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나와 우리, 느슨해서 더 행복하다

[한경 머니 = 공인호 기자] 한국 사회의 전통적 가치관이 급격히 붕괴되고 있다. ‘가족’ 단위의 삶만이 정상이라는 인식은 더 이상 적용하기 어려워졌고, 1인 가구의 급격한 증가세는 기존의 법적·제도적 패러다임의 전환까지 요구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것일까.


한국 사회의 대재앙으로까지 인식되고 있는 인구절벽. 앞서 국회 입법조사처는 700여 년 이후 한민족이 ‘멸종’ 위기를 맞는다는 보고서를 내놔 큰 충격을 준 바 있다. 6년 전 당시 합계출산율 1.19명을 유지할 경우라는 전제를 달았으니 2018년의 합계출산율 0.97명을 적용하면 멸종 시기는 더 앞당겨질 수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앞서 데이비드 콜먼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도 유례없는 저출산 기조를 이어가는 대한민국을 ‘지구상 첫 소멸 국가’로 지목하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 11월에는 출생아가 44개월째 월별 최저치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사망자보다 적어지는 인구 자연감소를 나타냈는데, 이런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 공산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처럼 유례없는 인구 감소에 대한 분석과 함께 다양한 대책이 쏟아지고 있지만 ‘백약이 무효’라는 한탄이 나올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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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되는 초개인화 시대
지난해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위치한 서울가정법원에서는 우리 사회의 전통적 가족관에 대한 고민을 던져 주는 사건이 있었다. 무려 50년 가까이 자리를 지켜 온 4인 가족상(像)이 철거된 것인데, 지금의 가족 형태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된 데 따른 것이었다. 1인 가구 증가세는 최근 10여 년 이상 대한민국 사회를 관통해 온 주거 및 생활 트렌드로 자리 잡아 왔다.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의 경우 1900년대 말부터 독신 인구의 증가세가 진행돼 온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전례 없는 급증세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가속화되는 개인화 트렌드는 각자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개인주의의 확산과 함께 인간관계 역시 ‘덜’ 교류하는 차원을 넘어 ‘완벽히 혼자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려는 욕구가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우리 경제·사회의 트렌드로 자리매김한 ‘워라밸(work & life balance)’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 역시 자신의 시간을 직접 통제하는 것을 넘어 일의 방식과 자신의 생활 공간마저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재구성하려는 욕구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현대의 개인들은 고립을 통해 ‘외롭다’는 감정이 아닌 ‘평온함’을 느끼고, 주위의 모든 이슈에 대해서도 ‘내가 개입돼 있거나’ 혹은 ‘관심이 없거나’ 둘 중 하나로 인식하는 경향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주거 공간에 대한 인식만 하더라도 과거의 ‘이웃사촌’ 개념은 퇴색된 지 오래며, 아파트는 물론 다가구주택, 오피스텔 가릴 것 없이 내 이웃에 어떤 사람이 거주하는지조차 관심이 없다. 최근 개인들의 주거 동향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현재 살고 있는 동네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은 매년 큰 폭으로 줄어드는 등 과거 ‘우리 동네’에 대한 연대감과 소속감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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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한 도시화가 진행 중인 중국 역시 1990년대 4.9%에 불과했던 1인 가구 비율은 2010년 14.5%로 급격한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유럽 주요 도시의 1인 가구 비율은 이미 50%를 넘어선 상태다. 나라 전체로 봐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은 독신 가구가 전체의 40%를 차지한다는 통계도 있다. 미국 역시 1950년대 20%에 불과했던 독신 가구는 현재 50%를 상회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개인주의적 성향은 국민적 연대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리서치 전문 업체 마크로밀 엠브레인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과 일체감을 느끼나’라는 설문조사에서 긍정적인 답변은 매년 큰 폭의 감소세를 나타내 왔다. 또 지난 2018년 설문조사에서 ‘주변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서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데 문제없다’는 응답은 69.7%에 달한 반면, ‘어려움이 있다’는 응답은 17%에 불과했다. 혼자 시간을 보낼 때의 전반적 느낌을 묻는 질문에도 62.3%가 ‘긍정적’으로 답한 반면, ‘부정적’으로 답한 응답은 2%에도 못 미쳤다.


이 같은 급격한 개인화 트렌드와 함께 느슨해진 인간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소재는 ‘유튜브’의 급부상이다. 한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대명사로 불렸던 페이스북은 물론 네이버 밴드, 카카오스토리 등 가까운 지인과 사생활을 공유하던 SNS 이용 시간은 큰 폭의 감소세를 나타내는 가운데 유튜브의 성장세는 가히 독보적이다. 이 같은 결과는 유튜브가 새롭고 다양한 콘텐츠를 자신의 경험으로 내재화할 수 있는 반면, 페이스북은 타인의 특별한 경험과 자랑이 콘텐츠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이용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주기 때문이다.


결국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받는 상대적 박탈감과 우울감이 SNS 이용 패턴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이는 SNS가 인간관계 확장의 매개체이기도 하지만, ‘아는 사람’을 밀어 냄으로써 자존감을 지키려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용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최근의 인간관계 대상이 스마트폰 중심으로 대체되고는 있지만, 이 과정에서 가족과 오랜 지인과의 관계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으며, 이는 1인 체제를 설명하는 중요한 심리적 전제가 되고 있는 셈이다. 과거에는 가까운 지인과 가족이 한 개인을 지원하는 시스템의 기둥 역할을 맡았다면, 지금은 개인 중심으로 인적 네트워크가 조직되는 형태로 사회 구조가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급진전 중인 모바일 관련 기술 역시 공동체로서의 가치보다는 개개인의 가치, 즉 ‘초개인화’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초개인화 기술은 스마트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개인의 상황과 소비 성향을 파악하고, 궁극적으로 개개인의 고유한 니즈를 예측해 서비스와 상품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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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끈한 연대’를 강요하는 결혼제도
국가적 대재앙으로 인식되는 저출산 문제 역시 1인 체제 가속화의 파급 효과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경제적 여건을 떠나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을 편안하게 생각하는 1인 가구들이 갈수록 늘고 있기 때문이다. 마크로밀 엠브레인 조사에서 향후 결혼제도에 얽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하느냐는 응답에 무려 87.8%가 ‘동의한다’고 응답했고, 남녀 모두 혼자 살아도 별 지장이 없는 시대인가라는 질문에 79.1%가 ‘그렇다’고 답했다.


