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박은영 서울하우스 편집장·미술사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T. S. 엘리엇의 시 <황무지> 가운데 한 구절이다. 꽃과 새싹으로 찾아오는 계절, 봄은 파스텔처럼 포근한 빛깔이다. 연보라, 흰색, 분홍으로 꽃피는 라일락은 색뿐만 아니라 향기가 독특해 신비롭기까지 하다. 달콤하면서도 싸한 냄새를 잠시 짙게 뿌리고 후루룩 스러진다.


풋풋하고 위태로운 4월의 사랑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시인과 화가들은 꽃의 아름다움과 상징을 따라 낭만적 정서를 표현하곤 했다. 그중 라일락을 잘 그린 화가로 아서 휴즈(1832~1915년)가 있다. 대표작 <4월의 사랑>에서 라일락은 인물의 심리를 나타내는 중요한 메타포다. 외딴 폐허나 방앗간 같은 곳에 보랏빛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서 있고, 그 뒤에 고개 숙인 남자의 검은 머리가 살짝 보인다. 여자는 한 손을 가슴에 얹고 남자에게서 몸을 돌리는데,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다. 남자는 여자의 다른 손을 잡은 채 시름에 빠져 있다. 이들의 슬픔은 무엇일까.

아서 휴즈, 4월의 사랑, 1855~1856년, 영국 테이트 브리튼
아서 휴즈, 4월의 사랑, 1855~1856년, 영국 테이트 브리튼
여자의 옆에는 아이비 덩굴이 무성하게 고목을 덮고 있다. 아이비는 힘찬 생명력, 영원한 사랑과 결합을 뜻하므로 그들이 나눈 사랑의 열정을 가리킨다. 그런데 바닥에 연분홍 장미 꽃잎이 흩어져 있으니 이제 사랑이 시들었다. 뒤에 앉은 남자의 손에도 꽃잎이 거의 다 떨어진 장미 한 송이가 들려 있다. 뒤쪽 창문 밖 밝은 곳에 라일락의 유록색 나뭇잎과 연보라색 꽃송이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멀리서도 라일락의 보랏빛 향기가 물감처럼 퍼져 여인에게 스며든 듯하다. 그녀의 옷차림은 긴 치마와 줄무늬 스카프, 소매 장식, 목걸이까지 온통 보라색 톤이다. 치마는 짙고 차가운 보라색인 반면, 반투명한 스카프로 이동하면서 색과 질감이 아주 연하고 부드럽게 달라진다. 길게 늘어뜨린 스카프에 매달린 가느다란 술과 짧은 소매에 묶인 얇은 리본도 라일락의 작은 꽃잎처럼 섬세하고 앙증맞다. 이 정도면 그녀 자체가 라일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품의 주제는 제목이 가리키듯 ‘4월의 사랑’이다. 4월에 피는 라일락처럼 신선하지만 쉽게 스러지는 풋사랑을 그린 것이다. 젊은 커플은 사랑이 깨질 위기에 처해 괴로워하고 있다. 여인의 실제 모델은 화가의 첫사랑 트리피나 포드인데, 그림을 그릴 무렵인 1855년에 휴즈는 그녀와 결혼했다. 이듬해 이 작품을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서 처음 전시했을 때 카탈로그에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 <방앗간 집 딸>의 일부가 함께 실렸다. 그 시에는 “사랑은 갈등과 번민으로 상처 입고, 사랑은 달콤한 후회가 되며, 헛된 눈물로 눈이 젖는다”라는 구절이 있다. 행복과 고뇌로 가슴 태우던 첫사랑의 열정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고 잊히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휴즈의 <4월의 사랑>은 연애의 파국을 사실대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격랑과 변화를 맞을 수밖에 없는 사랑의 속성을 그린 것이다. 부서지기 쉬운 첫사랑의 열정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애틋한 마음의 표현이랄까. 라일락 향기가 봄바람을 타고 퍼지듯이 쌉쌀하고 감미로운 사랑의 추억이 긴 여운으로 맴돈다.

