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머니편집팀]

영화 <박하사탕>
순수로 떠나는 시간여행
[big story]머니 기자들이 뽑은 내 인생의 사랑 콘텐츠
한용섭 편집장

‘사랑’이라는 단어 하면 떠오르던 것은 ‘설렘’과 ‘그리움’이었다. 그리고 ‘상처’와 ‘새 살 돋기’다. 어느 골목길에서 빈속에 속절없이 들이붓던 깡소주처럼 청춘의 사랑은 무수한 그리움과 상처를 남겼고, 그 상처가 아물어 가며 나이를 먹어 갔다. 나이 50줄에 접어들어 사랑은 다소 민망스러운 단어다. ‘위로와 안식’이라는 유사어가 오히려 편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누군가를 안아주는 그런 ‘포근한 사랑’ 말이다. 팔딱거리며 몸부림치는 날것의 사랑은 대부분 과거형이 된 지 오래다.

나에게 ‘사랑이 날것’이었던 시기는 1990년에서 2000년 초반이 아닐까 싶다. 영화를 보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러 극장 앞에서 줄을 서고, 극장표를 자랑스럽게 끊은 뒤에도 넉넉잡아 1시간여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던 호기롭던 시절 말이다. 그 시절의 막바지에 본 영화가 바로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다. 영화의 시작은 기차 밖 풍경이다.

1999년 봄, 마흔 살의 영호(설경구 분)가 허름한 행색으로 야유회 모임에 나타나 행패를 부린 뒤 철로 위에 올라서서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하는 인트로는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직업도 가족도 모두 잃은 삶의 막장에서 외친 그의 절규는 기차 밖 풍경을 역류시키며, 사흘 전 봄, 1994년 여름, 1987년 봄, 1984년 가을, 1980년 5월, 그리고 1979년 가을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마침내 영호는 스무 살 무렵의 첫사랑 순임(문소리 분)을 만난다. 영호에게 지나온 20년이라는 시간은 무슨 의미였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지난 시절의 상처들이 내 상처인 듯 아프고 저렸던 기억이 난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우리에겐 저마다 순수의 시대가 있었다. 그것이 마냥 밝고 순백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그 상처들을 견뎌내고 이만큼 성장한 것이다. 스스로 대견스럽다고 느끼지만 가끔씩 속살 같은 추억이 떠오를 때면 이유 없이 먹먹해진다.

이은미 ‘애인 있어요’
너무 소중해 숨겨 두고픈 사랑
[big story]머니 기자들이 뽑은 내 인생의 사랑 콘텐츠
공인호 기자

모든 세상사가 그러하듯 ‘첫사랑’이 남긴 기억 속 흔적은 제각각일 것이다. 누군가는 달콤 쌉싸름했던 첫 키스를, 또 다른 누군가는 가슴 절절했던 이별의 아픔을 떠올리기도 한다. 때론 그런 기억들이 영화나 노래를 통해 투영돼 가슴 깊숙이 각인되기도 한다. 음반이 발매된 지 무려 13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가수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가 내게는 그런 노래다.

“내 이야기가 노래로 나왔다”며 신기해하던 그녀가 참으로 오랫동안 좋아했던 노래다. 한쪽 귀에 끼워준 이어폰 너머의 노랫말에 “그렇네”라는 건성 어린 대답에 서운함을 가득 담았던 그녀의 핀잔이 여전히 귓가를 맴도는 듯하다. 사실 우리는 나이차가 꽤 많이 나는 연상연하 커플이었다.

뒤늦은 깨달음이지만 그녀는 참 오랜 시간, 참 많이 부족한 나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 같다.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너무 소중해 꼭 숨겨두었죠’라는 가사 말처럼. 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녀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다는 걸 말이다.

‘나 혼자 아닌걸요. 안쓰러워 말아요. 언젠가 그 사람 소개할게요. 이렇게 차오르는 눈물이 말하나요. 그 사람 그대라는 걸.’ 사실 이 노래의 후렴구가 전반부와 다르다는 것은 그녀를 떠나보낸 뒤 한참 후에야 알게 됐다. 참으로 한심했다.

