그거라도 드리려고요.(웃음) 저는 프랑스에서 매우 대중적인 작품을 그려서인지 대중적인 화가였어요. 제 작품은 1유로에서 2000유로까지도 팔렸죠. 직접 그린 작품도 팔았지만 프린트 그림도 많이 팔았어요. 엽서, 달력에도 제 그림이 많이 들어갔는데, 프린트 그림은 전국적으로 400만 장이나 팔려서 기록을 세우기도 했죠.”

프랑스어로 직접 시까지 썼다는 시화집과 도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자연은 프로방스의 그것이었다. 프랑스 남부를 본거지로 그는 프랑스의 이국적이고도 미려한 자연을 쉴 새 없이 화폭에 담았다.

미화 10달러로 시작한 프랑스에서의 삶은 시쳇말로 ‘잘 팔리는’ 그림 덕택에 나날이 윤택해져 갔고, 1997년 스페인 로사스로 삶의 무대를 옮기기 전까지 그는 다섯 개의 화랑을 운영하며 대중적 화가로서 성공했다. 시화집을 살피다 한쪽에서 프랑스 신문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일천한 기자의 프랑스어 실력을 눈치챘는지 그는 한 줄 한 줄 우리말로 번역해 주었다.

“부끄러운 얘깁니다만,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사람들이 제 그림을 보고 ‘고흐의 환생’이라는 평가를 해주기도 했어요. 이 기사는 프랑스에서 한창 활동할 때 모 신문에 났던 기사예요. 워낙 고흐를 좋아해서 그런지 그와 연관시킨 사람들의 평가가 싫지 않았고, 그래서 그런지 아를르(고흐가 사망하기 2년 반 전에 이주한 곳으로 고흐는 아를르에서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을 그리며 예술혼을 불태웠다)에 갔을 때 왠지 예전에 와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하하하.”
“남자가 50이 넘으면 삶의 독창적인 모드를 갖지 않으면 안돼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제 자신의 행복보다는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자는 생각이었어요. 되돌아보면 삶 자체가 앙가주망이었던 같기도 합니다.”
“남자가 50이 넘으면 삶의 독창적인 모드를 갖지 않으면 안돼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제 자신의 행복보다는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자는 생각이었어요. 되돌아보면 삶 자체가 앙가주망이었던 같기도 합니다.”
30년 전 홀연히 떠난 나라, 코리아

신문 기사에 삽입된 그림을 보니 프랑스 기자의 평가대로 고흐의 작품과 비슷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의 주인공이기에 뿜어낼 수 있는 예술적 혼(soul), 암울하면서도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그림이었다. 한 사람의 피 끓는 절규가 느껴졌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그림은 프랑스에서 그렸지만, 그 사건은 제가 한국을 떠난 직접적인 원인이었죠. 제가 광주 사람인데, 인권이 보장받지 못하는 나라에 염증을 느꼈다고 할까요.

당시 미국은 비자조차 내기 힘든 나라여서 무작정 떠난 곳이 유럽이었어요. 처음엔 영국으로 갔는데, 제가 짧은 영어로 공항에서 너무나 솔직히 얘기했는지 입국도 못하고 쫓겨났어요.(웃음) 돌아올 수는 없어 그리스로 갔다가 독일을 거쳐 저를 받아준 곳이 프랑스였어요.

그런데 파리 샤크라 쾨르 성당 앞에서 아이를 데리고 구걸하는 짚시 여인한테 가진 돈을 모두 소매치기 당했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 남은 돈 10달러가 전부더군요. 일요일이었는데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 하고 루브르박물관 구경을 갔다가 운명의 여인을 만났죠.”

할 줄 아는 프랑스어는 ‘마드모아젤’이 다였던 스물다섯 빈털터리 한국 청년은 금전적 허기는 뒤로 미루고 루브르에서 만난 걸작들과 열심히 소통을 하고 있었다. 밀레의 <만종> 앞에 선 순간 한 여인이 스쳐지나갔고 그는 운명 같은 전율을 느꼈단다.

자신도 모르게 프랑스 여인에게 다가갔고 그 여인은 수중에 10달러밖에 없는 이방인에게 저녁 식사와 잠자리까지 제공해주었다. 그가 프랑스인 ‘뱅상’으로 살게 된 운명적 사건이었다고나 할까.

