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 말고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라”
LIFE • mental health 신영철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한경 머니 = 배현정 기자 | 사진 김기남 기자] 길을 가다 곰을 만났다고 가정해보자. 이땐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가는 게 상책이다. 곰을 ‘스트레스’로 바꿔보자. 안타깝지만 스트레스는 모양만 바뀔 뿐 죽을 때까지 우리를 쫓아온다. 스트레스와 싸워 이기는 법에 대해 신영철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내린 ‘마음 처방전’을 살펴본다.

지난해 12월 31일 서울 강북삼성병원에서 믿을 수 없는 비극적 사건이 벌어졌다. 환자가 휘두른 칼에 의해 임세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사망한 것.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줬던 이 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동료들은 어떠했을까.

“인생의 큰 트라우마가 아닐 수 없죠. 그날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임 교수는 ‘내년에 할 일이 많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실감도 안 났죠. 집사람이 그래요. 제가 자면서 운다고요.”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는 정신과 의사들도 삶의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다. 인터뷰를 위해 강북삼성병원에서 만난 신영철 교수는 “아직 슬프지만, 환자 진료와 추모 사업 등 해야 할 일이 많다”며 “슬퍼할 땐 슬퍼하더라도, 제일 중요한 것은 원래 하던 역할을 하면서 일상으로 빨리 돌아오는 것이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최근 지친 현대인을 위해 <그냥 살자>는 책을 펴냈다. 책의 첫 장에 “나의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가장 큰 조력자였던 고(故) 임세원 교수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칩니다”라는 추모 글을 넣었다.

“그냥 살자는 말을 ‘대충 살자’로 오인할 수 있는데, 그런 뜻은 아닙니다.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은 능동적 포기이자, 수용입니다.”

세계 1등 책임감 내려놓기

셰인 로페즈의 <역경을 통해 성장하기>에 따르면, 9·11테러로 가족을 잃은 2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52%가 자립심, 독립심, 회복 탄력성의 증가 같은 개인적 성장을 나타냈고, 40%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더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으로 나타났다.

신 교수는 “엄청난 스트레스였고 부정적 영향도 컸지만, 함께했던 가족과 동료, 사회의 지지가 성장에 엄청난 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다”고 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우울·조울병 환자가 지난 2013년 7만1687명에서 2017년 8만6706명으로 4년 만에 21% 증가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주변에는 마음이 아픈 이들이 참 많다. 이에 관해 신 교수는 “우울증을 단순한 마음의 문제, 의지의 문제라고 여기는데, 우울한 기분과 우울증이라는 ‘병’을 구별해야 한다”고 했다.

힘든 상황에서 우울해한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예컨대 실적이 바닥인데 휘파람을 분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러나 우울한 상황이 오래 지속되고, 일상에 지장을 주는 정도가 되면 곤란하다. “평소 에너지가 100이라고 할 때 50도 내기 어려운 상태라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엔 공황장애나 급성 불안을 호소하는 중장년층이 부쩍 늘었다. 그는 그 원인으로, 대한민국 남성들의 세계 1등 수준의 ‘과도한 책임감’을 꼽았다.

“중년이 되면 신체적으로 이상 신호가 오기 쉽죠. 그런데 과로하고, 신체 리듬이 깨지면 마치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느껴져요. 척박한 사회에서 버티는 유일한 무기가 ‘몸’이라고 여기거든요. ‘내가 무너지면 우리 가족은 어떡하지’ 이러한 불안이 엄청난 공포를 부른 것입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갖는 것도 좋지만, 가족들과 상의하면 현실의 부담과 짐이 한결 가벼워질 것이라는 조언이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 그렇게 현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려면 마음의 여유가 필수다. 그 여유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그는 종종 “명함 빼고 스스로를 얘기해보라”는 질문을 던진다. 명함이 사라지면 자신의 인생이 사라진다고 믿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전교 1등을 하던 학생이 전교 10등이 됐다고 한강에 뛰어내린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전교 100등이 200등이 됐다고 뛰어내린 뉴스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아이는 성적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걸지 않았으니까요. 10년, 20년 후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과 직책을 동일시하고, 그것이 사라지면 존재 이유가 없다고 믿는 겁니다.”

그는 “명함 말고도 스스로가 귀한 존재이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높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명함 말고도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좋은 친구, 그리고 사회공헌도 하고요.”

30초 감사의 힘

자신감은 ‘얼마나 가졌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언젠가 그는 새벽에 택시를 타고 출근하던 길에 택시기사에게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택시비가 6900원이 나와 7000원을 주고 내렸어요. 그런데 택시기사가 차를 세워놓고 나를 쫓아오더니 200원을 주더라고요. 선생님, 이렇게 일찍 오셨는데 커피 한 잔 뽑아드세요. 오늘 잘 보내시고, 힘내세요 하면서요.”

그는 그때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고 했다. 당시 택시기사는 의사라는 사람이 뒤에 앉아 인상을 퍽퍽 쓰고 있는 것을 봤던 것이리라. 신 교수는 “그 택시기사는 저보다 어쩌면 더 힘든 상황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스스로 제대로 살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고, 치열하게 살아갈 용기가 있는 겁니다.”

신 교수는 우울한 현대인들에게 ‘하루 30초 감사’를 제안했다. 그의 집에도 모든 방 천장에 ‘30초 감사’라는 큼지막한 글씨가 붙어 있다. 현실이 팍팍한데, 감사할 일이 뭐가 그리 많을까. 혹자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 모른다.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다 병원에 실려 간 친구가 있어요. 심장이 막힌 거죠. 그런데 참으로 감사할 일이죠. 만약 통증이 없었다면 죽지 않았을까요.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불안하다, 아프다는 것도 참 감사할 일입니다.”

그는 “오늘 감사할 일이 뭐가 있나 하루일과를 떠올리다 보면, 아주 작은 일이라도 감사한 순간을 떠올리고, 씩 웃게 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신영철 교수는…
사람과 기업의 풍요롭고 윤택한 삶을 위해 노력하는 행복 설계자이자 힐링 멘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경북대 의대를 졸업한 뒤 고려대 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네소타대에서 연구조교수로 중독 문제에 대해 연수했다. 현재 성균관대 의대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상교수로 근무 중이며, 2013년 개설된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장을 겸하고 있다.


신영철 교수가 추천하는 독서 치유 명저

<예민한 게 아니라 섬세한 겁니다>
가끔 자기 성격이 마음에 안 들어 바꾸고 싶다는 환자를 만날 때가 있다. 대부분 착하고, 여리고, 예민한 사람들이다. 스스로 단점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예민함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감정노동자로 살아남는 법>
스트레스 1위 직종인 서비스업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감정노동자들을 위한 책. 핵심은 역시 자존감에 대한 내용이다. 실제 경험들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때문에 스스로 감정노동자라고 생각한다면, 또 감정노동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면 한번쯤 읽어보길 권한다.

<또라이 제로조직>
제목이 좀 자극적이긴 하지만 당신이 조직의 리더라면 꼭 읽어보길. 스스로 좋은 리더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아니, 돌아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또라이가 바로 당신일지도 모른다.

<세로토닌하라!>
개인의 삶에 있어 세로토닌적 생활의 중요성을 잘 설파하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경쟁적·투쟁적·찰나적인 도파민과 노르아드레날린 사회에서 벗어나 세로토닌의 문화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시형 박사의 또 다른 오래된 책인 <품격>은 삶의 여유와 행복이 느껴지는 잔잔함을 준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8호(2019년 05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