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와 꾼들의 세상,
한 우물을 판 사람들

한 시대를 특정하는 인프라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18세기 조선에는 오늘날의 창조적 인재에 빗댈 만한 새로운 지식인의 표상이 출현했으니, 이름하여 벽광나치오(癖狂懶痴傲)다.
다시 말해,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경 머니=이현주 기자]│참고 서적 <벽광나치오>·<미쳐야 미친다>

조선의 18세기는 여러모로 독특하다. 그 시대의 에너지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면면을 봐도 이전 시대와는 비교되는 특징을 보인다. 공통점을 하나 꼽으라면 버릇이나 습관을 뜻하는 ‘벽’을 가진 이가 많았다는 것. 또한 이를 예찬하는 무리가 있어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박제가는 꽃에 미친 규장각 서리 출신 김덕형의 꽃 그림책 <백화보> 서문에 이렇게 썼다.
“벽(癖)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자이다. 홀로 걸어가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 기예를 익히는 건 벽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18세기는 마니아들의 시대였다. 눈만 뜨면 꽃밭 아래로 달려가 하루 종일 꽃만 봤다는 김덕형은 얌전한 축에 속한다. 칼에 매료돼 칼마다 구슬과 자개를 박아 방과 기둥에 걸어 놓고 날마다 번갈아 차면서도 1년이 지나도록 다 찰 수 없었던 영조 시절의 악사 김억(金億), 수만 권을 독파하고 눈병에 걸려서까지 실눈으로 책을 읽어 간서치(刊書痴: 책만 읽은 바보)라 불린 이덕무(李德懋), 명문가 출신으로 돌만 보면 벼루를 깎아 석치(石癡: 돌에 미친 바보)라는 호를 얻은 정철조(鄭喆祚)도 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18세기 지식인들은 마니아적 성향에 자못 열광했다”며 “너도나도 무언가에 미쳐보려는 것이 시대의 한 추세였고 이전 시기에는 결코 만나볼 수 없던 현상이다”라고 했다.
‘벽치’들의 열정을 독특한 취미로만 볼 수 없다는 게 여러 고전 학자들의 입 모은 분석이다. 넓게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읽는 키워드로, 지식인의 조건과 인재상의 변화를 방증한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자기가 잘할 수 있고 잘하고 싶은 분야를 선택해서 새 경지를 개척한 주역들로 오늘날에는 전문가 또는 프로라고 부르지만, 당시에는 벽(癖, 고질병자), 광(狂, 미치광이), 나(懶, 게으름뱅이), 치(痴, 바보), 오(傲, 오만한 자)라는 표현이 그들을 따라다녔다”고 말했다.
이들은 18세기 조선을 뒤흔들었다. 마니아의 취향에 따라 새로운 시장을 만들뿐더러, 사상의 근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지식인들의 지적 토대는 주자학 위에 세워졌다. 물질보다 정신, 외면보다 내면적 원리를 밝히는 게 중요했고 완물상지(玩物喪志: 사물에 몰두하면 뜻을 잃게 된다)를 강조했던 학문이다. 이와 같은 전통적인 세계관과 결별하고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서도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한 이들이 18세기의 벽치들이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는 “외적 대상에 미칠 정도로 빠져드는 일은 하찮은 물건을 통해서도 도에 이를 수 있다는 태도였다”며 “이는 실학과 실사구시의 자연과학적 탐구 정신과 통한다”고 말했다.