에두아르 마네, 라일락 꽃병, 1882년경, 개인 소장
에두아르 마네, 라일락 꽃병, 1882년경, 개인 소장
마네가 그린 라일락 정물화
라일락은 장미, 백합, 튤립에 비해 종교적·역사적으로 중요한 상징이 되거나 사회적으로 크게 주목받지는 않았다. 근대 이전 꽃 정물화 장르에서 라일락을 단독으로 그린 경우는 찾기 어렵다. 라일락을 주제로 한 정물화는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자주 나타난다. 무겁고 격식 차린 종교나 전통보다는 가볍고 평범한 주변 현실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사소한 일상과 순간적 시각의 표현에 일찍 눈을 뜬 에두아르 마네(1832~1883년)도 라일락 정물화를 여러 점 그렸다. 마네는 40대 후반부터 매독으로 쇠약해져 말년에는 큰 그림 대신 정물화 같은 소품을 주로 제작했다. 1882년경에 그린 <라일락 꽃병>은 유리병에 꽂힌 라일락 송이를 간결한 필치로 표현한 작품이다. 마네는 꽃잎을 하나하나 묘사하기보다는 세부를 과감히 생략하고, 눈에 들어오는 빛과 색채의 변화를 신속히 포착했다. 붓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보라색을 다양한 톤으로 변주한다. 부서질 듯한 라일락의 작은 꽃잎들이 향기가 돼 흩어지며 주위를 보랏빛으로 물들인다.
에두아르 마네, 흰 라일락과 장미 꽃병, 1883년, 미국 댈러스미술관
에두아르 마네, 흰 라일락과 장미 꽃병, 1883년, 미국 댈러스미술관
마네의 병은 점점 더 깊어져 급기야 다리가 썩어 가는 끔찍한 지경에 이른다. 1883년 2월 말, 고통을 참으며 그는 다시 라일락을 그린다. <흰 라일락과 장미 꽃병>인데, 어둠을 배경으로 테이블로 보이는 하얀 수평면에 유리병이 수직으로 놓여 있다. 병에는 장미 3송이가 가운데 꽂혀 있고 양쪽에, 흰 라일락 꽃송이들이 팔을 벌리듯 대칭으로 펼쳐진다. 엄격하게 수직, 수평을 배치해 꽃병이 십자가 모양을 띠며 화면을 꽉 채운다. 뭔가 의도적인 듯한 이 구성은 다시금 정물화의 전통적 상징성을 떠올리게 한다. 장미 3송이는 성모 마리아와 삼위일체의 상징이므로 사랑과 구원을 뜻한다. 하얀 라일락은 생명과 동시에 죽음과 부활을 암시한다.
꽃을 그리면서 마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젊은 날의 감미로운 추억을 회상하며 삶에 대한 가냘픈 희망을 갈구했을까. 어쩌면 최후를 예감한 마네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하며 구원과 재생을 염원했을지도 모른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라일락은 꿈을 꾸게 하고, 또다시 삶의 덧없음을 일깨운다. 그해 4월 마네는 결국 왼쪽 다리를 절단하고 회복하지 못한 채 4월의 마지막 날 세상을 떠난다.
T. S. 엘리엇은 장시 <황무지>(1922년)에서 4월을 가리켜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말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기” 때문이다. 이 시는 제1차 세계대전 중 4월에 사망한 친구를 회상하며 개인적 감정을 20세기 문명의 황폐함이라는 보편적 사상으로 전개시킨 것이다. 전쟁이 세상을 휩쓸고 기존 가치가 허물어진 시대에 봄이 온들 진정한 재생이 가능할 것인가. 4월은 잔인하게도 새 생명을 꽃피워 오히려 사라진 것, 죽은 것을 상기시킨다. 돌이킬 수 없는 추억을 아프게 되살리고 채울 수 없는 욕망을 헛되이 부추긴다. 움츠린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상의 복잡한 활동 속으로 내몬다.

4월, 봄이 아우성치는데 마음이 잠잠할 수 있을까. 거짓 희망에 휘둘리지 않고, 세속의 헛됨을 잊지 않으며, 윤회하지 않는 죽음을 바랄 수 있을까. 신비로운 라일락 향기가 살랑거리며 코끝을 자극하는데.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9호(2020년 0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