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 앞날과 관련해 비관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단기적으로 연착륙과 경착륙 간의 논쟁 속에 후자에 무게를 두는 시각이 오래됐다. 중장기적으로 지속 성장 여부와 관련해서는 ‘성장의 덫’에 걸릴 것이라는 비관론과 극단적으로 ‘중진국 함정(middle income trap)’에 빠질 것이라는 경고도 함께 나온다.
중진국 함정이란 개발도상국이나 신흥국들이 경제발전 초기에는 유치 단계의 이점을 누리면서 순조롭게 성장하다가 중진국 수준에 와서는 어느 순간에 성장이 장기간 정체되거나 오히려 퇴보하는 현상을 말한다.
중진국 함정이란 개발도상국이나 신흥국들이 경제발전 초기에는 유치 단계의 이점을 누리면서 순조롭게 성장하다가 중진국 수준에 와서는 어느 순간에 성장이 장기간 정체되거나 오히려 퇴보하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 경제 성장세가 급속히 둔화되고 있다. 이미 2% 내외로 떨어진 우리 경제성장률이 올해도 3%대에 진입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는 예측 기관들이 늘어나고 있다. 현재 잠재성장률이 3.7% 내외인 점을 감안하면 GDP 갭(실질GDP와 잠재GDP의 차이)상으로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1%포인트 내외의 디플레 갭(GDP 갭이 마이너스일 경우)이 지속된다는 의미다.

중진국 함정이란 개발도상국이나 신흥국들이 경제발전 초기에는 유치 단계의 이점을 누리면서 순조롭게 성장하다가 중진국 수준에 와서는 어느 순간에 성장이 장기간 정체되거나 오히려 퇴보하는 현상을 말한다. 1인당 소득으로 선진국, 중진국, 후진국으로 분류할 때 한국은 아직까지 중진국으로 분류된다.

역사적으로 ‘중진국 함정’에 빠져 경제발전 단계가 다시 후퇴한 국가들은 의외로 많았다. 1970년대 이후 아르헨티나 등과 같은 중남미 국가들은 전형적인 중진국 함정에 빠져 ‘종속이론’이 탄생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동남아 국가들도 필리핀 등은 중진국 함정에 빠져 아직까지 헤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특정국이 중진국 함정에 빠지는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으나 경험국의 사례를 볼 때 비교적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 네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무엇보다 짧은 기간 안에 성장 단계를 일정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이른바 압축 성장을 주도하는 경제 각료들의 사고가 경직적으로 바뀐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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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상승으로 고비용·저효율 구조 정착

경제 운영 체계도 소득이 일정 수준 도달할 때 임금 상승 등 고(高)비용-저(低)효율 구조로 바뀌면서 시장경제 도입 등을 통한 생산성 혹은 효율성 제고에 소홀히 한 것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동일한 맥락이 되겠지만 산업구조 전환에 있어 선진국의 첨단 기술과 인력 도입 등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초기 단계에 성장을 주도했던 주력 산업을 고집한 것도 원인이다.

경제와 사회에 대한 통제력도 약화돼 정치적 포퓰리즘이 성행하면서 노조 등 경제주체들의 욕구를 쉽게 수용하게 되는데, 이는 한편으로 경제주체들의 의욕을 꺾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고비용-저효율 경제구조를 빠르게 정착시켰다. 특히 우리 경제처럼 부존자원이 부족한 국가일수록 성장을 정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론적으로 우리처럼 뒤늦게 경제발전에 참여한 국가들은 외연적 단계에서 내연적 단계로 이행되는 것이 정형적인 성장 경로다. 전자는 개발 초기에 노동 등 생산요소의 양적인 투입을 통해 성장하는 국면을, 후자는 일정 시점 이후 생산요소와 경제 시스템의 효율성을 제고시켜 성장하는 단계를 말한다.

이미 오래됐지만 우리 경제는 개발 시작 이후 주력 산업이었던 제조업의 생산 여건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 우리의 제조업 비중은 30.1%로 한 단계 낮은 브라질 23.4%, 러시아 29.7%, 인도 21.0%보다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현재 서비스 산업으로의 경제구조 전환을 서두르고 있으나 과도기에는 제조업이 받쳐줘야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제조업 환경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것은 낮은 출산율로 생산 가능 인구, 특히 청년층들이 감소하고 있는 게 가장 큰 요인이다. 한국은 ‘루이스 전환점(개발도상국에서 농촌 잉여 노동력이 고갈되면 임금이 급등해 성장세가 둔화되는 현상)’에 도달한 지 오래됐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외국인 인력에 의해 부분적으로 보완되고 있으나 인력 수요와 공급 간의 불일치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만성적인 고비용-저효율 구조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

노동력에 이어 생산에 필요한 자본도 저축률 하락 등으로 갈수록 성장률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저축률이 하락하는 요인으로는 정치권의 포퓰리즘적 사회보장 지출 확대, 가계의 사회안전망 강화에 따른 예비적 동기의 저축 필요성 감소와 소비 여건 개선 등이 지적되고 있다.

