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전계약의 시초는 미국이다. 세계 1위 이혼율을 자랑하는 미국에서는 억만장자들이 어렵게 모은 자산을 허무하게 날리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오래전부터 혼전계약서를 작성하고 있다. 유럽이나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혼전계약을 체결해 결혼 생활에서 일어날 일들에 대비하는 예비부부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 계약서에 담는 내용은 때로 상상을 초월한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 마이클 조던, 사와지리 에리카, 잭 웰치 전 회장.
(왼쪽부터 시계 방향) 마이클 조던, 사와지리 에리카, 잭 웰치 전 회장.
한때 미국에서 “이혼하지 말아야 부자가 된다”는 말이 불문율처럼 통했다. 하지만 요즘 이 말은 “이혼을 잘 해야 부자로 남을 수 있다”로 바뀌었다.

헤지펀드 업계의 제왕 조지 소로스와 제너럴일렉트릭(GE)의 전 회장인 잭 웰치의 사례를 비교해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2002년 두 번째 이혼을 한 소로스는 두 번째 부인 수잔과 25년 동안 결혼 생활을 영위하며 두 자녀를 뒀으나 위자료 8000만 달러 수준에서 이혼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반면, 웰치는 1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한 전 부인 제인 비슬리에게 무려 1억8000만 달러를 위자료로 지급했다. 웰치보다 훨씬 부자이고 결혼 생활 기간도 길며 자식까지 낳은 소로스가 웰치보다 적은 위자료를 지급한 건 바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작성한 혼전계약서 때문이었다.

미국에서는 혼전계약서가 결혼의 필수품이 된 지 오래다. 이혼을 하면 재산의 절반가량을 부인에게 주어야 하는데, 결혼과 이혼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제아무리 억만장자라도 재산의 상당수가 위자료나 재산분할로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경제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기업 최고경영자(CEO)는 사생활도 숨기면 안 된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기업 CEO에게 이혼은 사생활이 아닌 업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는 CEO의 이혼이 재산분할, 기업 상속 등의 문제로 이어져 결국, 경영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최근 미국에서는 재혼 부부뿐 아니라 초혼 부부들도 혼전계약서를 작성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시카고의 미국혼인전문변호사학회(AAML)가 소속 변호사 16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63%가 “초혼 부부의 혼전계약 건수가 증가했다”고 답했다. 앨톤 아브라모위츠 AAML 회장은 “혼전계약서 가운데 90%는 부동산 관련 내용이 포함되는데, 부모로부터 증여받은 부동산이 결혼 후 공동 자산과 구별되도록 계약서를 작성한다”며 “만혼이 늘어난 데다 젊은 층도 과거와 달리 풍부한 금융 지식으로 무장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조지 소로스,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 부부, 지난 2012년 이혼한 톰 크루즈와 케이트 홈즈.
(왼쪽부터 시계 방향)조지 소로스,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 부부, 지난 2012년 이혼한 톰 크루즈와 케이트 홈즈.
외도 시 2000만 엔 지급, 부부관계 월 5회 제한…엽기적인 스타들의 혼전계약서
수억 원대의 몸값을 자랑하는 스타들도 혼전계약서 작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2012년 이혼한 대표적인 할리우드 커플 톰 크루즈와 케이티 홈즈는 2006년 결혼 당시 혼전계약서를 작성했다. 각자의 수입은 개인이 소유하고 관리하며 결혼 후 톰 크루즈가 케이티 홈즈에게 매년 300만 달러를 지급하는 조건이었다. 홈즈는 출산의 대가로 2500만 달러와 캘리포니아 몬테시토의 호화 저택도 선물로 받았는데, 이 역시 계약 조항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브란젤리나 커플’로 유명한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 역시 2012년 결혼식에 앞서 소유 자산과 자녀 양육에 관련된 내용이 포함된 2억7000만 달러 상당의 혼전계약서를 작성해 눈길을 끌었다. 2014년 5월 결혼식을 올린 톱모델이자 영화배우인 킴 카다시안과 팝 가수 카니예 웨스트의 혼전계약서에는 웨스트가 카다시안에게 매년 100만 달러를 지급하는 내용이 명기돼 있다. 두 사람은 이혼할 경우 웨스트의 2000만 달러의 보험 수령인을 카다시안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결혼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연예계에 숱한 스캔들을 뿌린 제니퍼 로페즈와 벤 애플렉 커플은 2003년 ‘둘 간의 성관계는 최소 주 4회, 아기는 로페즈가 원할 때 가질 것, 바람피우면 벌금 500만 달러, 고의로 거짓말할 때는 벌금 100만 달러, 러브신 촬영은 배우자의 입회하에 가능’ 등 기발한 조항의 혼전계약서를 체결해 주변을 놀래킨 바 있다.

일본의 톱 여배우 사와지리 에리카와 스물두살 연상의 사진작가인 다카시로 츠요시의 혼전계약서 내용도 엽기에 가깝다. 계약 내용인 즉, 혼인 생활 중에 츠요시가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할 경우 1000만 엔, 성행위를 할 경우에는 2000만 엔을 추가로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 외에도 부부관계는 월 5회로 제한하고, 그 이상은 1회당 50만 엔을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과 이혼 시 다카시로의 재산 가운데 90%를 사와지리가 차지한다는 극단적인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지난해 위자료 없이 협의 이혼했다.

이와 반대로 혼전계약서를 쓰지 않아 거액의 위자료를 물게 된 불운의 재벌들도 있다. 스위스 법원은 지난 5월 프랑스 축구클럽 AS모나코의 구단주인 러시아 거부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와 아내 엘레나 리블로블레바의 이혼 소송에서 엘레나에게 45억937만 달러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엘레나는 2008년 이혼 소송을 내면서 60억 달러를 요구했다. 드미트리가 현재 가진 재산은 약 88억 달러로, 1심 판결이 확정되면 재산의 절반 이상을 날리게 된다.

‘농구천재’ 마이클 조던은 특이하게 결혼 1년 뒤인 1990년 ‘혼후’ 계약서를 작성했다. 이혼 시 재산의 3분의 1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조던의 재산은 많지 않았으나 이혼 판결이 내려진 2007년에는 수억 달러 규모로 불어나 있었다. 결국 1억6800만 달러를 지급했다.


이윤경 기자 ramj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