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하 소장의 판교 단독주택

집은 건축가의 작품일까, 건축주의 개성을 담은 고유의 소유물일까. 건축주 고유의 삶을 반영한 건축가의 예술품이라고 하면 우문에 대한 현답이 되려나. “건축가는 예술가이자 엔지니어다”라고 말하는 이재하 소장은 자타공인 예술가에 가깝다. 조형미가 있되 공간 미학을 통해 드라마틱한 체험과 재미가 있는 집, 판교 주택 ‘명장’으로 통하는 이 소장의 ‘작품’들은 그렇게 한 줄로 정의된다.
[BEYOND ARCHITECTURE] 그림 그리듯 조각 하듯…화가의 감성으로 집을 다뤘다
완공된 집들, 공사 중인 집들, 그리고 앞으로 들어설 집들까지 합해 전체 2000여 채의 고만고만한 단독주택들이 들어설 판교 주택단지는 거대한 주택 전시장과도 같다. 약 231.4m²의 비슷한 규모, 비슷한 성격의 대지지만 설계도 시공도 각각 다른 주택들이 나름의 개성을 뽐내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한편으론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조형미를 기준으로 했을 때 같은 조건이라도 해도 얼마나 다른 집이 탄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학습의 장이기도 하다.

여기에 하나 더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 일대는 이재하 소장이 지은 주택들이 모인 개인의 주택 전시장 같은 곳이기도 하다. 집은 곧 자신의 작품이라는 사명감으로 ‘한 땀 한 땀’ 지어 완공한 주택이 열 채를 훌쩍 넘어 스무 채에 가까워지고 있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이 소장의 주택들은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게 없는데도 판교 주택단지를 돌다 보면 ‘디자인드 바이 이재하’임을 눈치 챌 수 있는 건 바로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외관 때문. 특정 지역에서 한 건축가가 지은 집이 이토록 많다는 건 그 자체로 놀라움이자 건축주들의 만족도를 드러내는 단적인 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소장이 ‘판교 주택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데는 결과물 자체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건축주들의 목소리 또한 크게 작용했다. 한 채, 두 채 이 소장의 집들이 들어서던 초기, 누군가는 그 조형미에 반해 수소문 끝에 찾아오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실제 거주 중인 건축주의 적극적인 호평을 듣고 설계를 의뢰했다. 그저 아름답기만 한 집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삶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려 몸과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집이라는 ‘팩트’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었다. 2009년 세계적 건축상 중 하나인 시카고 아테나움 국제 건축상을 수상한 전력보다 그가 지은 집들이 이 소장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켜 주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이 소장이 지은 집에는 조형미와 함께 기능성, 감성, 그리고 재미가 담겨 있어 늘 사는 일상도 항상 새롭고 즐거워야 한다는 생각이 녹아 있다. 여기서 조형미가 건축가의 몫이라면, 기능성과 감성은 건축주의 삶을 담는 그릇이 되고, 재미는 이 모든 것을 더 빛내 주는 디테일이 된다.

“집을 쉽게 지어서는 안 됩니다. 내부 구조는 물론이고 안에서 이동할 때도 드라마틱한 체험과 놀라움이 있어야 해요. 바깥 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는 변화, 거실과 침실, 주방 등 모든 실들의 재미있는 관계, 공간을 열고 닫을 때의 특별한 경험 등을 통해 놀라움을 체험하는 집이라야 하죠. 또 많은 건축 재료들을 통해 다양한 감성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건축가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때론 그림 그리듯이 조각 하듯이 화가의 감성으로 집을 다뤄요. 건축가는 건축주의 삶과 취향, 바람까지 담은 통합적 작품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니까요.”