흔히들 후회와 실수의 반복이 곧 인생이라고들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후회 않기 위해 인생을 포기할 수 없듯 사랑 역시 이별과 후회를 두려워한다면 시작조차 하지 못할 테니까.
비록 절절한 후회와 반성으로 끝맺을지언정 가슴 한편에 소중한 추억 하나쯤 되새겨볼 수 있는 사랑이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추억이 되지 않는 그 사람
[big story]머니 기자들이 뽑은 내 인생의 사랑 콘텐츠
김수정 기자

이 영화를 처음 봤던 건 1998년,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충무로에서 단연 남녀 원톱 자리를 차지했던 두 배우의 출연만으로도 이 영화는 무조건 봐야 하는 영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아 두었던 용돈을 털어 개봉하자마자 단짝 친구를 꾀어 함께 극장으로 갔던 기억이 생생한데, 더 생생했던 기억은 당시엔 이 영화가 도통 재미없었다는 것. 패스트푸드와 MSG에 중독된 소녀들에게 평양냉면의 삼삼한 맛을 느껴보라는 식이랄까.

그러다 우연히 10여 년 뒤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 건 취업 준비에 전전하며 청춘의 고달픔을 느끼기 시작할 때였다. 아마도 TV에서 다시 봤던 것 같은데 아무 생각 없이 봤는데도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주인공 ‘다림(심은하 분)’이 된 듯 엉엉 울면서 봤었다. 그즈음 열렬히 좋아했던 오빠와 첫사랑에 실패했기에 더욱 그랬으리라. 그리고 또 10여 년이 지나 2년 전 다시 꺼내본 이 영화의 소회는 사뭇 달랐다.

이제 나는 20대 풋풋하고 순수했던 다림의 모습과 거리가 멀어지고 있고, 사랑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상도 점점 옅어지고 있다. 그래선지 서른 즈음에나 알게 되는 외로움의 실체와 투쟁하듯 견디며 생활하는 중이다. 이런 내게 영화 속 ‘정원(한석규 분)’의 마지막 독백은 돌연 묵직하게 다가왔다.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사랑이 아닐까 싶다. 인생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추억으로만 그치지 않을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외롭지 않을 텐데. 과연 요즘의 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지 자문하고, 또 반성한다.

영화 <베일리 어게인>
모든 순간이 너였다
[big story]머니 기자들이 뽑은 내 인생의 사랑 콘텐츠

정채희 기자

내게 사랑은 백마 탄 왕자님이었다. 왕자님을 위해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바보 온달을 선택한 평강공주처럼 어른이 되면 열렬하고 절절한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 꿈꿨다. 현실은 달랐다. 짝사랑은 ‘찌질(지질)’했고, 첫사랑은 헷갈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만 바라보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내 인생에 등장하지 않았다.

믿었던 사랑에 배반당한 내가 다시 사랑을 믿게 됐다. 3년 전, 우연히 한 마리의 강아지를 만나면서. 어미에게서 젖도 못 뗀 채로 온 나의 강아지는 내게 사랑이란 감정을 일깨웠다. 눈을 뜬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오롯이 강아지의 눈에 내가 담겼다. 일하느라 등을 돌린 순간에도, 화가 나 언성을 높일 때도 너는 오롯이 나만 보았다. 아침에는 정성스레 얼굴을 핥았고, 퇴근하고 돌아오면 나보다 먼저 달려와 나를 반겼다.

나는 하루의 절반을 일하며 보냈고, 남은 시간에는 친구들을 만났고, 때로는 여행을 갔지만 그때마다 너는,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고 기다렸다. 너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었다. ‘내가 이만큼 줬으니까, 넌 이만큼을 줘야 해’와 같은, 재고 따지는 본전 생각이 너에게는 전혀 없었다. 내가 학창시절부터 믿었고, 지금까지 받고 싶었지만 바라지 못했던 순도 100%의 사랑을 강아지, 너에게서 받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정의를 다시 쓰고 있을 때 영화 <베일리 어게인>이 개봉했다. 소년 ‘이든(브라이스 게이사르 분)’의 반려견 ‘베일리’가 환생하고 또 환생해 할아버지가 된 ‘이든(데니스 퀘이드 분)’을 다시 만나는 이야기다. 극중 베일리는 이든이 자신을 외면하고, 떠나고, 함께하지 못하는 모든 순간에도 이든만을 생각하며 존재한다. “이든과 나는 함께여야 하는데 이든이 없다면 내가 존재할 이유는 뭐지?…이든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게 내 삶의 이유라고 생각했어.”

나는 뜬장 안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버려진 개에게서도, 줄에 묶여 1m 반경에 머무는 시골 개에게서도 우리 모두가 바라고 기다린 진짜 사랑을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주어지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이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5호(2019년 0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