틀을 벗어난 생각과 행동으로
틀을 벗어난 생각과 행동을 함으로써 창조적 인재로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정철조가 그렇다. 3대째 문과에 급제해 사간원 정언(正言)과 사헌부 지평(地坪) 요직을 지낸 관료였던 그가 일찍이 관직의 길을 떠나 평생 사로잡혔던 분야는 과학, 기술, 천문, 수학, 그리고 예술이었다. 상식적인 조선 지식인과는 현저히 다른 독특한 지적 취향이었다. 그는 100가지 기술을 한 몸에 지녀 천문기계와 농기구까지 직접 만들었고, 특히 벼루 깎는 것을 최고의 취미와 예술로 삼았다. 18세기의 명사와 전문인을 체계적으로 저술한 <병세재언록>에 정철조는 화가로 소개돼 있는데, “돌을 보기만 하면 품질을 따지지 않고 곧 깎기 시작해 순식간에 완성해냈으며 벼루를 책상에 가득 쌓아 두곤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곧 줘 버렸다”고 묘사하고 있다. 당시 선비라면 정철조의 벼루는 누구나 하나쯤 갖고 싶어 하는 멋진 물건이자 예술품이었다고 한다.
‘꾼’들이 활개 쳤다는 것도 또 하나의 특징이다. 취미로서 즐기는 것뿐만 아니라 전문 직업인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앉게 된 사람들이 도처에 있었다. 신분 질서가 엄격하고 직업 선택에 제한을 받았던 사회 구조에서 획일화된 길을 벗어나 나만의 길을 찾아 나서면서 프로 바둑기사, 원예가, 노비 출신 시인, 여행수 등으로 활약했다. 그중에는 선비도 있었고 중인이나 평민, 천민과 기생도 있었다.
사대부 정란은 선비의 길을 걷다가 여행가의 길로 돌아서 평생을 여행가로 살았고, 무인 집안 출신의 검객이었던 탁문환은 천민들이 즐겨 하던 탈춤판에 뛰어들어 당대 최고의 탈춤꾼이 됐다. 안대회 교수는 이들을 “‘무리와 다른 짓 하는 놈’들로서 양반이 주도하는 문화에 휩쓸리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한 조선의 프런티어들이다”라고 평가했다.
여전히 18세기는 엄격한 시대였다. 과거를 통한 정계 진출이 권력을 얻는 거의 유일한 길로 통했다. 누군가는 주류의 길에서 권력을 향한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주어진 신분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스스로의 길을 개척했던 벽치들은 ‘무엇을 따를 것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선택한 길에 자부심을 가지면서 18세기 조선을 다채롭고 건실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키워드로 보는 18세기 인문학_18세기의 인재
키워드로 보는 18세기 인문학_18세기의 인재
18세기를 빛낸 마니아와 꾼들
음악가, 김성기
숙종 시대의 저명한 음악가 김성기(金聖基)는 우리 음악의 역사에서 손꼽히는 위인이다. 숙종 시대 가장 뛰어난 거문고와 비파 연주가이자 ‘어은보’와 ‘낭옹신보’라는 악보를 남긴 작곡가 겸 시조작가다. 그는 음악가가 되기 전 궁궐의 의복과 재화, 금은보화를 관리하고 상의원(尙衣院)에서 활을 만드는 일을 하던 기술자였다. 그랬던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버리고 고집스럽게 악사의 길을 선택하며 장악원(掌樂院) 악사로 연주가로서 최고의 명예와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이다. 밤마다 남의 연주를 훔쳐 들으며 도둑 공부를 해서 얻은 결과였다. 그는 중년의 나이에 돌연 은퇴를 하고 갑자기 마포로 은거해 낚시꾼으로 한가롭게 사는 삶을 선택했다. 인생에서 두 번의 전환기를 맞은 흥미로운 인물이다.

천문학자, 김영
천문학자 김영(金泳)은 항해(沆瀣) 홍길주가 쓴 <김영전>을 통해 일생이 간략히 정리돼 있다. 홍길주에게 기하학을 가르쳐준 스승이기도 한 김영은 인천 사람으로 신분이 미천하고 용모가 꾀죄죄하고 말도 어눌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두각을 나타낸 분야가 있었으니, 역상산수(천체의 운행을 추정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최고였다. 그런 그의 재능을 알아본 관상감 각신(閣臣) 서호수는 김영을 홍길주의 조부 홍락성에게 추천했고, 김영은 관상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미쳐야 미친다>에 따르면 김영은 1789년,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수원 화성으로 이장할 당시, 해시계 등을 만드는 일에 발탁돼 <조선왕조실록>에까지 그 행적이 기록됐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정조의 특명으로 벼슬까지 받아 역관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주변의 질시를 받고 세상에게 버림받은 채 학문에만 몰두하다가 곤궁을 떨치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고 한다.

책 장수, 조신선
조선에서 책을 판매한 상인은 기록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의 서적 외판원 조신선(曺神仙)은 그런 면에서 더욱 돋보이는 인물이다. 18세기는 책을 보는 애서가들이 넘쳤던 반면, 책을 사고파는 서점은 거의 없었다.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를 연결해주는 중매인을 통해 거래가 이뤄졌고, 이는 TV 드라마에 종종 소개됐던 책 거간꾼, 또는 서쾌였다. 18세기 정조 시절의 서쾌 조신선은 후세까지 이름을 전한 거의 유일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구매자를 직접 찾아다니며 책을 중개했던 열정을 보이면서 폭넓은 고객층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의 고객 중에는 다산 정약용과 조희룡, 조수삼, 서유영 등이 있었는데 모두 조신선의 전기를 남길 정도로 열혈 독자였다. 그중 정약용은 조신선을 두고 “붉은 수염을 한 사람으로 우스갯소리를 잘했으며, 눈에는 번쩍번쩍 광채가 번득였다”고 묘사했다. 그는 제자백가의 온갖 서적, 문목과 의례 등에 해박한 지식인이기도 했다.

여행가, 정란
동래 정씨 명문가 출신인 정란(鄭瀾)은 조선 최초의 전문 산악인으로 기록된다. 그저 여행이 좋아 조선 천지를 발로 누비며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대동강에서 금강산까지 오고간 여행가였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글과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벽광나치오>에 소개된 정란은 세속적 출세에는 관심이 없었던 인물로 그려진다. 20대에는 문장을 잘 짓고 싶다는 포부를 가졌고, 서른에 접어들면서 경전을 공부하고 문장을 쓰는 선비 대신 여행가라는 길을 택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산수와 자연을 탐방하는 여행은 선비에게 좋은 취미였지만, 여행에만 몰두하는 것은 현실 도피라며 선비에게 금기시됐다. 정란에게 여행은 현실 도피가 아닌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