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의 ‘검은 돈’ 은닉처로 여겨졌던 금고가 대중화되고 있다. 초저금리에 세계경제가 쉽사리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론이 확산되면서 자산가들이 현금 등을 선호하는 추세가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5만 원권 보유 심리와 금값 반등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홈쇼핑과 백화점 등에서 가정용 금고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세수 확보를 위한 세정 당국의 ‘압박’이 높아진다는 점 역시 현금성 자산을 내 집에 보관하려는 심리 확산을 부추기고 있다.
[TREND REPORT] 현금자산 선호시대! ‘개인 금고’ 판매량으로 읽는 경제학
“여행 다녀온 사이 도둑이 들었는데 금고 외관만 조금 손상되고 한 푼도 안 털렸어요. 같은 금고를 더 주문할 수 있을까요.”

금고 전문 업체 김 모 과장은 얼마 전 부산에 사는 개인 고객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밤손님’이 들었지만 금고에 보관한 골드바와 귀중품은 안전했다는 내용이다. 이 고객은 바로 같은 금고를 2대 더 주문했다. 김 과장은 “도난을 면한 고객들이 금고를 다시 구매하는 사례가 느는 추세”라고 귀띔했다.


금고 전성시대…홈쇼핑·백화점에서 불티나게 팔려
요즘 가정용 금고 판매가 ‘특수’를 맞고 있다. 2014년 11월 말 NS홈쇼핑에서 진행한 선일 가정용 금고 ‘루셀’은 밤 11시 40분이라는 늦은 시간에도 완판 기록을 세웠다. 권영석 선일금고 과장은 “2014년 개인 금고 판매량이 전년보다 40% 이상 급증했다”고 밝혔다. 이 업체는 2009년 처음 백화점에 입점한 뒤 현재 롯데, 신세계, 현대 등을 비롯해 전국 백화점 30여 곳으로 매장을 늘렸다. 금고업계는 “일부 부유층이나 기업 경영자들이 뭉칫돈이나 중요 문서들을 보관하던 금고가 일반 가정용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금고의 대중화’로 백화점에서 금고 매장의 위상도 올라가고 있다. 임시 매장에서 정식 매장으로 승격되거나 고객의 통행이 활발한 ‘목 좋은’ 위치로 매장이 이동하고 있다.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매장을 담당하는 장재민 선일금고 매니저는 “최근 들어 30, 40대 고객 비율이 늘어나는 추세지만 고객의 대부분은 중년의 여성 고객들”이라면서 “금고의 기본적인 보안성은 물론 현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묻는 고객도 상당하다”고 소개했다. 가족 수대로 금고를 구매하는 ‘큰손’도 종종 있다.

홈쇼핑업체들 역시 금고 판매 방송에 적극적이다. 30년 넘게 해외 수출에만 주력한 금고업체 디프로매트는 홈쇼핑을 통한 금고 판매를 고려하고 있다. 정영훈 디프로매트 대표는 “요즘 개인 금고 수요가 급증하면서 내수시장의 파워를 피부로 느낄 정도”라고 말했다.

서울 청담동에 사는 40대 후반의 가정주부 박 모 씨는 “한때 강남 주부들 사이에서 이사를 하거나 카페를 개업할 때 가정용 금고를 선물하는 것이 유행”이었다면서 “최근엔 인테리어 리모델링 공사 때 붙박이장처럼 벽 뒤로 금고 공간을 마련하거나 빌트인으로 주문 제작하는 집들도 상당하다”고 전했다. 금고를 넣는 장소를 드레스 룸이나 일반 벽 뒤로 배치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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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고 판매 급증의 배경…자산 노출 꺼리고 현금·골드바 선호
가정에서 사용하는 개인 금고 판매량이 크게 늘어난 이유는 무엇보다 현금성 자산 보유 심리가 가장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초저금리 기조에 국내외 증시 등이 얼어붙으면서 투자자들이 돈을 잘 ‘불리기’보다 ‘지키기’에 주력하는 등 보수적인 심리가 확산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신동일 KB국민은행 대치점 PB센터 팀장은 “은행 대여금고를 사용하는 고객들도 대부분 집 안에 따로 가정용 금고를 두고 사용한다”며 “유명 대기업의 종사자보다는 아무래도 현금을 많이 보유하는 개인사업자 고객일수록 가정용 금고를 사용하는 비중이 높다”고 전했다.

