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신데렐라, 에너자이저,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 ‘우리 선희’에는 선희를 아는 세 명의 남자가 나온다.

흥미로운 건 선희는 분명 한 명인데 세 남자가 선희를 기억하는 방식은 각자 다르다는 것. 대중이 피아니스트 손열음을 기억하는 방식은 그와 반대다. 피아노 천재, 음악계의 신데렐라, 그리고 무대 위의 에너자이저…. 이 일관된 이미지 너머의 손열음이 궁금했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그리고’에 방점을 찍고 싶은 건 그래서다.
[BREAK FOR MUSIC] 손열음을 기억하는 몇 가지 방식
신기하게도 손열음의 음악을 접할 때면 고정된 패턴이 반복된다. 먼저는 무대 위를 꽉 채우고도 남는 아우라에 눈길이 가고, 듣다 보면 어느새 시선은 허공에 머문 채 온몸의 세포가 귀로 집중되는가 하면, 연주가 끝난 뒤엔 다시 러블리한 미소로 청중을 사로잡는 모습에 홀딱 마음을 뺏긴다. 끼와 스타성이 다분한 데다 누구나가 인정하는 실력으로 무장하고 있으니 듣는 클래식과 보는 클래식 두 가지 면을 모두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그이지만, 적어도 기자에게 손열음의 음악은, 무대는 그렇단 얘기다. 올해로 스물일곱, 이 젊디젊은 피아니스트의 골수팬을 자처하는 수많은 이들이 손열음이란 이름에 대해 기억하는 방식은 그렇듯 각자 다를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열음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은 몇 가지로 압축된다. 피아노 천재, 혜성같이 떠오른 음악계의 신데렐라, 무대 위에서 발산하는 무한 에너지…. 틀리지 않다. 먼저 손열음은 과연 천재다. 다섯 살부터 피아노를 시작한 손열음은 1997년 러시아 영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로 입상하면서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의 영재 콘서트 첫 주자로 발탁됐고, 만 15세의 어린 나이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예비학교를 통해 영재로 입학해 김대진 교수를 사사했으며, 2002년 이탈리아 비오티 국제 콩쿠르 1위, 2004년 제1회 금호음악인상 수상, 2009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2위, 2011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2위를 하는 등 일찌감치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뒤 독일 하노버 국립음악대학에 입학, 최고연주자과정에 재학 중인 그는 현재 하노버에 거주하며 명교수 아리에 바르디를 사사하고 있다.

이렇듯 손열음의 지난날은 오로지 ‘피아노’뿐이었다. ‘혜성같이 떠오른 신데렐라’라는 수식어가 적어도 그가 걸어온 길을 아는 이들에게는 설득력이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일면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 손열음의 무대가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선보이면서 그는 분명 일약 스타가 됐으니까. 보통 남자 악기로 알려진 피아노를 남성 피아니스트보다 더 과감하고 힘 있게, 그러나 넘치도록 풍부한 감정을 담아 연주하는 모습도 그렇지만, 시종일관 유쾌하고 위트 있고 사랑스럽게 팬들과 소통하는 모습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BREAK FOR MUSIC] 손열음을 기억하는 몇 가지 방식
낯가림이 심한 타고난 무대 체질, 그 간극
자, 그럼 우리가 기억하고 기대하는 손열음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하기로 하고, 이제 그의 이야기를 생생한 목소리로 직접 들어볼까. 결론적으로 손열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손열음이기도 했고 정말 뜻밖의 손열음이기도 했다. 인터뷰는 대관령국제음악제가 끝난 후 이뤄졌는데, 현장에서 손열음의 무대를 지켜본 이들의 감탄으로 직접 보지 못한 아쉬움이 더 큰 터였다.


지난 대관령국제음악제를 너무나 가고 싶었는데 못 갔답니다. 어땠어요.
“그 기간 동안 매우 바쁘게 지냈지만 좋은 시간이었어요. 대관령국제음악제는 실내악 축제 형식이다 보니 매일 리허설이 이어지고, 그러다 보면 2주가 정신없이 가버려요. 내년에는 꼭 오세요.”


9월 말 도이치라디오필하모니와 몇 차례 국내 공연이 있고, 12월에도 국내 공연이 있더군요. 팬들에겐 아주 반가운 소식인데요. 어떤 걸 기대하면 될까요.
“도이치라디오필하모니와는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협연합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이후로 제일 많이 연주하게 된 곡인데도 뜻하지 않게 한국에서는 연주할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더 뜻 깊게 생각하고요. 12월의 공연은 ‘토크 앤 콘서트’라는, 토크쇼와 음악회가 접목된 친근한 성격의 공연입니다. 5월부터 매진이 됐다고 해서 정말 감사하고 저도 기대를 많이 하고 있어요.”


