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 작가 권인수

오랫동안 숲과 자연을 담아온 작가 권인수가 양귀비꽃을 들고 화단을 찾았다. 어느 날 우연히 길가에서 마주친 양귀비꽃에 매료돼 그 아름다움을 미친 듯이 화폭에 담았다는 작가 권인수를 만났다.
[Artist] ‘딱’ 반하는 순간을 그리다
우연히 만난 양귀비꽃에 홀리다

중견 작가 권인수의 여덟 번째 개인전 제목은 ‘딱 반하는 순간’이다. 권 작가의 마음을 빼앗은 대상은 양귀비꽃이다. 개인전을 앞두고 서울 인사동 카페에서 만난 권 작가는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가다 길가에 핀 양귀비꽃을 보고 순간적으로 매료됐다.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들듯 권 작가 또한 양귀비꽃의 유혹에 빠져 한참 양귀비꽃 앞에 머물러 있었다. 양귀비꽃은 분명 유혹적이다. 그는 본능에 충실하게 반응했다. 작업실로 돌아온 그가 미친 듯이 그 느낌을 화선지 위에 옮겼다. 최근 전시회에서 그가 선보인 작품들은 모두 양귀비꽃이 남긴 진한 유혹의 현현(顯現)인 셈이다.

“얼마 전까지 일산에서 살았는데 근처에 심학산 등 산이 많았어요. 밥을 먹으러 근처 식당에 가다 우연히 양귀비꽃을 봤어요. 너무 예뻐서 그걸 카메라에 담았고, 작업실에 오자마자 그렸습니다.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처음에는 수채화로 그렸어요. 그전까지 꽃 그림을 그릴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말이죠. 그만큼 양귀비꽃은 끌어당기는 데가 있었습니다.”

꽃 속에는 암술과 수술이 공존하며 새로운 생명체를 품고 있다. 그만큼 생명력이 강한 게 꽃이다. 권 작가의 눈에 양귀비꽃은 그중에서도 생명력이 가장 강력한 꽃으로 비쳤다. 그가 암술과 수술이 그대로 드러나는 정면을 그리는 이유도 생명력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 위해서다.

수채로 양귀비꽃을 그렸지만 그걸로 개인전을 할 줄은 올 초까지만 해도 몰랐다. 올 3월 전시회는 그간 해온 대로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을 걸 생각이었다. 그런데 양귀비꽃 그림이 너무 돋보였다.
[Artist] ‘딱’ 반하는 순간을 그리다
삼수 만에 서울대 미대에 들어가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는 추상이 중요한 트렌드였기 때문에 잠깐 추상화를 하긴 했지만 계속 수묵화를 했습니다. 가끔 입체작업도 하고 전각도 했는데 괜찮다는 평을 받기고 했어요. 아버님이 집을 짓는 목수셨는데 그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님 곁에서 못 빼고 나무 깎는 일에 익숙했거든요.”

어려서부터 그는 “손재주는 타고 났다”는 소리를 곧잘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그림 그리는 일이 재밌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화가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면서기나 하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중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본격적으로 그림에 매달렸고, 삼수를 하며 어렵게 서울대 미대에 들어갔다. 그는 서울대에 합격한 후 마을 입구에 플래카드가 걸렸다고 웃으며 말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내내 작업만 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뜨기 미대생에게는 그림밖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도 없이 무턱대고 작업만 했다. 그림을 그리는 틈틈이 입체작업도 잊지 않고 했다. 가끔은 평면보다 입체작업이 훨씬 쾌감이 컸다. 그는 지금도 작업실 인테리어는 직접 한다고 했다.

“우리 학교에 서세옥, 이종상, 김병종 등 내로라하는 작가 선생님들이 계셨어요. 그분들한테 배웠는데 당시만 해도 수묵화에 색을 쓰면 졸렬하다고 무시를 당하는 분위기였어요. 색을 쓰더라도 제한적으로 쓸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인지 어디를 가더라도 서울대 동양화과 출신은 티가 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도 그는 한동안 수묵화만 그렸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숲 그림은 18년 전, 제주도 여행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성산일출봉으로 오르는 길, 저 아래 깔린 잔디가 눈에 들어왔다. 때는 봄의 절정인 5월, 연두색 잔디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새봄에 난 잔디의 색깔이 너무나 맑고 깨끗했다. 너무나 맑고 깨끗한 그 연두색에 수묵만 고집하던 그는, 순간 ‘저 색을 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자리에서 잉크와 수채화 물감을 꺼내 그 모습을 스케치북에 담았다. 처음에는 그걸 화폭에 옮기는 게 쉽지 않았다. 노란색과 연두색은 먹과 어울리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그러다 아교와 물감, 먹을 섞은 후 일정 시간이 흐르면 잘 섞일 때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 순간을 포착해 그림을 그리니 무난하게 어울렸다.

“저만의 방법을 찾으면서 그림도 완성됐습니다. 그걸로 전시회를 열었는데 반응도 좋았어요. 제 그림을 찾았다고 생각했죠.”
<양귀비-이루다>, 2011년 ,120×165cm
<양귀비-이루다>, 2011년 ,120×165cm
, 2011년 ,120×165cm">
다양한 이미지를 한 화면에 담아내다
<양귀비-이루다>, 2011년 , 104×104cm
<양귀비-이루다>, 2011년 , 104×104cm
, 2011년 , 104×104cm">양귀비꽃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권 작가는 양귀비꽃을 만나면서 또 한 번 ‘딱 반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에게 양귀비꽃은 독이자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였다. 양귀비꽃을 만난 후 권 작가의 붓은 하루에도 수많은 양귀비꽃을 피워냈다.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양귀비꽃만큼 재미나게 작업을 한 적이 없었다. 즐기면서 작업을 한 덕인지 평도 나쁘지 않다. 양귀비꽃을 소재로 한 개인전에서는 그림도 잘 팔렸다.

어떤 관람객은 “양귀비꽃에서 어떤 힘이 느껴진다. 이 그림을 걸어놓으면 돈 좀 벌겠다”며 그림을 사기도 했다. 권 작가는 아마도 양귀비꽃의 둥근 형상이 근원적인 느낌을 주는 듯하다고 말했다. 이번 개인전도 소재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똑같은 소재를 다루기 때문에 모양에는 한계가 있다.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배접한 화선지, 두꺼운 화선지 등 종이를 바꿔 쓰며 질감에 차이를 줬다.
<숲-자연과의 대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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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자연과의 대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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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 그림은 극사실화처럼 노동집약적인 그림은 아닙니다. 한 작품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아요. 앞으로는 노동을 많이 투여하면서 다양한 이미지를 하나의 화면에 담아내는 그림을 시도해볼 생각입니다.”

그가 앞으로 양귀비꽃을 그릴지, 자연으로 돌아갈지 속단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권 작가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그 순간을 화폭에 담을 것이라는 점이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딱 반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어느 순간 포착되는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연애를 하게 됩니다. 그 순간 때문에 기나긴 아픔과 고통을 뛰어넘어 사랑에 이르고 예술에 이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