“아쉽게도 남자친구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미련 없이 그 집을 나와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거리의 화가로 관광객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며 돈을 벌기 시작했어요. 제가 손이 빨랐는지 한국 돈으로 하루에 70만~80만 원씩 벌었던 것 같아요.

그러기도 잠시 허가도 없이 몽마르트르에서 그림을 그린다고 쫓겨났죠. 그 다음 자리를 옮겨 그림을 그린 곳이 퐁피두센터 앞이었어요. 어느 날 열심히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데 이상하게 뒤통수가 엄청 따가운 겁니다. 뒤를 쳐다 보니 루브르에서 만난 여인이 서서 웃고 있더라고요. 저를 만나러 왔다길래 그녀와 결혼했죠.(웃음)”

결혼과 함께 프로방스에 기반을 잡고 그곳에서 ‘프로방스 화파’를 창시하며 화가들과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영국 공항에서 쫓겨날 때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현실’이었다.
오는 11월 세빛둥둥섬에서 개최 예정인 ‘앙가주망 특별전’에서 로즈 씨는 예술총감독을 맡는다. 전시는 물길로 지구촌을 하나로 엮는 눈속임 예술을 기반으로 하는 대서사시가 될 예정이다.
오는 11월 세빛둥둥섬에서 개최 예정인 ‘앙가주망 특별전’에서 로즈 씨는 예술총감독을 맡는다. 전시는 물길로 지구촌을 하나로 엮는 눈속임 예술을 기반으로 하는 대서사시가 될 예정이다.
40대엔 시인으로, 50대엔 앙가주망으로

작품 가격이 1유로에서 2000유로까지 오갔다는 화가 로즈 씨. 그는 그림도 그리지만 시도 쓰는 화가이자 시인이기도 하다. 시인이기 때문에 그릴 수 있는 그림, 화가이기에 쓸 수 있는 시가 있다고 했다. ‘까만 기억’ 같은 시적 표현이 그렇다.

그림을 그리면서 느낀 서정을 시로 노래하고, 시를 쓰면서 아쉬운 예술적 에너지를 그림으로 그려 보완하는 과정. 다시 말하면 그는 그가 가진 모든 언어를 이용해 소통하고자 한다. 살다 보니 2개국 언어는 완벽하게, 나머지 3개국 언어도 대충은 소통할 수 있게 됐다는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역마살’을 주체할 길 없는 자유인이기도 하다. 국적으로 따지자면 엄연한 프랑스인이지만 뿌리는 한국인이요,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에너지로 따지자면 또 세계인이랄까. 문득 30여 년 만에 고국을 다시 찾은 이유가 궁금했다.

“화가로서 오랜 제 꿈의 실현을 위해서였죠. 오는 11월에 한강 세빛둥둥섬에서 앙가주망 특별전이 열릴 예정인데, 제가 예술총감독을 맡게 됐어요.

앙가주망 특별전은 트롱프뢰유(Trompe-l’oeil) 즉, 눈속임 그림을 통해 전 세계를 바닷길로 연결하는 하나의 대서사시랄 수 있습니다. 그동안 미술관에 갇혀 있었던 그림들이 대중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갈 겁니다. 20명의 한국 화가가 함께 하게 되는데 세기의 미술, 프로방스, 쓰나미, 해저, 이순신 등의 주제로 물길을 통해 지구를 하나로 잇는 앙가주망이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 전시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꿈이죠.”

언뜻 감이 오지 않는 기자를 위해 그는 펼쳐도 펼쳐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콘셉트 스케치북 롤을 들어 보인다. 스케치북 속에 그의 지난 6개월 서울살이도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그는 서울에서 지낸 6개월 동안 실제적 삶의 ‘앙가주망’을 위해 ‘국경없는화가회’ 발족식도 조용히 가졌다. 뜻을 함께 하는 화가들과 빈민국을 다니며 그림을 통해 소통하고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자 하는 취지에서다.

“제가 가진 모든 언어를 통해 앙가주망(사회참여 예술)을 실천할 생각입니다. 그게 제게 남은 꿈이기도 하고요. 남자가 50이 넘으면 삶의 독창적인 모드를 갖지 않으면 안돼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제 자신의 행복보다는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자는 생각이었어요. 되돌아보면 삶 자체가 앙가주망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웃음)”

40대에는 시에, 50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앙가주망에 천착했다는 화가는 지금도 꿈을 꿀 수 있어서 충분히 행복하다며 웃어보였다.

글 장헌주 기자 chj@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