전 세계를 다니며 공연하고 있는데, 특히 국내 공연 무대가 좀 남다른 점이 있나요.
“여러 면에서 제일 신경이 많이 쓰이는 공연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의 성장 과정을 쭉 지켜본 관객들을 위한 무대이다 보니, 레퍼토리도 늘 새로운 것을 고민하는 편이고 연주 자체도 다른 무엇보다 어떻게 발전됐는지에 대한 모습을 좀 더 보여드리려 노력하는 것 같네요.”


거주하는 하노버에서의 삶은 어때요. 스케줄을 생각하면 거주지의 의미가 딱히 없겠다 싶기도 하지만요.
“많이 돌아다녀서 오히려 거주지의 의미가 더 큰 것도 같아요. 중간 중간 집에서 보내는 짧은 시간이 전후의 일을 크게 좌우하기도 하고요. 하노버는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한적해서 머리와 마음을 비우기에 좋은 곳입니다. 친구들이랑 매일 만나서 놀고, 운동도 하고, 요리도 한답니다.”


몇 달 전 인터뷰차 만난 김대진 교수님이 손열음 씨에 대한 첫인상으로 ‘조용한데 당찬 아이’라고 표현했어요. 지금과는 어떻게 같고 또 달라졌을까요.
“남이 어떻게 봤을지는 모르겠는데, 저 스스로는 당시 저를 낙천적인 천성과 우울한 감정선 사이에서 엄청 널을 뛰던 아이로 기억해요. 많은 사람들이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지만, 저는 소원을 들어줄 테니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라고 해도 절대 그러고 싶지 않을 정도로 별로 행복하지 않은 아이였어요. 그리고 정말 눈에 띌 정도로 낯을 많이 가렸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똑같아요.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있냐고 하면 룸서비스라고 할 정도로 말이죠. 그래서 그 간극이 굉장히 괴로워요. 그렇게 낯을 가리면서는 살 수가 없는 직업이라….”


어릴 때부터 콩쿠르에 굉장히 많이 나갔고, 뭐 수상 경력은 말할 필요도 없죠. 콩쿠르에 나가는 건 열음 씨 개인에게는 어떤 의미였어요.
“사실 저 정도면 많이 나간 것도 아니에요. 저보다 훨씬 많이 나가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죠. 제 경우엔 어렸을 적에는 나가기 싫은 콩쿠르도 나가야 되는 줄 알고 억지로 간 적이 꽤 있었어요. 그때는 정말 그래야 되는 줄 알았죠. 대신 재미는 있었어요. 거기 가면 다른 잘하는 친구들 연주도 마음껏 보고 들을 수 있어서 그게 특히 공부가 많이 되고 좋았어요.”
[BREAK FOR MUSIC] 손열음을 기억하는 몇 가지 방식
일각에서는 콩쿠르를 중시하는 국내 분위기에 대한 비판도 있어요.
“콩쿠르에 대한 의견은 너무 많아 짧게 말씀드리기가 좀 힘들지만, 그래도 결론만 말해볼게요. 누군가가 콩쿠르에 과도하게 집착한다면 그건 그다지 건강하지 않은 것일뿐더러 시대를 역행하는, 좀 비생산적이고 바보 같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 시점에서 콩쿠르라는 것이 아예 없으면 어떨까요. 일단 음악이 한없이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은 맞죠. 그래서 그걸 등수로 따지는 게 말이 안 되는 것도 맞아요. 하지만 저는 특히 클래식 음악의 경우, 개성 이전에 객관적인 실력이라는 게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를 테면, 1000명의 피아니스트가 다 똑같이 개성 있고 훌륭한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그중 100명 정도는 재주가 있고, 10명 정도는 정말 뛰어나겠죠. 개성이란 그 10명의 피아니스트에게만 해당되는 말인 거예요. 전 그 정도를 가려주는 콩쿠르라면 어쩌면 필요한 것이라고도 생각해요.”


너무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면서 개인의 삶을 포기한, 피아니스트의 삶을 살았잖아요. 힘들지는 않았어요.
“피아노를 연주하는 삶은 사실 정말 행복한 삶이에요. 늘 새로운 걸 배우고, 깨닫고, 느끼고, 마음껏 듣고, 너무 좋죠. 그런데 피아노를 치러 돌아다니는 삶은 힘들어요. 특히 저처럼 모르는 사람 만나는 걸 힘들어하고 세상에서 자기 홍보를 제일 못하는 스타일의 사람은 더 그렇고요.”