우리 사회의 새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 역시 가족으로서의 공동체보다 개인의 삶을 존중받길 원하고 있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 따르면 지난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생인 밀레니얼 세대는 ‘수입은 적지만 좋아하는 일, 취미활동을 즐기면서 사는 삶’을 1순위(27.5%)로 꼽았다. 직전 세대인 X세대(1970년대생)만 하더라도 ‘큰 걱정 없이 안정된 수입으로 가족과 화목할 삶’을 1순위(66.2%)로 꼽은 것과도 차이를 보인다.


이런 세대 간 인식 차는 결혼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미 성인 인구 가운데 독신 인구가 전체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주요 도시의 경우 현재 태어나는 신생아의 25%가량이 미혼인 상태로 생을 마감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사회가 추구해 온 오랜 관습이 개인의 인식과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여성 인권이 신장된 경우, 경제적 안정보다 삶의 질을 중시하는 탈물질주의가 결혼과 출산율 하락을 가속화하는 부차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 30~40대 미혼 여성들에 대한 인식도 조사에서 ‘결혼은 여성이 더 손해’라고 응답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최근 보험연구원은 ‘KIRI 고령화 리뷰’ 보고서에서 2000년대 저출산이 자녀 기피와 가임기 여성의 인구 감소가 주된 요인이었다면, 최근 급속히 진행되는 출생아 감소는 ‘결혼 기피’에 따른 영향이 크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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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에게 사회적, 경제적, 감정적으로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이혼에 대한 회피 심리 역시 결혼과 출산율 하락의 원인으로 꼽힌다. 이혼율 증가와 결혼율 감소 추세가 동반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미 미국과 유럽 선진국에서는 결혼 부부의 40~60%가량이 이혼을 경험하고 있으며, 1인 가구가 늘어나는 개발도상국 역시 이혼율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대목은 결혼 시기가 늦어질수록 이혼율도 높아진다는 점이다. 실제 니콜라스 울프링거 미국 유타대 교수는 32세 이후부터 이혼 가능성이 매년 5%씩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동거 vs 결혼? 사회적 인식 변화 필요
이처럼 인간관계는 갈수록 느슨해지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전통적 가치관과 관습에 얽매여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지금처럼 현상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과 제도 변화 없이 정부 예산만 투입할 경우 인구절벽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저출산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 15년간 150조 원이 넘는 예산 투입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한 것도 저출산 문제가 단순히 경제적 애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전문가들 역시 우리 사회가 1인 가구 증가세와 함께 동반되는 고령화·저출산 현상을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으로 인식하고 정부 차원의 법적·행정적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이미 소비시장에서는 중국의 ‘광군제(독신절)’와 미국의 ‘싱글데이’가 전 세계적으로 이목을 집중시킬 정도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지만, 정부 차원의 정책적 배려는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올 상반기 중 1인 가구에 대한 차별 해소 등의 내용을 담은 종합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대책 마련과 더불어 법과 제도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결혼을 거부하는 독신 가구의 증가세는 갈수록 심화되는 개인주의를 비롯해 급격한 도시화, 인간의 수명 연장, 정보통신기술(ICT) 혁명, 여성 인권 신장 등의 다양한 요인이 맞물린 결과라는 점에서 추세적 반전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과거에는 전통적 가족관에 기반을 둔 출산율 증가에 정책의 초점이 맞춰졌었다면, 이제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용인하고 정책적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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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독신 가구가 일반화된 유럽 주요 나라의 경우 ‘동거’에 대해서도 결혼에 준하는 정부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출산율 방어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미 네덜란드는 지난 1998년 전 세계 최초로 동거를 법으로 인정했으며, 덴마크는 가족 형태를 미혼모, 미혼부 등을 포함해 수십 가지로 구분해 동등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동거의 경우 관계에 있어 유연하면서도 ‘덜 구속적’, ‘덜 영속적’이라는 점에서 개인화 트렌드에 가장 잘 부합하는 가족 형태이자 결혼의 대안으로 선택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사회 트렌드를 분석해 온 김용섭 날카로운 상상력 연구소장은 “세계적인 경제석학이자 미래학자인 자크 아탈리는 ‘2030년이면 결혼제도가 사라지고 90%가 동거로 바뀔 것’으로 전망했다”며 “비혼이 비주류나 아웃사이더로 취급받던 시대는 끝났으며 가족제도로 결혼은 여러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라고 단언했다. 이어 “한국 사회에서는 저출산을 국가적 재난으로까지 바라보고 있는데 지금까지 별의별 방법을 모색해 봤지만 달라진 게 없다. 시대가 바뀌어 결혼관, 가족관, 출산관이 변해 가는데 여전히 과거의 결혼 중심적 틀을 유지한 채 문제를 풀려고 했기 때문”이라며 “당장은 결혼과 동거가 동등하게 축복받고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상황으로 변하지는 않겠지만, 이미 한국 사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아니 불어야 한다. 1인 가구가 주류인 오늘날에는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8호(2020년 0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