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원으로 1000배 가치 나누는 사업가 박정부 다이소 회장

비즈니스의 목적은 이윤 창출에 있다. 다시 말해 남지 않는 장사는 접어야 마땅하다. 균일가 생필품숍 ‘다이소’가 주목받는 건 이 평범한 진리를 뒤집었기 때문이다. 1%대 마진율에도 15년째 사업을 지속하는 이유는 1000원 한 장으로 사회 공유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박정부 회장의 철학이 있어서다. 처음엔 갸우뚱했으나 끝내 고개를 끄덕이게 했던, 조금은 특별한 박 회장의 ‘뚝심’ 경영론을 소개한다.
박정부 회장은… 1973년 한양대 공업경영학과 졸업.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1988년~ 한일맨파워 대표이사. 1992년~ 다이소 아성산업 대표이사. 2006년~ 한국 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2009년~ 한웰 회장.
박정부 회장은… 1973년 한양대 공업경영학과 졸업.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1988년~ 한일맨파워 대표이사. 1992년~ 다이소 아성산업 대표이사. 2006년~ 한국 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2009년~ 한웰 회장.
박정부 다이소 회장을 만나기 위해 찾은 서울시 도곡동 다이소 본사. 회장실 입구 테이블에 40여 종의 제품이 줄지어 진열돼 있다. 손님들에게 선보이기 앞서 ‘회장님’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들이었다. 박 회장은 1997년 균일가 생활용품 사업에 뛰어든 이래 전 세계의 마켓을 발로 뛰어 질 좋고 가격 착한 제품들을 공수해오고 있으며, 지금도 다이소의 첫 번째 소비자가 돼 제품을 꼼꼼히 뜯어본다. “1000원짜리가 다 그렇지”, “싼 게 비지떡”이란 말이 나오는 순간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다이소에서 판매하는 제품이 3만 종에 이르는 것으로 압니다. 모든 제품을 하나하나 다 살펴보시나요.
“물론입니다. 전부 다 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재주문할 때도 업그레이드시킬 것이 없는지 검토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이 되죠. 2012년 기준으로 다이소 제품이 약 5억5만 개가 팔렸으니 국민 1인당 평균 구매량은 연간 10개에 달한다는 셈이 나옵니다. 아무리 1000원짜리라 해도 그 이상의 가치를 고객에게 안겨줘야 하는 이유죠.”


그 가치는 어떻게 창출할 수 있는지요.
“제품의 경쟁력을 최고로 끌어올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남들보다 먼저, 더 빨리 좋은 물건을 찾기 위해 동남아시아나 유럽 제조 업체를 뛰어다닙니다. 이렇게 캐낸 ‘보석’을 잘 포장해야 해요. 패키지나 디자인에 최첨단을 적용하고 매장 디스플레이나 조명도 고급스럽게 꾸밉니다. 싸다고 물건이 조잡스러우면 사는 사람에게 겸연쩍어요. 가격은 최대한 낮춥니다. 10년 전과 지금 값이 같다면 믿으시겠어요.”


10년간 물가는 꾸준히 올랐는데 가격이 그대로라면 역마진 아닙니까.
“맞습니다. 올 매출 9000억 원을 바라보는 이 회사의 마진이 겨우 1%에 불과합니다. 아직까지는 투자에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찮아서 그나마도 역마진이 나오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수준으로 팔지 않으면 남지 않는 구조이지요. 이윤보다는 고객 만족에 역점을 두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어요.”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떨치기 어렵지 않았나요. 수익이 나지 않아 조급하다거나.
“노력이나 투자 대비 다른 기업들처럼 성과가 나는 것이 아니었기에 항상 힘들어요. 고객에게 베푸는 만큼 직원들에게 여유 있게 나눠주지 못하는 것도 늘 걸립니다. 하지만 길게 보는 게 답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제품에 공을 들이고 브랜드의 신뢰를 쌓는 데 투자하는 만큼 나중에는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다이소에 긍정적인 인지도가 형성되면서 느끼는 보람이 적지 않고요.”



일본 브랜드란 오해 속상해, 사회 공유가치 실천하고파

공학도 출신으로 전구 제조 업체에서 일하던 박 회장은 1998년 일본을 대상으로 무역 사업을 시작했다. 꼼꼼하고 확실한 일처리로 무역회사는 일본의 대표 유통 업체인 다이소 산업의 최대 납품처로 성장했고, 그는 당시 일본에서 대유행했던 ‘100엔숍’에서 영감을 받아 1000원숍을 구상했다. 1992년 현 다이소의 전신인 아성산업을 설립한 후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1997년 서울 천호동에 1호점(아스코 이븐플라자)을 오픈했다. 제품의 가격대는 500원에서 5000원까지 다양하지만 1000원이 기본이다.