제가 음악 전문가도 아니고 또 어차피 음악은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리니 일반화하긴 어렵겠지만, 손열음 씨 연주를 들으면 자꾸 스토리가 들려요. 곡을 해석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다면 뭔가요.
“제가 지금 사사 중인 아리에 바르디 선생님께서는 젊었을 때 작곡도 공부하셨는데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작곡가를 드러낸다며 작품 뒤로 숨는 연주자는 오히려 작곡가의 의도를 역행하는 거라고. 장담하건대 모든 작곡가들이 원했던 건 자신들의 의도가 연주자가 뽑아낼 수 있는 최대한의 개성, 혹은 기질과 맞물리면서 빚어내는 음악이지 그저 수동적 리바이벌이 아닐 것이라고요. 저도 그 말씀에 동의해요. 그래서 그 접점을 찾는 것에 가장 주력하죠. 그러니까 작곡가의 의도가 연주자로서 나의 장점을 통해 완벽한 시너지를 이루며 전달되는 것 말이에요. 그걸 정말 딱 50대50, 아니 100대100으로 만드는 것을 연구하는 게 제 삶인 거죠. 보통은 악보를 많이 연구하다 보면 악보에서 직접 영감을 많이 받게 돼요. 말씀하신 ‘스토리’는 그다음으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그 어떤 음악도 내러티브 없는 음악은 없으니까요. 안 그런 연주자도 많지만, 저는 곡마다 확실한 시나리오를 구상해 놓는 스타일이에요.”


피아노 외 다른 매체에 관심이 많죠. 한 매체에 칼럼을 연재 중이기도 하고요.
“피아노 말고 하는 거라곤 딱 하나 칼럼 연재뿐이고요. 특별히 다른 것에 관심 가지기에는 아는 게 별로 없어요. 다만, 유일하게 완전 발끝 정도만 담갔다 할 수준 정도의 학문이라면 역사인데, 역사가 곧 정치, 정치가 곧 심리학, 심리학이 곧 음악이니 다 통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뭐, 잘 모르겠어요.(웃음)”


누군가는 “피아니스트는 40대에 꽃을 피운다”고 얘기했어요. 손열음 씨는 벌써 꽃을 피운 걸로 보이거든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금 연주자의 인생에서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는 것 같나요.
“피아니스트는 40대가 전성기라는 일반화에는 동의하기 어려워요. 피아노는 다른 악기에 비해 개인차가 현저히 크거든요. 저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나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처럼 80대, 90대로 접어들면서 또 다른 스타일로 진화하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그렇게 치면 지금은 한 10단계에서 2단계 정도? 물론 그러려면 오래 살아야 하겠지만요.(웃음)”


사람들은 손열음 씨를 기꺼이 ‘천재’라고 부릅니다. 피아노를 하기에 적합한 ‘어떤 것’들을 타고났다고 생각합니까.
“음악성을 제외하고 답하자면, 스스로를 철저히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과 궁금한 게 많은 성격, 그리고 무대를 좋아하는 체질, 이렇게 세 가지인 것 같네요. 연주자는 스스로를 연구하고, 스스로를 분석하면서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직업이라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면 발전하기 어렵거든요. 그런 점에서 저는 다행히도 ‘피아니스트 손열음’을 정말 남처럼 봐요. 그러다 보면 자연히 자만할 일도, 주눅들 일도 없어져 더욱 편하죠. 궁금증 많은 성격은 왜 도움이 되는가 하면,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행위는 이미 누가 남기고 간 작품을 재해석하는 것이기에 실은 매우 수동적인 행위에 그치기 쉬워요. 악보에 써 있는 음표를 지시어대로만 정확히 연주해도 반은 한 셈이니까 이건 왜 이럴까 저건 왜 저럴까 하지 않으면 그저 시키는 대로 하는 어린아이처럼 되기 쉬운 작업이거든요. 그래서 저처럼 여러 가지에 호기심이 발동하는 성향이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무대 체질인 것은 순전히 행운이고요. 너무너무 재주가 많은데도 무대에 올라가는 것 자체를 고역으로 느끼는 친구들을 많이 봤거든요. 그건 연주의 질도 질이지만 삶이 너무 힘들겠더라고요.”


그럼 마지막으로, 저에게 클래식 음악은 한마디로 하면 ‘위로’거든요. 열음 씨에게는 어때요.
“이 질문을 한 백 번은 받아본 것 같은데 백 번 다 다르게 답한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는 안 정하려고요. 어차피 의미도 없고요.(웃음)”


우문에 현답이었다. 백 번의 질문 수만큼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지만 백 번 다 답이 다를 만큼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을. 그저 우리는 오래오래 손열음의 음악을 들으며 위로받고 행복하면 되는 거니까.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 사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