자산가들의 돈이 ‘금고’ 속으로 숨어드는 현상을 두고 우리에 앞서 초저금리와 노령화를 경험하고 있는 ‘금고의 나라’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직후 당시 외신들은 수천 개의 금고들을 건져 올린 사진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제로(0) 금리 시대가 20년 이상 지속된 일본에서 은행에 돈을 맡길 이유가 없었던 노인들이 집에다보관하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잇따라 일어난 시중은행의 무단 인출 사고도 불신을 키웠다. 억대 단위의 예금이 무단 인출됐으나 원인 파악도 못하는 농협에 대해 ‘현금은 마늘밭에, 마늘은 농협에’라고 비아냥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댓글이 화제였다. 그런가 하면 우리은행의 텔레뱅킹 무단 인출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는 금융 당국과 은행의 안일한 대처로 등을 돌리는 고객이 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은행이 발권한 5만 원권 환수율의 꾸준한 감소도 금고 사용과 관련이 깊다. 5만 원권 환수율은 2012년 61.7%이던 것이 2014년 3분기 기준 19.9% 가까이 떨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세운 주요 공약이 ‘지하경제 양성화’였지만 세금 우려로 금고 속에 보관하는 현금이 늘었다는 분석이다. 남대문에서 10년 넘게 액세서리 도매업을 하는 100억 원대 자산가인 50대 P씨는 “가게마다 세무조사를 안 받은 곳이 없기 때문에 요즘 다들 백화점에서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흔적이 남지 않도록 카드 사용은 일절 안 하고 현금을 쓰는 분위기”라며 “거래처와의 돈거래도 무조건 현금으로 한다”고 밝혔다. 수입은 대부분 집 안 금고에 보관하며, 은행에서 5만 원권으로 바꾼 뒤 보관하는 업주들도 크게 늘었다고 전했다.

그런가 하면 금융소득종합과세 부과 기준이 강화됨에 따라 세원 노출을 꺼리는 자산가들이 세금을 피하기 위해 현금 보유와 함께 눈을 돌리는 것이 바로 금이다. 유가 하락과 달러 강세 속에 금값이 하락하면서 판매량이 늘고 있다. 한국금거래소에 따르면 2014년 골드바 판매량이 2013년 대비 2배 가까이 늘었다고 한다. 증여세 없이 자식에게 증여가 되는 데다 국세청에서도 파악이 쉽지 않아 ‘자산 숨기기’가 중요해진 자산가들을 위한 투자처로 떠오르는 것. 차명계좌를 금지하며 더욱 강화된 금융실명제를 비롯해 지하경제 양성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세무조사, 해외계좌 추적이 강화되고 금값의 약세에 따른 수요 급증 등의 제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파생된 금고 인기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황세영 한국씨티은행 CPC강남센터장은 “미국의 양적완화(QE)가 종료되면서 금리 인상의 영향이 유럽, 일본 등에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향후 금값이 다시 상승할 여지가 높은 만큼 금 보유 심리가 강해지면서 금고의 인기 역시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금고의 진화…IT 결합한 지능형 금고, 아트 퍼니처 역할까지
이와 같은 배경에 힘입어 국내 가정용 금고 시장은 연간 1000억 원 규모로 매년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 가정용 금고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늘면서 금고업계도 큰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사무실이나 은행, 금융권에서 사용하는 사무용 금고에 주력해 온 금고업체들이 너도나도 기술력을 앞세워 가정용 금고 신제품을 잇달아 내놓고 기술개발에 매진 중이다.

국내 금고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는 선일금고는 2005년 강원도 낙산사 화재 사건이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됐다. 절 안에 있던 커다란 동종(銅鐘)이 녹아내렸지만 선일금고의 금고는 녹지 않고 내용물을 안전하게 지켰다. 화재가 났을 경우 아주 작은 구멍이라도 생기면 그 안으로 불길이 세어 들어가 금고 기능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이 때문에 불에 견디는 내화 기능이 금고 기술력의 첫째 척도다. “불에서 얼마나 잘 견디는지를 측정하는 내화 인증을 받으려면 섭씨 1010도에서 1시간을 버텨야 하고 내부 온도는 150도 이하로 유지해야 하는 것이 자격 요건”이라고 업계 관계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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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금고의 기능성이 내화에 치중됐다면 최근에는 침입자를 막아내는 방도(防盜) 기능에 역점을 두는 추세다.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고 범죄가 갈수록 지능화돼 가고 있기 때문. 방도 금고는 통상 5중 철판으로 외부를 감싸 전기 드릴 등의 공구로 뚫을 수 없도록 설계된 제품군이다. 선일금고의 신제품 ‘루셀 3000’은 애플리케이션과 연동되는 카메라가 부착돼 있다. 3m 이내에 움직임이 포착되거나 금고에 외부 충격이 가해지면 곧바로 사용자의 앱으로 알람이 울리도록 설계했다. 이 기능으로 일본공업규격(JIS)의 방도 인증도 받았다.