대외적으로도 우리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높아진 국제 위상에 맞게 내수시장이 발전되지 않음에 따라 통상 마찰을 빚고 있다. 특히 기업 간 불균형이 심화된 상황에서 특정 기업의 경우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라간 것에 따른 착시현상까지 겹치면서 한국 기업들이 주요 교역국으로부터 통상 마찰의 표적이 되고 있는 점도 우리 경제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요인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1990년대 이후 일본 경제가 장기간 침체 국면에 빠져들 때 겪었던 고질적인 5대 함정의 우려가 새 정부 출범 전후로 우리 경제 내부에서 나타나며 ‘일본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정부의 의도대로 경제주체들이 반응하지 않아 모든 정책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정책 함정’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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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경기 부양 방안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화정책은 ‘유동성 함정’에 빠져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정책과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주체들이 과도한 부채에 시달려 소비나 투자를 하지 못하는 ‘빚의 함정’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경제구조를 개혁하는 문제도 최종 목표인 경쟁력 개선 여부와 관계없이 구호만 반복적으로 외치는 ‘구조조정 함정’에 빠져 있는 점도 동일한 맥락에서 나오는 우려다. 이런 상황에 놓이면 경제주체들이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성은 증대돼 예측 기관들의 전망이 또 다른 전망을 불러일으키는 ‘불확실성 함정’에 빠지게 된다.

최근 들어 우리 경제의 혈액인 돈이 다시 안 돈다는 말이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 나라의 경제에서 돈이 돌지 않으면 사람의 몸처럼 심장에서 멀리 떨어진 손과 발부터 썩어 가는 증상이 나타난다. 새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우리 경제 내부에서는 부유층보다 서민층, 대기업보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일수록 어렵다 못해 쓰러지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론적으로 특정 국가에서 돈이 얼마나 잘 도는가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경제 활력 지표로 통화유통속도와 통화승수를 꼽는다. 통화유통속도란 일정 기간 동안 한 단위의 통화가 거래를 위해 사용된 횟수를 말한다. 통화유통속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돈이 잘 유통되지 않아 그 나라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우리의 통화유통속도를 보면 금융 위기 직후인 2009년 1분기에 0.696까지 떨어졌던 통화유통속도가 2011년 4분기에는 0.723까지 회복됐다. 하지만 그 후 계속해서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지난해 3분기에는 위기 직후 수준인 0.696으로 돌아갔다. 전형적인 통화유통속도의 ‘더블 딥’ 현상이다.

통화승수도 갈수록 다시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국민의 현금 보유 성향이 늘어나 시중에서 돈이 퇴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각국의 통화유통속도와 통화승수가 살아나면서 증시와 부동산 시장이 후끈 달아오르는 반면, 우리만 경제 활력 지표가 떨어지고 부동산과 증시가 외톨이(decoupling) 현상을 일으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돈이 안 도는 ‘돈맥 경화’ 현상이 다시 심해지는 가장 큰 요인은 우리 경제주체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가계는 더 이상 빚을 내서 소비할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기업도 설비투자를 꺼리는 성향이 여전하다. 서민층과 중소기업들이 체감적으로 느끼는 금융사의 대출 태도가 더 깐깐해진 것도 한몫하고 있다.

돈이 안 돌 때 가장 우려되는 것은 ‘좀비론’이다. 모든 정책은 정책당국이 의도했던 대로 정책 수용층이 반응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책당국의 주도력과 함께 경제 활력을 끌어 올려야 한다. 최근처럼 경제 활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정책당국이 제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정책 수용층의 반응은 미온적일 수밖에 없다.

최근과 같은 상황에서 정책당국이 취해야 할 태도는 의외로 간단하다. 어떤 정책을 추진한다 하더라도 효과가 없으니 그대로 손 놓고 있는 경우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정책당국이 나서서 떨어지는 경제 활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은행 등이 보여 온 태도는 어느 편에 속할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가뭄이 심해져 더 깊어진 지하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마중물을 더 많이 넣어야 하고 때맞춰 펌프질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 5년 전 미국은 사상 초유의 금융 위기를 당해 깊은 나락으로 추락만 하던 경제 활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빅 스텝 금리 인하(기준금리를 한꺼번에 서너 단계씩 인하)와 헬리콥터 밴식 돈 푸는 정책을 추진했다.

최근 중진국 함정에 빠질 것이라는 위기설의 실체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 국민이 미래에 먹고 살 ‘성장 대안 부재론’이다. 다른 하나는 엔저(円低)로 일본이 부상하고 중국 등 후발국은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는 ‘샌드위치 위기론’이 바로 그것이다. 새 정부를 맞아 우리 경제가 다시 한 번 도약하기 위해서는 정치권과 정책당국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정책 수용층이 적극 협조해 이런 우려를 하루 빨리 불식시켜 나가야 한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