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 = 배인구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세상 일이 내 마음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종종 돈 문제 앞에서 가족까지도 배신과 거짓이 난무하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상속이나 증여에도 믿을 만한 계약, 즉 신탁이 필요하다.
상속분쟁 예방 계약 ‘신탁’
제가 초임 판사였던 시절에 만난 사건입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조카뻘인 친척이 할머니의 상속인인 아들을 상대로 약정금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보다 2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두 분 모두 치매를 앓지 않으셨고 병원 신세도 많이 지지 않았으며 나름 건강하게 사시다가 일생을 마치셨더군요.

두 분은 사이도 좋으셨고 남부럽지 않은 재산도 일구었고 자식 뒷바라지도 열심히 해서 유일한 상속인인 아들은 외국에서 교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들이 기쁨이었지만 자주 보지 못하니 서글프기도 하셨겠죠. 당시는 인터넷 전화나 화상통화도 없어서 편지로 안부를 물었고 2~3년에 한 번씩 다니러 가시거나 집에 들른 아들과 정을 나누는 것이 전부였을 겁니다.
자식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고 쓸쓸하다는 표현도 하지 않으셨을 거고요. 이 노부부 인근에 원고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차츰 원고 부부를 자식처럼 의지하고 사신 듯했습니다. 나중에는 별채를 내주고 거기에서 살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노부부는 원고 가족이 곁을 지켜주길 원했고, 버릇처럼 내가 죽으면 집 한 채 정도 살 수 있는 돈을 주겠다고 했답니다. 원고 부부는 유언장이라도 작성해 놓기를 바랐지만 남도 아니고 어르신인 노부부에게 서면으로 작성해달라는 말은 하지 못했고, 두서너 달에 한 번씩은 용돈 하라고 하면서 무엇인가 꼭 손에 쥐여주시는 경우가 있는 양반이니 분명 약속을 지킬 거라 믿었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에 이어 할머니까지 돌아가시고 장례 절차가 다 마무리됐는데 아들이 아무 말도 없이 재산을 정리하자 그제야 무엇인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아들에게 물었다죠. 어른들이 약속했던 것을 언제 줄 거냐고.

하지만 아들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부모님을 잘 보살펴줘서 인사는 하려고 생각했지만 약속을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사실 부모님이 그간 감사 인사를 여러 번 했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식 입장에서 사례금을 준비했다”고만 했답니다.

신탁으로 말 못할 상속 갈등 해결 가능
문서로 작성된 증거도 없고, 원고 부부 외에 다른 증인은 없는 이 사건을 재판하면서 원고 부부의 말이 맞다면 왜 노부부는 생전에 원고 부부에게 증여를 해주지 않았을까 궁금했습니다. 그 의문은 나중에 노부부가 자녀들에게 어떤 것을 전제로 예를 들어 증여 이후 같이 살면서 평생 모시겠다고 약속하고 증여를 해도 자식과 분쟁이 생기는 사건들을 보면서, 그리고 부모 자식 사이에도 서로 기대하는 바가 많이 달라 소송을 불사하는 사례들을 접하면서 조금씩 풀렸습니다.
이런 경우 신탁제도를 활용하면 말 못할 고민이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 본인은 위탁자로서 재산을 관리해줄 수탁자와 신탁계약을 체결하면서 특정인을 수익자로 지정해 사후에 일정 금액이나 특정 부동산을 주도록 약정하면 됩니다. 확실하게 말하고 따져볼 수 있는 남이 수탁자가 되는 셈입니다.

앞에서 든 사례에서 노부부는 재산을 관리할 능력이 부족하지 않아서 이런 고민을 깊이 있게 하지 않았겠지만 고령화가 아주 빨리 진행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재산관리의 문제는 갈수록 주목받고 있습니다. 만약 원고 부부가 경제적 이익에만 급급했다면 노부부와 밀접한 관계라는 점을 이용해서 재산을 빼돌렸을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인감증명서만 가지고도 재산 처분을 쉽게 하기도 했으니까요. 자식처럼 믿었던 사람에게 전 재산을 빼앗긴 억울한 사연도 많이 보았지만, 이처럼 부모처럼 보살폈는데 딱히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수고를 인정해주지 않는 경우에도 무척 억울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여러 번 기일을 진행한 끝에 조정으로 마쳤습니다. 하지만 금액이 합의가 됐을 뿐, 원고 부부와 피고 사이의 감정은 조정되지 못했습니다. 한동안 나를 대신해서 부모를 돌봐준 고마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을 텐데 이제 피고는 원고 부부를 돈 때문에 피고의 부모를 돌봐주고 나서 생색내는 사람이라고 기억할 것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저는 원고 부부가 선의로 노부부를 돌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재산을 온전히 보전한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노부부는 원고 부부에게 계속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목돈을 주고 싶지만 혹시 그 돈을 받고 나서 이사를 해 버리면 어쩌지’, ‘계속 같이 살더라도 이제 받을 것 다 받았다고 전과 같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있어서 옆에서 살갑게 보살펴주는 원고 부부에게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말로만 주겠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노부부가 신탁제도라는 것을 알아서 사후에 수탁자가 원고 부부에게 일정 금액을 주도록 신탁계약을 체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신탁계약을 체결할 때 노부부가 오래 살수록, 즉 보살핌을 받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원고 부부가 받는 돈이 증가하도록 설계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사용하고 재산이 남은 경우에 주는 것으로 할 수 있습니다.