싼 물건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균일가 숍은 무모할 수도 있었습니다.
“일본 100엔숍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틈새시장이 될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깐깐하기로 소문난 일본과 거래하던 ‘가닥’이 있었기에 자신 있었습니다. 가격은 저렴하면서도 제품력이 확실하다면 문제될 게 없단 확신이 들었어요. 2001년 일본 다이소산업의 일부 지분 투자를 받아들여 ‘다이소아성산업’으로 회사 명칭을 바꾸고 매장 역시 아스코 이븐플라자에서 다이소로 바꾸어 현재까지 오게 됐습니다.”
[CEO INTERVIEW] “내 주머니만 생각하는 사업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 브랜드’ 논란이 일었던 거군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다이소가 독도를 다케시마로 명칭 변경하는 것을 돕는다’는 설이 퍼졌어요. 처음엔 그냥 지나쳤는데 불매운동으로 이어질 기미를 보여 안 되겠다 싶어 기자간담회를 열었죠. 일본 다이소산업은 지분 참여(34%)만 할 뿐 경영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로열티 지불이나 인적 교류가 없으니 완전 독자 기업이라 볼 수 있어요. 이런 논란에 오히려 일본 측에서 깜짝 놀라 ‘우리가 도와줄 것이 없느냐’고 묻기도 했어요.”(웃음)


기자간담회에서 강력하게 주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돌직구’ 리더 스타일이신가요.
“저를 어려워하는 직원들이 많지만 또 때로 함께 어울리기도 잘하지요. 제가 수시로 지방 매장을 다니며 직원들의 목소리를 듣는데 그들의 열정에 가슴이 찡할 때가 많습니다.”


최근에는 중견기업 경제사절단으로 박근혜 대통령과 중국에 다녀오셨지요.
“중국에 우리 매장이 있으니까 시찰 차원에서 방문했어요. 사실 박근혜 정부의 기조인 동반 성장이나 사회 공유가치창출 등은 다이소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기도 하거든요. 앞으로 중소·중견기업에 많은 힘을 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대통령께 전달했죠.”


다이소가 표방하는 사회 공유가치창출은 어떤 의미입니까.
“사실 이런 구조의 사업을 누가 하겠어요. 장사는 무조건 남기는 게 원칙인데, 수천억 원을 투자하고도 1% 마진도 얻지 못하는 일을요. 그럼에도 우리는 쉬는 날도 없이 세계 어디든 뛰어다닙니다. 박리다매를 하다 보니 매장 직원들 손은 늘 꺼칠꺼칠합니다. 그래도 손님들에게 좋은 제품을 싸게 판다는 기쁨과 보람에 견디죠. 가방이나 반지는 명품 숍에서 사되, 생활 소모품은 다이소에서 저렴하면서도 질 좋은 것을 구매하는 건 생활의 지혜입니다. 현명한 소비를 돕는 이런 게 진정한 사회봉사 아닌가요. 내 주머니만 생각하는 사업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게 베푸는 일 아닙니까.”


실생활에서도 다이소 제품을 많이 사용하시겠어요.
“제가 원래 검소한 편이라 다이소와도 잘 맞아요.(웃음) 휴지도 두세 번은 사용하고 버리죠. 집사람도 주기적으로 다이소에서 시장을 보기 때문에 물건들이 집 안 곳곳에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사무용품은 일체 우리 것만 쓰고요. 저는 지방 출장이 잦아 차 안에서 과자도 즐겨먹습니다. 맛있고 저렴한 과자들이 참 많더라고요.”


앞으로 다이소를 어떤 기업으로 만들고 싶나요.
“아직 큰 그림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운동도 언제 했는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일에 파묻혀 있거든요. 현재 900개인 매장 수를 더 늘리겠다는 욕심은 없어요. 다만 100년, 200년 장수하는 기업으로 성장했으면 합니다. 이제는 규모가 커져 내가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게 됐어요. 묵묵히 걸어가는 방법밖엔 없지요. 다만 그 길이 즐거웠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2~3년 동안 국내 시장에 주력한 뒤 이후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해외 시장 개척에 힘을 쏟을 계획이고요.”


박 회장이 매장을 자주 찾는 이유는 고객의 소리를 듣기 위함도 있다. “그래 다이소에 가면 재밌어. 없는 게 없으니 참 좋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과도한 업무로 인한 피곤함도, 역마진 걱정도 모두 눈 녹듯이 사라진다고 했다. 높은 수익을 내지 못하니 실패한 사업가라 해야 할까. 하지만 소비자를 널리 이롭게 하고자 하는 그의 뚝심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