작은 주택의 장점 십분 활용한 즐거운 공간감
한 지역에서 여러 채의 집을 짓다 보니 이 소장의 고민은 날로 깊어만 간다. 동일 지역이란 조건이 아니더라도 매번 다른 집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과 열정 때문에 힘든 길을 자처하는 셈이다. 판교에 지은 여섯째 주택인 ‘545-4번지’ 역시 이전 집들과는 분명 달랐다. 건축가의 감성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작은 규모와 건축 재료의 변화를 통해 또 한 번 세상에 하나뿐인 집이 탄생했다.

판교동에서 가장 작은 집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인 이 집의 실제 규모는 약 148.76m². 건축주는 작은 집을 짓고 싶어 했다. 그만큼 마당을 넓게 쓰겠다는 의지도 있었고, 집을 짓기 전 아내와 사별하면서 딸 하나와 단 둘이 사는 터라 아늑하고 포근한 작은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갑작스런 암 선고로 아내를, 엄마를 떠나보낸 가족들에게 이 집은 단순한 거주가 아니라 따뜻한 치유의 공간으로서의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을 이 소장에게 맡긴 건축주의 요구 사항은 작은 규모와 더불어 중정(中庭)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 그리고 아토피가 있는 딸을 위해 좋은 재료를 쓸 것 등 딱 세 가지였다. 이 소장은 무엇보다 빛이 잘 드는 중정을 만들기 위해 집의 외형에 신경을 썼다. 2층 규모의 집이지만 동쪽과 남쪽, 서쪽으로는 1층만 두고 북쪽으로 집을 튀어나도록 배치해 중정에 빛이 충분히 들어오도록 설계했다. 그뿐만 아니라 바깥과 중정을 연결하는 문을 완전히 폐쇄하지 않고 살짝 오픈하면서 소통이 가능한 공간으로서의 의미도 두었다.

공간의 위치 또한 중정을 핵심에 두고 이뤄졌다. 1층에 위치한 거실 겸 주방과 안방은 중정을 끼고 돌아가는 형태로 배치했다. 중정 방향은 전면 유리창으로 돼 있어 어디서든 중정을 통해 외부와 소통하고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자연과의 소통은 이 집의 또 다른 화두이기도 하다. 하늘이 보이도록 양 옆으로 삼각형의 창이 뚫린 계단, 2층에서 옥상으로 나가는 유리문 프레임 안에 그림처럼 들어오는 계수나무 한 그루 등 공간적 테크닉뿐만 아니라 가공하지 않은 상태의 목재, 자연석 등의 건축 재료를 활용함으로써 휴양지에서의 체험을 집에서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2층에는 딸의 방과 세탁실, 화장실 등을 두었고, 파란색과 오렌지색의 컬러감을 활용해 1층과는 또 다른 감성을 연출했다. 방은 한쪽을 경사지는 구조로 만들고 하늘이 보이는 삼각형 창을 만들어 아늑한 느낌을 극대화했고, 건축주의 요구대로 편백나무, 히노키 등 최고의 자재를 사용했다. 중정과 함께 건축주가 특히 마음에 들어 하는 공간이 바로 딸의 방으로, 딸은 실제로 이 집으로 이사 온 후 아토피가 나았을 정도로 집 덕을 보고 있다.

모든 결과물이 그렇지만 이 집은 이 소장에게도 의미가 깊다. 처음으로 자연석을 마감재로 활용한 집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침목과 돌이 만나는 공간의 감성에 대한 스스로의 만족도가 높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3.3㎡당 비용은 700만 원 전후. 그러나 비용을 떠나 작업의 과정 자체가 까다로웠던 만큼 건축주 이상으로 이 집에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집을 지을 때마다 다 어려운데 이번엔 형태 자체가 재미난 구조라 틀 잡기가 쉽지 않았죠. 하지만 그렇게 한쪽으로 빠져나온 형태를 취하다 보니 앞쪽에 처마 있는 주차 공간이 생겨 세 대까지 눈, 비 맞지 않고 주차할 수 있게 됐어요. 집이 작아져야만 할 수 있는 설계죠.”