미리 증여를 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겨서 증여를 해제해야 하는 난감한 경우를 예방할 수 있는 것이죠. 또 신탁계약을 체결한 후 원고 부부가 마음이 바뀌어서 예전같이 보살피지 않을 때는 수익자 지정을 철회할 수 있다는 약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법원의 허가가 필요한 경우도 있지요. 하지만 이미 이행된 증여를 해제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원고 부부가 선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면 계약 체결 이후 더 극진히 노부부를 부양하지 않았을까요.

조기 수습으로 갈등 해결
이번 사례처럼 고령이 되면 재산관리 외에도 다른 사람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거동하기 힘든 사람을 케어하고 살림을 보살펴주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기 때문에 비록 대가를 지급하고 보살핌을 받더라도 누구든지 좋은 사람과 오랜 시간 같이 하기를 희망할 것입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나를 지켜준다면 사후에 특정 금액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이 신탁계약으로 가능합니다.

한편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면서 보살펴주는 사람들과 분쟁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집안 살림이나 간병을 도와주거나 보살펴주는 사람들과 재산적 분쟁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가족들은 간병인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당사자는 사실혼 배우자라고 주장하면서 생전에 재산분할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 경우에도 신탁계약을 체결해 수탁자가 재산을 관리하고 수익자로 지정하되 간병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인지, 사실혼 배우자의 노후를 위해 증여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해 두면 법적 분쟁을 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탁이 유용한 한 가지 예를 덧붙이면, 사실혼 배우자라고 주장하면서 본인과 같이 금융기관에 찾아와 예금 인출을 요구하는 경우에 금융기관에서 이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탁계약을 맘대로 해제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재산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안전하게 보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들을 비롯한 상속인들이 신탁계약을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신탁계약을 체결했다고 해서 세제상 혜택을 받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어쩌면 절세라는 측면에서는 불리할 수도 있습니다. 또 견해의 대립이 있지만 신탁계약을 체결하면 유류분 소송에서 자유롭다고 단언하기도 어렵습니다.

아직까지는 이렇게 신탁의 모든 부분이 법률적으로 명확하지는 않지만 신탁계약이 매력적인 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분쟁을 확대하거나 갈등을 증폭하지 않고 조기에 수습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필자가 신탁계약의 체결을 선호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제가 상담했던 어떤 분은 자녀가 한 명이니 상속 계획을 세우거나 유언장을 작성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전혀 갈등이 없을 것 같은 모자지간에도 상속재산분쟁으로 가슴앓이를 하기도 합니다.

엄마는 우선 재산의 대부분을 본인이 상속받는 것으로 상속세 절세 계획을 세우고 차츰 아들에게 이전하려고 하지만 아들 역시 금융재산을 빨리 확보하고 싶어 하기도 하고 서로 특정 부동산을 상속받으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유언장을 작성할 때에는 특정 부동산의 가치가 높았지만 실제 상속이 진행될 경우에는 다른 부동산의 가치가 높은 경우도 있습니다.

피상속인이 본인의 피와 땀으로 만든 상속재산을 사랑하는 상속인들에게 상속하는 경우 대부분 상속을 통해 상속인들이 피상속인을 감사하게 기억할 것을 기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남겨 놓은 상속재산으로 인해 상속인들이 다투고 상처를 받게 되면 피상속인의 의도와는 달리 상속인들은 원망의 마음만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속에 대해 오로지 절세만 염두에 두신 분 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길 원하는지 묻습니다. 부모가 재산을 남겨주는 것은 매우 감사한 것이지만 그로 인해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관계가 만들어진다면 차라리 상속재산이 없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특정재산을 특정 상속인이 상속받아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는지 묻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터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에 재산적 가치에 불구하고 꼭 장남이 물려받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정할 수 있고, 그와 달리 배우자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상속재산의 절반은 무조건 배우자가 상속받아야 하고 임대료 수익이 발생하는 건물을 우선해 상속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부동산을 특정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족이나 가족처럼 가까운 관계에서 재산적·경제적 이해관계를 명확하게 정할 수 있는 신탁계약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속마음을 원하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신탁계약을 통해 가까운 관계에서 분쟁이 발생하지 않고 안전하고 편안한 노후가 보장되길 희망합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3호(2019년 10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