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 =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앞으로도 끝없이 성장할 것만 같은 도시. 수백 층의 건물이 빽빽하게 늘어서고 거미줄처럼 엉킨 공중 도로와 지하 시설은 디스토피아를 그린 공상과학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미래 도시는 정반대의 모습을 가질지도 모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불러온 예측하지 못한 오랜 과거로의 회귀, 언택트(untact) 시대다.

[big story] 언택트 사회, 과거로 돌아간 미래
코로나19가 장기화될 추세다. 이미 세계 200개국으로 퍼진 상태다. 확진자도 계속 늘고 있다. 백신도, 치료제도 없는 신종 감염병이다. 전 세계가 사회적 거리 두기에 나선 이유다. 마땅히 쓸 수 있는 다른 카드가 없기 때문이다. 1975년 이후 새로 나타난 신종 감염병만 50여 종. 언택트 시대는 이미 우리에게 다가온 미래다.


사실 언택트 사회는 처음이 아니다. 인류가 침팬지와 갈라선 이후 수백만 년 동안 우리는 아주 띄엄띄엄 살았다. 수렵채집 사회의 인구는 100여 명에 미달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다른 부족을 만나는 일은 드물다. 전쟁이나 교역, 혼인을 위해서 가끔 접촉했지만, 그래 봐야 두세 부족이다. 넓은 초원이나 툰드라, 극지와 바다에서 드문드문 살았다. 구석기 시대에 감염병이 유행하지 못한 이유다.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좀 바뀌었다. 많은 사람이 도시에 모여 살았고, 가축을 키우면서 신종 감염균이 대거 유입됐다. 신석기 부족은 주기적으로 절멸했다.


전염병이 한번 돌면 아예 도시를 버리고 떠나곤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늘 이동하며 살았으니 그리 어려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가 점점 늘어나면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졌다. 신석기 초기 500만 명에 불과하던 인구는 수십억으로 늘었다.


인구는 가파르게 증가했다. 18세기 영국 런던은 가장 큰 도시였지만, 인구는 100만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20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사는 메가 시티만 전 세계 10개다. 그리고 뉴욕을 빼면 모두 아시아에 있다. 사실 정주화와 도시화는 쾌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비좁고 더러운 곳에서 복작대며 살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경제적인 선택이었다.


다시 만나는 미래

[big story] 언택트 사회, 과거로 돌아간 미래
불과 수개월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경험했을 뿐인데, 앞으로 언택트 사회가 도래하리라 예측하면 너무 성급한 것일까. 그러나 원래부터 우리는 그리 많은 관계가 필요하지 않다. 자주 연락하는 사람의 수는 가족과 친지, 그리고 친구와 동료를 다 합쳐도 100여 명을 넘기 어렵다. 사실 아파트 앞 라인에 사는 사람과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우리는 늘 다른 이를 그리워하지만, 그렇다고 수천만 명을 만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신석기 농업혁명이 그랬듯이 멈추지 않는 도시화를 이끈 원동력은 바로 효율성이다. 도시에 가야 직장이 있고, 직장이 있어야 짝도 찾을 수 있다. 물론 공해도 심하며 범죄도 흔하지만 이런 비용은 당장 개인이 부담하지 않는다. 결국은 사회 전체가 청구서를 받아들지만, 각자에게는 이득이라는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이다. 하지만 이번에 밀린 돈을 단단히 갚게 됐다. 100나노미터(nm) 크기의 바이러스가 막대한 비용의 청구서를 인류 전체에 내밀었다.


이미 도시 생활의 비용은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높아졌다. 살인적인 주거비는 정말로 살인 충동을 느낄 수준이다. 1억 원을 훔치다 잡히면 감방에 갈 텐데, 배정되는 공간이 대략 3.3㎡다. 그런데 강남의 땅값은 3.3㎡당 1억 원이다. 이쯤 되면 교외로 이사를 갈 만도 한데, 그런 움직임은 미약하다. 도시 생활이 주는 경제적 이득이 여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천칭이 반대쪽으로 확 기울고 있다.


19세기 런던은 뿌연 스모그와 잦은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았는데, 좀 여유가 있는 런더너는 도시를 떠나 교외로 향했다. 고전적 의미의 언택트는 이미 200년 전에 시작됐다. 물론 공장과 사무실은 런던에 모여 있었고, 살림살이가 팍팍한 노동자 계층은 도무지 도시를 떠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인터넷 혁명은 시공간의 장벽을 허물었다. 반드시 도시에 와야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19세기의 런던만큼이나 다양한 몸살을 앓고 있는 서울. 그러나 런던과 달리 부유층만 교외로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재택 온라인 수업과 재택근무를 허락해 주기만 하면 말이다.


학교와 기업문화는 금세 바뀌지 않는다고? 이미 200만 명의 대학생이 모두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고 있다. 600만 명의 초중고교 학생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어른이 되면 물리적인 출근의 필요성을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상당수의 직장이 제한적인 재택근무를 실시하고 있다. 나도 집에서 이 글을 쓴다. 처음이라 서로 어색하고 힘들지만, 우리는 금세 적응할 것이다.
아이폰이 최초로 발매된 것은 2007년. 단 15년 만에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종일 전화기를 붙들고 살 것이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게다가 이번엔 강력한 외부 충격이다. 언젠가 다가올 미래였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우당탕 소리를 내며 우리 곁에 당장 와 버린 것이다.