한옥과 현대미가 조화를 이룬 마당 넓은 집
독특한 형태 면에서도 작은 규모 면에서도 판교동 ‘641-3번지’ 주택은 ‘545-4번지’ 주택과 여러 모로 닮아 있다. 판교동에 지은 일곱째 주택인 이 집은 2세 계획이 있는 40세 전후의 젊은 부부가 건축을 의뢰했다. 젊은 시절에 일찍 단독주택의 삶을 누려 보자는 생각에 덜컥 땅을 사고 이것저것 다 끌어모아 집을 지었다는 건축주 부부의 요구 사항은 몇 가지였다. 외형적 형태상 둥근 곡선미가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것, 자연적인 소재를 활용해 대청마루와 처마가 있는 한옥 느낌을 살리고 싶다는 것, 그리고 마당을 최대한 크게 하고 싶다는 것 등이었다.

“이 집은 마당을 위한 계획으로는 아주 뛰어난 집이에요. 대지가 경사가 좀 있는데 마당을 두 단으로 해 아래쪽엔 주차장을 만들고 살짝 올려서 마당을 만들었죠. 그러다 보니 사생활 보호가 자동으로 확보된 측면이 있었습니다. 지하 차고를 제외하곤 집 자체도 165.28m²로 규모가 크지 않지만, 마당은 판교에서 제일 큰 집이에요. 그게 가능했던 게 집을 전체 땅의 한쪽으로 몰아 동향으로 배치하는 강수를 두었기 때문이죠.”

이 집 역시 1층과 2층의 레벨을 다양하게 구성했다. 1층엔 대청마루와 처마의 느낌이 물씬 나는 거실과 주방을 두었고 2층에는 부부 침실과 서재, 세탁실 등을 오밀조밀하게 배치했다. 지하주차장을 만드느라 들어 올린 구조를 취하다 보니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지점에 중간층이 생겼고, 거기에도 작은 방과 화장실 하나가 들어서는 등 공간적 재미가 곳곳에 배어 있다.

방부목이라는 소나무에 수성 계열의 흰 페인트를 칠하고 빈티지 느낌이 나도록 샌딩을 한 마감재와 함께 이 소장이 지은 집에 공통으로 적용된 색감은 이 집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천장은 거친 느낌의 원목으로 하고 주방은 오렌지색으로, 바닥은 검은색으로 마감한 한옥 느낌의 1층은 건축주 부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공간. 이 소장에게는 좀 더 실험적인 건축임에 틀림없었다.

“처마와 대청마루, 외형의 둥근 볼륨 등이 총체적인 실험이었어요. 특히 대청마루와 처마를 현대적인 집에 적용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었죠. 상현재에서도 처마 디자인을 하긴 했었지만, 그땐 모던한 스타일이었다면 이번엔 좀 더 전통적인 한옥 느낌이 강했으니까요. 대청마루가 있는 거실과 마당의 경계를 건축주가 무엇보다 만족스러워하니 힘든 만큼 보람이 있죠.”

이 소장의 판교 주택 작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설계 중인 집이 두 채, 공사 중인 집이 세 채이니, 앞으로 또 어떤 다른 작품들이 탄생할지 기대되는 부분이다. 불편함을 주는 작품은 집으로서 의미가 없겠지만, 즐거운 집이 아름답기까지 하다면 금상첨화 아닐는지.
[BEYOND ARCHITECTURE] 그림 그리듯 조각 하듯…화가의 감성으로 집을 다뤘다
[BEYOND ARCHITECTURE] 그림 그리듯 조각 하듯…화가의 감성으로 집을 다뤘다
[BEYOND ARCHITECTURE] 그림 그리듯 조각 하듯…화가의 감성으로 집을 다뤘다
[BEYOND ARCHITECTURE] 그림 그리듯 조각 하듯…화가의 감성으로 집을 다뤘다
[BEYOND ARCHITECTURE] 그림 그리듯 조각 하듯…화가의 감성으로 집을 다뤘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 사진 이승재(인물) 기자·박완순(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