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 = 김상훈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법학박사]미국 통일상속법(UPC)은 1990년 개정 시 법원의 하자치유권을 포함시켰다. 피상속인이 문서를 자신의 유언장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점만 명백하게 입증되면 형식 요건의 하자에도 불구하고 효력을 인정해주고 있는 것이다.

유언장의 형식 요건에 하자가 있는 경우 그 유언장은 무효가 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형식 요건에 하자가 있다고 해 무조건 유언을 무효로 하는 것은 유언자의 의사에 반하기 때문에 이러한 하자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강구돼 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실질적 일치의 법리(Doctrine of Substantial Compliance)’와 ‘하자치유권(Dispensing Power)’이다. 지난달에 이어 이번에는 하자치유권에 관해 알아보고자 한다.
피상속인 의사 입증 시 유언장 하자치유
하자치유권은 어떤 문서가 유언장으로서 적법하게 작성되지 않았더라도 피상속인이 해당 문서를 자신의 유언장으로 삼으려고 했음이 합리적 의심 없이 분명한 경우에 그 문서에 대한 유언검인을 허용할 수 있는 법원의 권능을 말한다. 즉, 이는 형식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을지라도 피상속인이 유언장으로 삼으려고 의도한 문서를 유효하게 만들 수 있는 권능이다.

하자치유권은 호주 남부에서 처음으로 입법화됐는데, 존 H. 랑바인(John H. Langbein) 교수의 지지를 얻으며 미국에 소개됐다. 그는 실질적 일치의 법리에 의존하기보다는 법령으로 법원에 하자치유권을 부여하는 것이 형식적 요건을 흠결한 유언장을 보다 적극적으로 구제하는 데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하자치유권과 실질적 일치의 법리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자는 피상속인의 의사를 중요시하는 데 비해 후자는 하자의 객관적인 현상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자에 따르면 형식 요건의 하자의 정도가 어떠하든 간에 피상속인이 그 문서를 자신의 유언장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점만 입증되면 하자가 치유되지만, 후자에 의할 경우 유언장의 형식이 법정 요건을 만족시킬 정도로 법정 요건에 충분히 근접했는지 여부를 따진다. 결과적으로 실질적 일치의 법리의 경우에는 하자의 객관적인 정도에 따라 치유 여부가 달라진다.

하자치유 조건은 ‘명백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
미국 UPC는 1990년 개정 시 법원의 하자치유권을 포함시켰다. 다만, 입증의 정도에 있어서는 ‘합리적인 의심이 없을 정도(no reasonable doubt)’보다 더 높은 기준인 ‘명백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clear and convincing evidence)’를 요구하고 있다. 이 기준은 미국 민사소송에 있어서 가장 높은 입증 기준이다.

1990년 UPC 규정(§2-503) ‘유언장으로 의도된 문서 등’에 따르면 어떤 문서가 규정(§2-502)의 요건과 일치하게 작성되지 않았을지라도 만약 그 문서에 대한 유언검인을 신청한 사람이 명백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로 아래의 사실을 입증한 경우에는 그 문서는 규정의 요건과 일치하게 작성된 것으로 취급된다.

전제조건이 되는 입증 요건은 ▲ 피상속인이 그 문서를 자신의 유언장으로 삼으려 했다는 사실 ▲ 피상속인이 그 문서로 유언장의 일부 또는 전부를 철회(revocation)하려 했다는 사실
▲ 피상속인이 그 문서로 유언장을 추가 또는 수정하려 했다는 사실 ▲ 피상속인이 그 문서로 선행 유언장의 일부 또는 전부를 부활시키려 했다는 사실이다.

1990년 UPC는 캘리포니아를 포함해 콜로라도, 하와이, 미시간, 몬태나, 사우스다코타, 유타 등 여러 주에서 채택됐으며, 1999년에 제3차 재산법 리스테이트먼트도 하자치유권을 입법화했다. 즉, 리스테이트먼트는, “유언검인 신청인이 명백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로 피상속인이 그 문서를 자신의 유언장으로 채택했다는 점을 입증할 경우 유언장 작성과 관련한 무해한 하자는 치유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자치유권을 적용해 사건을 해결한 대표적인 판결이 2002년 몬태나 대법원의 홀 유산사건(In re Estate of Hall, 2002년)이다. 이 사건의 유언자인 짐(Jim)은 몬태나주에서 살다가 1998년 10월에 75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아내인 베티(Betty)와 전처의 딸들인 샌드라(Sandra)와 샬럿(Charlotte)을 남겼다.

짐은 1984년 4월에 유언장을 작성했으나(최초 유언장), 베티와 공동유언장(joint will: 두 당사자가 하나의 유언장에 작성한 유언)을 작성하기로 하고 1997년 6월에 초안 작성을 위해 변호사인 로스 캐넌(Ross Cannon)을 만났다. 수차례의 수정을 거친 후 짐과 베티는 공동유언의 조건에 명백히 동의했다. 둘은 그 초안에 서명했고 캐넌이 공증을 했는데 당시 그 자리에는 세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후 짐과 베티에게 최초 유언장을 폐기할 것을 지시했고, 베티는 그 지시에 따랐다.

짐이 사망한 후에 베티가 공동유언장에 대한 약식 유언검인을 신청하자, 샌드라가 약식 유언검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최초 유언장에 대한 정식 유언검인을 요구했다. 공동유언장은 몬태나주법이 요구하는 대로 두 사람의 증인에 의해 인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효력이 없다는 것이 샌드라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몬태나주법은 하자치유권에 관한 법령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에 따르면, 설사 두 사람의 증인이 인증하지 않았더라도 유언검인 신청인이 명백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로 피상속인이 그 문서를 자신의 유언장으로 삼으려 했다는 점을 입증한다면 그 문서가 유언장으로서 적법하게 작성된 것처럼 취급될 수 있었다.

따라서 몬태나주 대법원은 “짐이 베티에게 최초 유언장을 폐기하라고 명한 점 등에 비추어볼 때 짐은 최초 유언을 철회하고 공동유언장을 자신의 유언장으로 삼으려 했다고 보아야 한다”라고 판시하면서 공동유언장에 대한 검인을 승인한 원심의 결정을 확정했다.

일러스트 허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