언택트 사회를 위한 가정 지침


변화는 늘 고통을 수반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한 달 조금 넘었다. 씻고 잠자는 곳으로만 알던 집에서 온종일 지내려니 괴롭고 힘들다. 집에서 공부해 본 적도 없고, 일해 본 적도 없다. 넓은 거실과 침실만 있는 집 안의 구조도 마땅치 않다. 직주근접과 학군만을 보고 살 곳을 정하다 보니 도시인의 집은 사실상 기숙사로 전락한 지 오래다. 좁은 집에 어른과 아이가 복닥거리니 짜증나고 힘들다. 은둔형 외톨이도 아닌데, 종일 집에 있자니 영 고역이다. 마땅히 놀 거리도 없고, 책장에는 읽을 책도 없다. 준비가 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이라면 문밖으로 나서면 그만이지만, 이제는 어렵다. 만약 코로나19의 기세가 더 등등해지면 더욱 강력한 사회적 거리 두기를 강요받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오랜 선조의 지혜를 다시 끄집어내자. 과연 우리 조상은 집 안에서 수십 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어떻게 온종일 같이 지냈을까.


우리 선조가 엄격한 가정 규율을 정한 것은 단지 유교적 문화 때문은 아니다. 직장에는 직장의 규칙이 있듯, 가정에는 가정의 규칙이 필요하다. 주말에 한 번이라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언택트 사회에서 재택 온라인 수업, 재택근무를 하려면 일정한 규율이 필요하다. 매일매일 주말이 될 수는 없다. 하루의 시간표를 정하고, 쉬는 시간과 일하는 혹은 공부하는 시간을 확실하게 분리해야 한다.


시간뿐 아니라 공간에 대한 지침도 필요하다. 좁은 아파트에서 각자의 공간을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구분해야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업무 공간을 나누고, 아이들이 공부하는 방도 구분해야 한다. 부엌은 탕비실이고, 거실은 회의실이다. 온종일 탕비실과 회의실에서 노닥거리는 회사원이 없듯이, 언택트 사회의 재택근무에도 규율이 필요하다. 특히 어린 아이에게 이런 점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허락 없이 낮에 거실 소파에 누워서는 안 된다는 가정 지침이다.


언택트 블루를 위한 처방전


이참에 신났다고 하면 좀 곤란한 말이지만, 집순이·집돌이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싫지 않다. 꿈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지옥철 출근하고 만원 버스 등교할 일도 없다. 오히려 학습과 업무는 집에서 더 잘된다는 부류다. 언택트 사회의 수혜자다.


그러나 우울감에 빠져 힘들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어디든 돌아다녀야 기운이 난다는 부류다. 늘 분주하게 돌아다녀야 직성이 풀리고, 지쳐서야 집에 돌아와 노곤한 몸을 누이는 보람에 사는 사람들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이들에게 구속영장이나 다름없다. 매사가 짜증나고 답답하다. 불규칙한 생활이 이어지고, 술도 늘어난다. 이내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해친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사람들을 만나지 말라는 것이지, 방 안에만 갇혀 있으라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없는 곳은 어디든 있다. 좀 더 강력한 거리 두기 정책이 시행되면 공원 산책도 어렵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넓은 공원이나 한적한 자연이라면 사실 더 안전하다.


꼭 사람을 직접 만나 교감해야 안심이 된다는 부류라면. 지금 왼손에 들려 있는 스마트폰을 활용하자. 화상통화는 생각보다 생생하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하되 심리적 거리는 좁히자. 심지어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말이 불편하니 물리적 거리 두기로 달리 부르자는 주장도 있다. 뭐 이름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좋아하는 사람, 정다운 연인과 얼굴을 (화면으로)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자.


장기전에 대비하려면 역시 독서다. 1년에 책 1권 제대로 읽기 어려운 바쁜 세상이다. 듬성듬성한 책장을 둘러봐도 온통 실용서와 수험서, 잘해야 자기개발서나 에세이집이다. 적잖이 민망하다. 이번에는 소설을 읽어 보자. 누구나 제목을 알지만 읽어 본 사람은 없다는 <죄와 벌>을 정말 읽어 보는 것이다. 라스콜니코프가 앓은 전염병은 무엇일까. 직접 알아보자. 명작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혼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것이다. 돈도 별로 들지 않는다. 편안한 독서용 소파와 밝은 조명이면 충분하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돕기 위해서 전자책을 무료로 개방한 대형 서점도 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독서삼매경에 빠져 보자.


사회적 거리 두기를 통해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일상적인 수준을 넘는 심리적 고통을 느낀다면 즉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만약 불면증이나 식욕 저하, 기력 감소 등의 증상이 있다면 지체하지 말자. 국가트라우마센터는 재난 상황에서 힘들어하는 일반인을 위한 다양한 조언을 제공하고 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0호(2020년 05월) 기사입니다.]