정보기술(IT)을 접목한 금고도 등장했다. 큐브시큐리티의 제맥스 알레그레는 금고에서 발생하는 이상 징후를 고객의 휴대전화에 실시간 문자 메시지로 알려주는 기능을 탑재했다. 특히 스마트폰 앱을 통해 원격 제어가 가능하다. 또한 장기 출장 기능이 있어 사용자가 장기간 자리를 비우는 동안은 금고 사용을 중지시킬 수 있다. 원하는 경우 비밀번호를 1회 문자로 전송받아 금고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철벽 보안성이 강화됐다. 터치스크린과 지문인식 기능을 더한 잠금장치 기능이 더해진 금고도 있다.

이 같은 최첨단 IT 기술이 접목된 잠금장치 기능과 함께 최근 화려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가정용 금고가 인기다. 그동안 무겁고 칙칙한 무채색 일색의 투박한 금고 대신 화려한 색과 장식으로 집 안 인테리어와 잘 어울리는 디자인 금고가 대세. 명화를 좋아하는 중년 여성들의 취향을 겨냥한 듯 고흐나 클림트의 유명 그림을 전면 패널에 넣은 디자인의 금고가 있는가 하면 화려한 스와로브스키 보석으로 장식해 아트 퍼니처 못지않은 금고도 눈에 띈다. 한국적인 전통 자개를 붙이거나 부귀를 상징하는 전통 나비 문양으로 장식된 금고도 인기몰이 중이다. 디프로매트에서는 최근 북유럽 인테리어 유행에 어울리는 프리미엄 금고 ‘디바움’을 신제품으로 내놓아 화제다. 월너트 원목 패널로 전면을 장식한 이 제품은 깔끔한 디자인의 원목 패널로 마감했다. 언뜻 보기에 멋스러운 소가구로 보일 만큼 기존 금고에 대한 인식을 깨준다. 정 대표는 “금고가 하나의 가구처럼 인식되는 추세”라면서 “인테리어 박람회에서도 일반 금고보다 가격이 3배 가까이 높은 데도 불구하고 프리미엄 디자인의 금고에 대한 관심과 판매율이 훨씬 높았다”고 소개했다.



금고에 돈은 얼마나 들어갈까
[TREND REPORT] 현금자산 선호시대! ‘개인 금고’ 판매량으로 읽는 경제학
금고의 규격이 877×502×501cm (높이×넓이×깊이) 기준으로 했을 경우 1만 원권은 2억5800만 원, 5만 원권은 12억9000만 원을 보관할 수 있다. 금고 매장에는 “얼마나 들어가느냐”는 고객의 질문에 대비해 금고 안에 모조 돈다발과 골드바를 채워 전시하는 경우가 많다. 백화점 관계자는 최근 금고에 현금 보관과 함께 패물이나 그림 등 미술품을 보관하려는 고객들이 늘고 있어 가정용 금고의 크기도 점차 커지고 있는 추세라고 밝혔다.



보안성과 디자인 두루 갖춘 금고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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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프로매트 넥스트
2가지 비밀번호 이용으로 이중 잠금장치가 가능하고 터치스크린이나 지문인식으로도 작동이 가능하다. 100만 원대.



디프로매트 디바움 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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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인테리어 유행을 반영한 디자인 금고. 전면에 부착한 월너트 원목 패널은 나뭇결이 살아 있어 멋스러운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훌륭하다. 100만 원대.



제맥스 알레그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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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고에 이상 징후가 감지되면 바로 사용자의 휴대전화로 실시간 문자 서비스가 전송된다. 고객 전용 웹사이트에서 사용이력을 조회할 수도 있다. 100만 원대.



루셀 2000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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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화를 연상케 하는 은은한 모노톤의 플라워 디자인이 돋보인다. 200만 원대.



루셀 2000BP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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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그림 도안이 전면 패널에 부착돼 카페 같은 홈인테리어를 완성시키는 금고. 260만 원대.



루셀 2000G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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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금 장식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금고. 고감도 알람 시스템이 장착돼 있다.

400만 원대.


제품 문의 루셀 042-255-2555, 디프로매트 080-070-4400, 제맥스 02-3453-9690


기획 박진영 기자 | 글 이지혜 객원기자 | 사진 한국경제DB·각 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